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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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소설'이란 말은 들어본 독자라면 누구든 반대 개념의 '유토피아'를 떠올릴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책 『유토피아』가 출간되면서 가상의 유토피아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당시 문학적인 추세가 됐다.

특히 19세기 후반 경제불황이 일어나면서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할 유토피아를 다룬 소설이 많이 쓰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반사회주의 유토피아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다면?’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소설이 바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1895년에 출간된 H. G. 웰스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이 디스토피아 소설 장르의 출발점이다. 이 책에서는 한 캐릭터가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타임머신을 만들어 인류가 완벽한 사회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것은 괴물들로 가득한 끔찍한 사회로 판명된다.

웰스의 책에 영향을 받은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우리(We)』,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조지 오웰의 『1984』 등이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드러낸 소설로 유명세를 탔다.

디스토피아 소설은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두려움, 불의에 맞서 싸우려는 욕망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부패한 정부, 뭔가가 잘못된 세상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도록 만든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이상적인 곳을 뜻한다면 디스토피아는 불쾌하고 좋지 않은, 하지만 현실에 존재할 법한 사회를 뜻한다.

정혁용 작가의 『침입자들』이 디스토피아 소설에 속한다고 독자로서 주장해도 크게 비판받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가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치는 평범한 택배기사다.

활동하기 편한 등산복을 입고, 카트를 끌며, 엘리베이터보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평범한 택배기사.

하지만 그가 얼마나 평범한지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그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사람들은 그저 그가 활동하는 지역의 이름을 따 ‘행운동’이라고 부를 뿐이다. 그게 업계의 관행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줌의 위로, 먼지만 한 한 줌의 위로이다. 그만큼 그는 오랜 시간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부딪히게 마련이고, 각자 비밀을 감춘 행운동 사람들은 도저히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택배기사를 죽이고 싶은 우울증 환자, 보디가드를 달고 다니는 동네 바보, 경제철학 공부를 강요하는 노망난 교수와 미모를 자랑하는 손녀,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바 직원들과 지옥에 빠진 가난한 인생들…….





톨스토이는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의 목소리가 죽어버린 오늘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오래된 낭만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위의 세 가지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바로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간절한 목소리로 답을 갈구하고 있다. 『침입자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행운동’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에 대한 단서도 없다.

버림받은 천사 미하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강남고속터미널에 던져졌을 뿐이다.

그런 그가 택배일을 시작한 이유는 오직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이름 ‘행운동’. 행운동은 그가 맡은 택배 관할 지역이다.





행운동은 평범한 삶을 갈구한다. 일이 있으면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술을 마시고 책을 읽으며 족쇄처럼 따라다니는 과거를 벗어던지는 삶. 그래서 행운동은 자기 주변에 단단한 울타리를 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개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가혹하다. 그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운명은 그의 인생에 한 걸음 더 다가오고, 눈 감으면 눈 감을수록 더욱 환하게 나타난다. 그것도 매우 기이한 모습으로. 매일 같은 벤치에 앉아서 택배기사를 기다렸다가 담배 한 개비를 빼앗아가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지껄이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택배기사를 끌고 가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바 직원,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까지.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한 행운동 사람들은 도저히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래서 읽을수록 궁금해진다. 행운동의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그는 그의 일상에 무례하게 침입하는 사람들을 막아내지 못하는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행운동에게 허락되지 않은 운명은 무엇인가? 끝내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삶은 언제나 가혹하다. 거짓과 배신이 난무하면서 서로의 가슴을 상처를 낸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변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건 뜨거운 심장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혁용 소설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건조하다. 그의 소설 속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결핍되고, 뒤틀리고,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리고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솔직하게 다가와서 독자의 얼굴이 빨개질 정도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건 주인공이다.

어둠이 클수록 빛이 환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주인공이 던지는 짧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읽는 이의 정신을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을 덮은 독자들은 알 수 있듯이 건조한 결핍되고, 뒤틀리고,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이를 채우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소통은 활발하지만 영혼은 고립된 현대인들이 이 소설을 꼭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을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믿는다.





물론 독자들이 그런 거창한 주제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책을 볼 의무는 없다.

그저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대가는 지불할 생각이에요. 한 번 만날 때마다 백만 원. 결정은 제 얘기를 듣고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구미가 당겼다. 돈은 날로 먹을수록 좋으니까. 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피땀을 흘려서 번다? 피땀이 아깝다.

노동의 가치? 그런 건 브런치나 먹으며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들이나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다.

되도록 날로 먹고 싶은데,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뿐이다. 안타깝게도 흙을 파먹고 사는 재주도 없고.

“그러니까 당신 얘기는, 커피나 마시면서 얘기나 들어주면 백만 원을 주겠다는 뜻입니까? 듣다가 심심하면 당신 모자나 들어주고?”

“모자는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맞아요.”

여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 길거리에 돈을 뿌리는 건 심심해서 나한테 뿌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이런 걸 횡재라 한다. 그러니 당장 대답할 수밖에.

“거절하겠습니다.”

“왜죠?”

“공짜는 믿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은 탓이겠죠.”

- pp.114-115





“어쩌면 한 사람이라도 기사님처럼 친절한 사람을 만났다면 좀 더 용기를 내서 버텼을지도 몰라요.”

씁쓸한 얼굴로 마스크가 말했다.

“남자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이 나라에서 여자로 사는 건 지뢰밭을 건너는 거예요. 남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걷거나 뛸 때 말이에요.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몇 번씩 지뢰가 터지고 나아가 목숨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친절한 남자라도 쉽게 믿을 수가 없게 돼요.”

마스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된다는 뜻이에요?”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해될 리가 없죠. 밤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고, 뒷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도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헤어진 남자친구의 성난 전화도 무서워해본 적 없고, 직장이나 모르는 남자의 성희롱을 견딘 적도 없고, 남자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힘들여 쟁취한 적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관습과 싸워 얻어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살아온 이의 공포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죠. 전 누군가를 짐작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요.”

- pp.179-180





“말귀를 좀 알아듣는 오빠일 거라 생각했는데 안 되겠네. 일단 가볍게 마사지 좀 받고 시작할래요? 김 군아!”

망치가 뒤로 빠지자 투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나머지 떡대들 쪽을 보았다. 한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이 녀석이 김 군이었다. 궁금증은 풀렸다.

“김 군아, 이 오빠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마사지 좀 하고 시작하자.”

투피스의 말이 떨어지자 떡대가 나의 몸통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맞는 건지 해머로 맞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왜 그랬어요?”

고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투피스가 다시 물었다. 눈물이 핑 돌고 척추부터 머릿속까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요?”

투피스가 같은 말을 또 물었다.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쇼. 그러면 없는 사실도 다 말해줄 테니까.”

가까스로 힘을 짜내 투피스를 보며 말했다.

“뭐죠?”

투피스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어와 목적어.”

- pp.258-259





마지막으로 이 책의 차례와 간단한 작가 소개를 덧붙인다.

1. 바닥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지

2. 부탁을 하면 부탁을 들어주고, 명령을 하면 반항을 하고

3. 돌부처와 코알라의 시간

4.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5.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

6. 오늘도 파도는 높이 일렁인다

7. 난장판에 울리는 축배의 노래(1)

8. 아담하고 조용하게 누가 죽어나가진 않고요

9. 나비를 잡으러 다녔나요

10. 울음이 타는 강가에서

11. I might be crying

12. 진리와 진실은 다르다

13. 우리 사이에는 은혜도 빚도 없다

14. 이건 협박이 아니야

15. 오늘 당신의 나의 과거를 원하니

16. 호밀밭의 파수꾼

17. 게이를 마시는 것도 아닌데

18. 난장판에 울리는 축배의 노래(2)

19. 지옥에 빠진 인간들

정혁용

2009년 계간 [미스터리] 겨울호, 「죽는 자를 위한 기도」로 등단했다. [한겨레] HOOK에 칼럼과 장편, 『신들은 목마르다』를 연재했다. 어쩌다 보니, 2011년 문학동네 작가상 최종심, 2019년 세계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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