거북이목을 한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아침 세상과 소통하는 지혜 2
박세현 지음 / 예서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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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렵다'는 게 뜬금없게 들리지 않는다. 시 습작을 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할지 모른다. 시가 시인 이유를 모르는 독자들은 왜 시(詩)인가를 반복해 질문한다.

독자는 '어려워서 시'란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상징과 은유, 함축과 절제 등을 이해한다면, 아니 시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산문이다. 제목은 사뭇 시 같지만 왜 시인은 굳이 '산문'이란 점을 표지 머리에 달았을까.

산문체로 쓴다고 다 산문은 아니다. 근현대시 역시 시인에 따라서는 산문체로 쓰기도 한다.

이 책은 삶 자체를 픽션으로 보고자 하는 관점을 지속적으로 견지한다. 그래서 지은이 자신과 글 속의 H는 적당히 포개어지고 때로는 다른 인물로 분화되어 드러난다. 산문이라고 굳이 저자가 책 표지에 밝힌 것은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싶다.





이 책은 시를 대하는 시인 자신의 임상적 태도가 충분하게, 솔직하게, 까칠하게 드러나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책의 첫 부분부터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는다. 어디에 살며, 책상 위의 사소한 물건까지. 또 집 주위의 잘 가는 음식점이나 하루 일상에 대해 아낌없이 밝힌다. 시인 h 대역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하나 이미 마음속에는 확실하게 밝히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왜 그랬을까. 독자는 잠시 멈춰 소제목들을 살펴본다. 거짓투성이의 진실 / 더 모호하게, 완전 모호하게 / 읽지 않는 독서모임 등 시니컬한 눈빛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주목하고 있는 사실들에 역설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특히 '3만원짜리 시'에는 시인 h가 밥벌이도 못하는 시를 쓰는 존재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얼핏 계산해도 한 달 백 편의 시를 쓴다해도(지면도 없겠지만) 최하층 노동자의 월급에도 못 미치는 상태라는 걸 암시한다.

시 한 편에 3만원이라는 것은 독자가 생각하기에는 도무지 설득되지 않는다. 왜 이런 현실을 자신만만하게 드러내는가. 자책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이 시이고, 시가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인가.





시인 h는 나의 대역이자 뜬소문이라고 항변해야 설득력이 없다.

"꿈이 깨어 있는 삶의 다른 해석이라면, 깨어 있는 삶 또한 꿈의 또 다른 해석이라는 르네 마그리트의 말은 내 성급한 문자들이 종이 위에서 꾼 꿈에 어울리는 해몽이 되어 주리라.(뒷표지)는 표현이 더 적확한 것이리라."

결국 저자는 시인 h를 통해 시에 대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그린 산문집이다.

시인 h에게 대역을 맡기면서 '산문'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저자의 말이 얼핏 공감이 간다.





"이 책에는 자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러나 시인의 라이프 스토리일 거라고 생각하면 곧 실망하게 된다.

그것은 저자의 픽션이자 가장(masquerade)이다. 시인은 산문을 통해 자기를 드러나면서 자기를 교묘히 숨기거나 극화하고 있다.

심지어 저자는 이 산문을 오로지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꿈 속에서 꿈을 꾸듯이 독자는 산문 속에서 하나의 현실을, 또다른 꿈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시라는 비현실이다. 시인의 일상이 현실처럼, 소설처럼 독자 앞에 제시된다.

시인 h는 박세현 시인으로 지목되지만 실제로는 박세현 이상이거나 그것을 넘어선다. 즉, h는 그저 박세현인 척하는 가공의 대역이다.

그렇든 저렇든 독자는 시인 h가 처한 하나의 현실(또는 환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시라는 추상을 한껏 스트레칭해보는 덧없는 진실을 만나게 된다. 재즈적이고 이종격투기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박세현 특유의 산문은 이제 박세현 장르로 진화했다."

이제금 서평가의 글을 읽고서야 확신이 든다.





집에 들렀다가 다시 집을 나서는데 30분 걸렸는데 사실은 30년이 걸렸다. 오늘은 목요일 오후다.

얼굴을 스치는 이 바람, 이 공기, 이 느낌, 이 생각이 모두 살아생전의 시다. 몸 속에 시가 흥건하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것.

이 순간을 글로 쓰고 나면 시는 사라진다. 문장에 담긴 것은 시와 함께 흘러가고 남은 찌꺼기다. h의 문장에서 증발한 것만이 오로지 h의 시다.

h가 시라고 썼던 시들은 언어의 껍질일 뿐이다. h가 하고 싶은 말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게 h의 시다.

-「언어의 껍질」중에서





저자 : 박세현


1953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83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고, 25년간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교수생활을 했다. 시집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남자』 『저기 한 사람』 『헌정』 『본의 아니게』 『사경을 헤매다』 『치악산』 『정선아리랑』 『길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 산문집으로 『시를 쓰는 일』『오는 비는 올지라도』 『시만 모르는 것』 『시인의 잡담』 『설렘』을 출판했으며,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세계』가 있다. 빗소리듣기모임 준회원으로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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