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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사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ㅣ 잘난 척 인문학
민병덕 지음 / 노마드 / 2020년 4월
평점 :
이 책을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읽다보니 저자는 어떻게 이 많은 걸 알아냈을까라는 호기심마저 인다.
역사 공부깨나 했다고 자부했지만 이 책을 펴든 순간 내가 배운 역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거나 아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책은 마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알고 싶은 것을 나에게 조목조목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 같다.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중 '여덟 번째' 책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부끄러움을 느낀다.
왜 한 번도 이 시리즈 책을 못 봤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얼핏얼핏 비춰지는 삶을 알았다고 생각했다는 데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살았다고 TV에 비쳐지는 대로 생각했다. 물론 TV 드라마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을 테니 따로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역사 공부는 꽤 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누가 뭘 물어도 어렵지 않게 대답하는 정도는 됐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학교에서 배운 역사)로 우리 나라 역사를 제법 안다고 생각하고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몇 년도에 고려를 세웠고, 조선은 누가 어떻게 세운 정도.
이제 와서 우리 민족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고 있였는지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생각하니 더 부끄럽다.
그만큼 이 책은 꼭 알아야 할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듯 세세하게 디자인되고 제작됐다.
그래서 TV 드라마나 영화보다 재밌다. 지식을 쌓듯 알아가는 재미도 훨씬 크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데 가닥을 잡을 수 있어 값진 독서였다.
이 책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은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 여덟 번째 책이다. 이 책의 키워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옛날에는 어땠을까?’이다.
역사 교과서와 수많은 역사책에서 그 일단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최첨단 사회에서 사는 현대인으로서는 옛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는 것이 쉽지 않다. 옛날에도 법적으로 정해진 휴일이 있었을까? 번듯한 집안의 남자와 혼인을 하는 여자는 오늘날처럼 무리해서 혼수를 마련해야 했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경주 사람들이 쓰던 말이 표준어였겠네? 그럼 오늘날의 경상도 사투리가 표준어였겠구나.
옛날에도 데이트를 했을까? 연애결혼도 가능했을까? 엣날 사람들은 어떤 스포츠를 즐겼을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궁금증을 풀어줄 마땅한 자료를 접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책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을 읽으면 된다. 아주 쉽게 군더더기 없이 쓰여 읽기도 재밌고 편하다. 머리 아프게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누가 옆에서 읽어주는 대로 듣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 한 가지는 꼭 주의해야 한다. 자칫 책을 다 읽고 나면 난 우리 나라 역사를 잘 안다고 누구에게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TV도 없고, SNS는 물론 안 되고, 자동차도 없고, 외국에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게다가 여자들은 집 밖으로 마음대로 나다니지도 못하던 시대. 생각만 해도 어떻게 살았지 싶은 그 시대.
그러나 그때가 언제이든 그곳이 어디이든 인간은 함께 어울려 살면서 소통하고 정을 나누고 지혜와 지식을 모아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들은 촘촘한 씨줄과 날줄이 되어 거대한 역사를 만든다.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은 우리 역사의 주인공, 그러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던 민초들의 생활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고리타분하고 교훈적인 얘기가 아닌, 역사시간에도 알려주지 않았고 역사책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흥미로운 얘기를 담아낸 만큼, 독자들은 딱딱하고 지루한 역사책이 아니라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책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좀 더 낮은 곳에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던 민초들의 희로애락 생활상을 알아가다 보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인간의 존재가치와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깨우치게 된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역사’란 그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암기해야 하는 과목에 불과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바쁜 사회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역사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역사를 등진 대신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역사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앞으로 되풀이될 시간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해 깊이 알게 될수록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지, 앞으로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선명해진다.
이 책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흥미와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로 일관하면서, 차근차근 옛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쪽을 펼치든 역사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현대의 삶 또한 관점과 시각이 좀 다를 뿐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역사의 표면과 이면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의 구성은 소제목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사전'이라고 붙인 의도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수백 개의 소제목은 생략하고, 크게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의식주·풍속
2장 종교·예술·교육
3장 과학·기술·천문·의학
4장 제도·법률
5장 경제생활
6장 정치·군사·외교
7장 궁중 생활
독자들을 위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책 마지막 부분에 '찾아보기'를 두었다.
우리 조상들은 5월에는 농사가 잘되기를, 10월에는 풍년에 감사하고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마을 별로 고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내고 나면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었는데, 여기에는 신이 먹었던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의 기운을 받기 위한 바람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복덕방(福德房)’이었다. 그러므로 복덕방은 마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듯 신성한 장소인 복덕방이 어떻게 해서 부동산 중개업소로 바뀌었을까?
복덕방에는 제사 음식을 받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여러 사람 이 모이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으며, 그런 중에 “누가 집을 내놓았다더라.” “누가 땅을 사고 싶어 한다더라.” 하면서 부동산 거래와 흥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부동산 거래와 흥정이 이루어지면서 복덕방에서 부동산 중개를 하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어, 나중에는 복덕방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동산 중개업소의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부동산 중개업소가 된 복덕방」중에서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捲堂)을 통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다. 권당이란 제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시위하느라고 일제히 관을 물러나 던 일을 말한다. 성균관 유생들뿐 아니라 서당이나 승당, 사학(四學)에서 공부하 던 학생들도 권당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다.
단순히 교실을 비우는 권당 이외에 청맹(靑盲)권당과 호곡(號哭)권당도 있었다. 청맹권당은 수업을 받으면서 눈뜬장님처럼 행동하는 것이고, 호곡권당은 학생들이 궁궐 문 앞에서 함께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하는 것이다.
유생들의 저항이 가장 거셌던 때는 중종 때였다. 개혁의 선봉인 조광조가 훈구파에 의해 쫓겨나자, 성균관 유생들은 상소문을 올려 조광조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중종이 이를 거절하자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이를 말리는 군졸들과 충돌이 일어나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옛날 학생들의 시위」중에서
1940년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창씨개명을 실시했으나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6개월 동안 전체 가구수의 7퍼센트밖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녀의 학교 입학 금지, 직장 취업 불가, 식량 배급 금지, 우편배달 금지 등의 불이익을 주었다.
이 같은 일본의 조치에 우리나라 가구의 80퍼센트가 창씨개명을 했다. 그러나 무조건 일본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바뀐 이름에도 자신의 성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김씨는 ‘김본(金本)’이나 ‘김산(金山)’으로, 이씨는 ‘이가(李家)’로, 청주 한씨는 청주의 옛 이름인 ‘서원(西原)’ 으로 각각 성을 바꾸었다.
일본인들을 희롱하기 위해 성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부모가 물려준 성을 바꾸는 자는 개새끼와 다름없다고 여겨 ‘개새끼’의 한자어인 ‘견자(犬子)’로 바꾸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누군가 그들의 왕을 지칭하는 ‘덴노(てんのう)’를 입 밖에 내면 하던 일도 멈추고 일어서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 발음과 같은 한자를 찾은 것이다. 바로 ‘전농(田農)’이다. 이 사람의 성을 부를 때마다 일본인 관리들은 벌떡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전농’이라고 성을 바꾼 사람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연환경과 관련해서 성을 지었고, ‘전농’이란 성 또한 밭농사를 지어 지은 성이기 때문이다.
속이 까맣게 탔을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통쾌하기 이를 데 없다.
-「일제의 강요로 실시한 창씨개명에 항거하는 방법」중에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60만 명가량인데 이 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귀국하자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이 오랑캐들의 성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면서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귀국한 환향녀들에게 남편들은 이혼을 요구했으나 선조와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환향녀가 이렇게 사회문제가 되자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홍제원의 냇물(오늘날의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환향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핍박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환향녀의 남편들은 왕명 때문에 이혼은 못했지만 첩을 두고 죽을 때까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갖은 핑계를 대서 스스로 나가도록 유도했고,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들은 자결하거나 문중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등 수많은 환향녀들이 죽을 때까지 수모를 겪었다.
-「환향녀가 화냥년으로」중에서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으로는 의료 행정과 의학 교육을 맡아보던 전의감, 서민들을 위한 병원인 동서대비원, 빈민 치료기관인 제생원, 약국인 혜민국이 있었다. 물론 이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의원들은 모두 남자였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때이니만큼 여자가 아플 경우에는 문제가 생겼다. 진맥할 때 환자의 팔목에 헝겊을 걸치거나 가는 실을 묶어 맥의 진동을 느끼는 것으로는 제대로 질병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아예 남자 의원에게 치료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태종은 창고나 궁사에 소속된 어린 여자아이 수십 명을 뽑아 침술과 진맥법을 가르쳐 의녀(醫女)로서 제생원에서 일하게 했다. 그런데 이들을 가르치는 의원들이 남자였기에 양반집 규수들은 아예 참여를 하지 않으니, 주로 중인이나 하층민 출신 중에서 뽑았다.
의녀 외에 또 다른 전문직 여성인 다모(茶母)도 있었다. 다모는 일반 관아에서 차와 술대접 등의 잡일을 맡아 하던 관비인데, 연산군 때부터 지배층들이 혼인을 하면서 사치에 따른 문제점이 일어나자 혼수품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 날로 치면 경찰관의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견(姜?)의 무고로 최영경(崔永慶)을 그의 집 안방에서 체포한 것도 다모였다.
다모는 키가 152센티미터가 넘어야 했고, 막걸리 세 사발을 단숨에 마실 수 있어야 하며, 쌀 닷 말은 번쩍 들어 멜 정도로 힘이 세야 될 수 있었다. 안방에 대한 조사가 주된 임무인 다모는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 등에 소속되었다.
반역과 관련된 정보가 들어오면 다모는 치마 속에다 2척쯤 되는 쇠도리깨와 포승줄을 지니고 가서, 죄가 분명하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고관의 집이라도 도리깨로 들창문을 부수고 들어가 죄인을 묶어 의금부로 압송했다.
다모들이 실수로 도리깨를 잘못 휘둘러 사람을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고 귀양 가는 정도의 가벼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의 전문직 여성인 의녀와 다모」중에서
저자 : 민병덕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이후 경기도 용인시 용동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으며 교감으로 재직했다.
1990년부터 한국사 관련 저술을 기획했으며, 역사 소설가 이재운 작가와 함께 한국사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다. MBC 문화방송과 EBS 교육방송 등에 출연,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요?》(1, 2), 《옛날에도 변호사가 있었나요》, 《이황-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역사 인물 동화 26》, 《이이-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역사 인물 동화 27》, 《박은식-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역사 인물 동화 40》,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오천년 우리 부자》, 《역사인물백과》, 《깨어나라, 고구려》, 《한국의 인물 시리즈》(7종), 《옛날에도 일요일이 있었나요?》, 《김만덕》, 《LTE 한국사》, 《LTE 세계사》, 《반역의 한국사》, 《밥상 위의 한국사》, 《꾸밈의 한국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