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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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열여덟 나이로 쓴 청소년 성장 에세이 『네 멋대로 해라』로 일약 스타 에세이스트 반열에 오른 작가 김현진이 첫 번째 소설집으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간 칼럼, 에세이, 소설 등 다방면에서 꾸준한 활동인 보인 작가 김현진의 신작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각기 다른 삶의 변곡점을 맞이한 여덟 명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식 연작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소설이 서로 연관성은 없다.

「정아」의 주인공 정아, 「정정은 씨의 경우」의 주인공 정은, 「아웃파이터」의 주인공 영진, 그리고 정화, 지윤, 화정, 수연, 숙이.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한국’의 ‘여성’이라는 거대한 고리로 이어져 있는 인물들이다. 그 거대한 고리 속 이야기들을 면밀히 들여다보자면, 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대상에게 상처 받은 뒤 특별하거나 대단할 것은 없던, 그래도 소소한 행복 같은 것들이 가끔 놓여 있던 자신의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다. 그 대상은 대부분 그들이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들의 삶은 여지없이 ‘불안’ 혹은 ‘불행’이라는 맥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러나 여덟 명의 주인공들은 그 ‘불안’과 ‘불행’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동적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정아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자. 정아는 재수를 포기한 후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 여성이다. 서울에서 연락을 주고받던 고향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된 탓에 정아는 자연스레 그들과 연락이 끊긴다. 외롭고 힘든 서울 생활 속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 은미의 꾐에 넘어가 다단계 회사에 발을 들이게 된 정아는 부모와 동생에게까지 급전을 끌어다 쓰게 되고, 가족과도 연락을 두절한 채 지낼 곳 없이 방황한다.

정아는 그때 건호를 만나게 된다.

세차장에서 일하는 건호는 “자판기 커피 한 잔도 백 원 더 싼 곳을 찾아냈다며” 환하게 웃는 구두쇠지만 건호는 “정아를 먹여 살리고, 가끔은 집에 보내는 돈에 자기 돈을 보태기도” 하는 고마운 애인이자 동거인이다. 그러나 그날 정아의 입에서는 자신도 원치 않는 말이 튀어나온다.

“깡통깡통깡통.” 고마운 건호를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정아의 그 말은 제멋대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날은 임신테스터에 두 줄 선이 그어진 날이었고, 그것이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알지도 못하는 건호가 “정아의 뺨에 뽀뽀까지 쪽 해주고 기운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일터로” 떠난 날이었다.

정아는 생각한다. 그때 은미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은미에게 그날 커피만 얻어먹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건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건호가 소개해준 백화점에서 일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웃파이터」영진의 삶은 어떨까. “대학 기간 내내 자신의 학비를 대느라 비는 시간을 온통 아르바이트로 보낸 덕분에 남자 친구는커녕 가까운 친구도 몇 되지 않”는 영진은 회사원이다. 어느 날 거래처 직원이 첫눈에 반했다며 다가왔지만 영진은 그게 싫지 않았다.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 관계가 되고, 이후 고급 호텔에서 첫 경험을 치른 영진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간직해온 동정을 주었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흘린다.

이후 영진은 “첫사랑과 첫 경험을 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그런 행복한 여자”를 꿈꾼다. 그러나 애인과의 시간이 지나갈수록 영진의 “적금통장의 잔액은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애인은 결혼의 ‘ㄱ’자도 꺼내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영진은 주말에 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업무 관계가 얽혀 있으니 당분간 서로 회사에는 비밀로 하자는 그의 말도 영진은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예약 잡기도 어려운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는 거였다.

영진은 “어쩐지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영진은 어렵사리 애인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나랑 결혼하고 싶단 생각은 안 하세요?”

두 눈이 동그래진 애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 나 페이스북에 기혼이라고 되어 있잖아. 그거 못 봤어?”





김병권이 의외로 간단했던 수리를 신속 정확하게 끝마치고 고작 1시 경에 집에 돌아올 줄 그녀는 정말로 몰랐다.

남자를 끌어들인 후 미처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도 그녀는 정말로 몰랐다. 윤정화의 큰 몸집에 처음에는 움찔한 것 같았지만, 이내 택시비 본전은 찾아야 한다는 듯 다짜고짜 키스하며 윤정화의 혀뿌리까지 삼켜버릴 기세로 깊숙이 빨아대던 남자가 갑자기 혀 움직이기를 멈추자 그녀도 눈을 떴다. 그러자 ‘정화 방’이라고 쓴 김병권의 서툰 글씨가 붙어 있는 문 앞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윤정화의 혀를 뿌리부터 뽑아낼 만큼 강렬하게 쭉쭉 빨아 당기던 남자는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한지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점퍼를 집어 들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공동생활」 중에서


감동에 젖어 나는 한껏 가녀리고 연약한, 나는 당신의 여자예요, 라는 촉촉이 젖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 보라지, 눈에 핏발까지 서 있다. 아,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화내주다니. 나는 어쩌면 이 남자를 영원히 사랑할 거….

“고작 그따위 일에 밥벌이를 때려치워? 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으, 응?”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따위 일? 그따위라고? 이게 뭔 소리람?

“오, 오빠……?”

“땅을 파면 돈이 나와 쌀이 나와? 그래, 그놈이 좀 집적거렸다 쳐. 너 사회생활 한두 해 해? 네 말대로 대리 승진한 거 아깝지도 않아? 사회생활 하면서 그런 일 있을지도 몰랐어? 별의별 더러운 인간 다 있어! 그게 사회야! 나도 뭐 좋아서 회사 다니는 거 아니다.”

- 「누구세요?」 중에서





하필이면 남녀 공용이었다. 다행히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 소변을 보고 손을 씻은 후 더러운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마스카라가 뭉친 곳이 없는지 보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중키에 비쩍 마른 체구,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수연은 얼른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남자를 피해 나가려고 했다. 그때 남자가 문손잡이를 열려는 수연 앞을 가로막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는데, 남자가 둘둘 만 신문지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냥 신문지 뭉치가 아니었다.

남자는 수연을 빤히 쳐다보며 신문지를 풀어 바닥에 버렸다. 어두침침한 화장실 조명을 받아 시퍼런 식칼의 날이 번들거렸다.

-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요」 중에서


숙이는 뭘 몰랐고 바우는 너무 생각이 많았다. 숙이는 천진했고 바우는 생각이 욕망보다 앞서는 정말이지 드문 남자애였다. 입 한번 맞춘다 한들 맞추고 나서 잘 다물기만 하면 무슨 문제가 되랴마는 바우는 그런 일이 있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꾸중 듣고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다시 숙이를 볼 수 없는 사태로 번져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될 거, 뽀뽀나 한번 해봤어야 한단 말인가. 바우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는 말했다.

“너, 시집간다.”

- 「이숙이의 연애」 중에서





어느 설문조사 결과를 읽었다. 시간 여행을 하여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가장 해주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짧은 문장 하나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엄마, 결혼하지 마. 비교적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 슬하에 자란 딸들 역시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결혼을 반드시 만류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 결혼하지 말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이후 제 몫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여남 공히 감당해야 할 짐이지만, 여성의 짐은 다소 지리멸렬하고 얼핏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여성의 고통은 흔히 ‘투정’으로 읽힌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이 유아적인 ‘투정’이었다면, 저토록 많은 성인 여성들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좋으니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독자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을까.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 : 김현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대구 출생에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였고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냉소와 분노와 우울을 블랙 유머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을 몸 속에 장착한 그녀가 숨 막히는 고등학교를 용감히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세상에 알려진 지 이제 10년이 넘어간다. 그녀는 단편영화 [셧 앤 시 Shut And See](97년) 감독, 웹진 [네가넷](97년)의 최연소편집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최연소 합격 등의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다. 그래서 한 시사주간지는 성공한 10대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웠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자퇴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텔레비전의 관심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직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

그녀를 주목받게 한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99년)는 십대에 쓴 글들을 엮은 것으로, 글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소위 일류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은 책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은 공교육 공간에서 부대끼는 아이들 중 한 사람으로 아프게 혹은 당차게 살아낸 저자의 경험이 그대로 담겨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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