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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오해
E, Crystal 지음 / 시코(C Co.) / 2020년 4월
평점 :
외국작가인 줄 알았다. 제목은 조금 식상할 정도로 밋밋하지만 혹시 스릴러 소설인가 해서 주목했다.
그리고 더 속마음은 표지와 본문 곳곳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고 포르노그라피 성향의 소설을 점치며 읽기 시작했다.
표지 안쪽 작가 소개를 보지 않고 본문(차례도 없다-날짜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다)부터 읽으며 헷갈리기 시작했다.
등장 인물이 모두 한국인 이름이다. 분위기도 우리 사회 분위기 그대로다.
다시 표지 안쪽을 보고 나서 E, Crystal이 필명임을 알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는 아니지만 제법 속도감과 흡인력이 있어 단숨에 읽힌다.
소설 『비밀과 오해』를 쓴 이수정이 단, 중, 장편 등 모두 20편을 쓴 중진작가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책깨나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수정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게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약혼자의 죽음에 관한 비밀과 오해로 서로 엉망진창으로 얽혀버린 세 자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하나쯤은 알고 있는 자신과 타인의 비밀에 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미리 언급했지만 중간중간에 삽입된 작가가 직접 그린 디지털 삽화도 볼거리다.
『비밀과 오해』는 약혼자의 죽음을 둘러싼 세 자매 이야기로 세주 · 유주 · 비주에게 얽히고설킨 5년 전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다. 첫째 세주의 결혼식을 앞둔 4월 5일 새벽, 세주의 약혼자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며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 현장에서 세 자매는 서로 마주친다. 세주의 약혼자가죽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세 자매는 각자의 비밀은 감춘 채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그 의심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운 나머지 서로에게 아무엇도 묻지 않고 살아가다가 결국 비밀과 오해를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생기는 오해와 비밀은 존재한다. 하지만 세 자매는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미움, 외로움을 자신들의 마음에 품고 있을 뿐 그 누구도 먼저 말하지 못해 더욱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세 자매의 남자를 통해 어쩜 지난 과거인 세주의 약혼자 형석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에서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세 자매의 이야기는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그저 그런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세 자매의 그저 그런 평범한 삶 속에서 어떠한 사건 하나로 이야기의 전개는 더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누군가의 비밀에 관해 질문할 때 우리는 그저 쉽게 질문을 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세 자매 각자의 비밀과 의심이 진실로 밝혀질까 두려운 나머지 서로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게 되면서 더욱 오해가 커진다. 독자들도 역시 세 자매의 상황이였다면 묵인하고 공감했으리라.
중간중간 삽입된 삽화가 더욱 이 비밀스러운 소설의 흥미를 극대화한다. 글을 쓴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읽는 이들에게 다정한 감성 길잡이 역학을 하며, 이 소설에 더욱 집중을 하게 한다. 더불어 세 자매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오해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막바지에 다가갈수록 세 자매가 그토록 밝히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결국 형석의 엄마의 등장으로 밝혀진다. 세 자매가 그저그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형석 엄마의 느닺없는 등장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나한테 제발 이야기를 해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응? 제발." (p.225)이라고 형석 엄마가 내뱉은 그 말 한마디에 그날 밤 그 사건의 장소로 가게 되며, 세 자매는 서로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숨기고 싶어했던 그날 밤의 이야기를 서로가 서로에게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동안 품어왔던 숱한 의구심과 오해에서 해방되는 장면에서 어쩌면 이들이 숨기지 않고 미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작은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소설처럼 우리 일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거나 묵인하는 경우는 발생한다. 이때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숱한 비밀과 오해 때문에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저 그런 소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내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훌륭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은 이 소설을 읽은 보람 중의 하나다.
"일단 비밀이 생기면 그 위에 오해가 쌓이고 결국 상대를 이해하는 게 힘들어져요.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너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유주는 의심했다. 아마도 이전이었으면 어렴풋이 진우를 떠올렸겠지. 그에게 받은 과분한 애정에 감사와 가책을 느끼면서. 그런 이유로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음을 변명하고 안도하며. 그 얼마나 달콤한 자기기만이었는지.
- p.178
‘세주야, 난 가끔 구덩이를 생각해.’ 그 이야기를 할 때 형석의 목소리는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래서 세주는 아마도 익살스러운 이야기일 거로 생각했다.
‘처음엔 그저 장난같이 시작하는 거야. 뭔가를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꼭 잡으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런 기분으로 열심히 구덩이를 파. 그리고 그 입구를 나뭇가지와
잎을 얹어 그럴싸하게 감추는 거야. 그리고 나선 제법 잘 만들었다고 스스로 대견해하지.’
‘그리곤?’ 세주는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었다.
‘그런데 그만 잊고 말아. 내가 만들고도 어디에 만들어놓았는지. 어쩌면 만들었다는 것까지도.’
‘저런.’
‘어느 날 결국, 피융, 그 구덩이에 빠지는 거야. 내가 파놓은 구덩이에.’
‘맙소사.’
어찌 보면 내용의 전개상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형석의 목소리에 배인 자조적인 웃음은 간파하지 못한 채, 그 뒤가 자못 궁금했다.
‘빠지고 나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이를테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거야.
내가 만든 구덩이에 스스로 빠지는 건 너무 어처구니없으니까.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 않아. 훨씬 심각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지.’
그땐 그 구덩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세주는 형석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부부도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 그런 구덩이가 있어. 빠졌는데 나오는 방법을 모르겠어.’
- p.233
"관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특히 관계를 나누는 법에 관해서요.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타인의 비밀은 궁금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알고 싶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비밀인데,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이인데도 묻지 않고, 말하지 않아서 비밀이 되어버린 것들은 어떨까요? 서로를 짐작하는 동안 의심과 오해가 계속 커져간다면요. 일단 비밀이 생기면 그 위에 오해가 쌓이고 결국 상대를 이해하는 게 힘들어져요.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너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올 가을쯤 한 권의 책을 더 펴낼 작가 E, Crystal의 말은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다.
E, Crystal
2010년 단편소설 ‘길 잃은 도로시’를 출간한 이래 스무여 편의 소설을 썼다. 직접 그린 삽화와 함께 젊은 남녀의 현대적 사랑이야기를 다룬 첫 단편 ‘길 잃은 도로시’는 앱스토어 출간과 동시에 북 카테고리 1위를 차지했으며, 전체 카테고리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단숨에 20만 명이 넘는 독자를 확보했다.
이후 발표한 소설들 역시 수차례 앱스토어 북카테고리 1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누적 다운로드 수는 100만을 넘어섰으며, iPad TV 광고영상에 ‘외계 은하 공주’, ‘우슬라의 꿈’두 편이 사용된 바 있다.
현재 출판디자인 전문회사 [C Co.]의 대표이자 소설가, 일러스트레이터, 잡지의 아트디렉터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