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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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소설가 이승우와 첫 인연을 맺게 해준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 중 한 부분이다.

제목에서 말한 바로는 사랑 자체를 한 생명체로 본 것 같다. 작품은 추천인의 신뢰(꽤 유명한 작가인데 나와 친분이 있는 분으로 이승우의 작품을 읽을 만하다고 소개했다)를 깔고 읽기 시작한 소설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언젠가는 빠져들어야 함이 숙명인 것처럼 다가오는 제목 때문에 행복, 아픔과 상처, 고통, 그럼에도 다시 사랑이라는 정해진 순리를 밟아가는 이야기인 줄 알고 펼쳐들었다. 첫 페이지를 읽은 느낌은 전혀 달라 당황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은 글들이 이어졌다. 다시 천천히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내를 갖고 읽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의미를 담은 제목의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들을 탐사하며 그것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듯 써내려간 작품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하고 엇갈리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어쩌면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근원과 속성, 그리고 그 위대한 위력을 성찰한다.





소설은 읽기 쉽게 써야 한다는 내 관념을 깨뜨린 작가 이승우. 그를 두고 누군가는 작가와 독자와의 신뢰를 말한다.

책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표지에 현혹되지 않아도 저자 이름만으로 맺어지는 믿음 같은 것. 또 누군가는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고 했다.

유려하게 반복되며 힘들이지 않게 긴장되는 그의 문장들을 깜빡 놓칠까 불안해서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이라면 저자의 마음은 한 키 정도 느슨해질 법도 한데, 그의 글쓰기는 유독 더 냉엄하고 외려 더 혹독하다.

너무 어렵게 쓴다는 생각에도 읽고 나면 빠져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 이승우 작가의 냉엄함과 혹독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연유로 그에게 달라붙어 그를 지독하게 ‘쓰는 자’로 만들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이미 그의 많은 소설과 글 속에 있다.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동시에 ‘쓰는 자’의 태도도 읽는다.

쓰는 자의 굳은 마음, 작가로서 지켜야 할 윤리 같은 걸 소설 안에서 읽는다.

즉, 그는 작가로서 여전히 작가의 존재증명을 위해 끊임없이 쓰는 셈이다.

스물 셋에 등단해 40여 년을 한 가지 일에 매달렸던, 즉 ‘쓰는 자’의 삶을 택했던 그가 그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그리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놓았다.

이 책은 에세이로 소설보다 오히려 쉽게 읽혀 반갑다. 그리고 소설가 이승우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표현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무조건적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낸 표현, 그것이 손을 뻗는 동작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 (p. 70)

더 이상 손쓸 수 없어 진통제가 필요치 않은 환자에게 최선의 처방이란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료인들은 할 일이 없다. 다만 입을 다문 채 손을 잡을 뿐. 신음하는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으면 고통은 서서히 물러갔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경험담에서 비롯한 이 에피소드는 죽어가는 어느 한 환자에게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간호사와 손을 맞잡음과 동시에 고통은 사라지고 평온을 되찾아가는 환자를 목격한 이야기이다.

이승우는 이 이야기를 소설쓰기와 연관 짓는다.

‘고통은 살아 있음의 유일한 방증’이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오만’이 될 수 있다는 데에 견주어 소설쓰기 또한 아픔을 표현해내는 것이고, 그러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견해로 나아간다.

이승우에게 소설쓰기란 그런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독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행위이자, 의도와 목적 없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손을 잡는 것.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의 간절함을 피하지 못해 그 손을 잡는 문학, 자신은 그런 문학이 쓰이며 읽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문장은, 아무리 잘 쓴 문장도,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그것이 문장의 속성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참여해서 하는 일종의 번역 작업이다.” ―(p. 54)

창작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평범한 질문에 이승우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로 갈음한다.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

이 생각 건너편에는 작가가 신비스러운 어떤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고 작가는 단지 초자연적인 존재의 언어를 받아 적는 필기구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문학을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 허용된 특별한 재능으로 판단하는 것.

물론 이승우 자신도 창작자로서 글 쓸 때의 창작의 영감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경험이 신비스러운 초자연적인 순간이 아닌, 글을 계속 쓰게 하는, 소설의 이야기가 계속 뻗어가게 하는 추동의 역할로써의 순간이라고 못 박는다. 행운이자 은혜라고 불리는 영감이건만, 글 쓰는 자에게 이 영감은 철저한 글쓰기의 에너지이자 동력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된다고 경계한다.

또한 작가에게 영감은 누군가로부터 어딘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창작자 내부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며 그 일으킴을 이해할 때 작가는 필기구를 멈추고 창작자의 이름을 얻게 된다고 조언한다.





“나는 타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타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p. 109)

남의 집 벽장에 1년 동안 숨어산 어느 여자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작가 에릭 파이의 작품 《나가사키》를 소개하며 이승우는 ‘나’를 결합하는 조건들, ‘나’를 만드는 조각들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우리들에게 전한다.

집 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어 은밀한 시간들을 훔친 여자보다 낯선 존재를 모르고 오랜 시간 동안 평범한 삶을 산 남자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주위에 혹은 집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비슷한 말로 돌려 말하면, 사람을 이루는 것은 사람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하고 있는 당신의 생각은 당신만의 오롯한 생각일까? 또 우리 안에 우리가 입주를 허락한 생각이나 사람들만 있는 것일까? 유익하거나 필요한 생각이나 사람만 들어와 살고 있는 걸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아는 생각, 모르는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 우리 내부에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안의 타인. 그 타인들이 우리의 됨됨이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늘 우리는 누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정하는지 살피고 탐구해야 한다. 단순히 요약컨대, 자기를 들여다보는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유혹과 위협 앞에서 때론 긴장하고 때로는 초연하게 써온 것이, 그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문학이었다.”

―(p. 218)

이승우는 말한다. 중요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을 쓴다고. 중요한 것은 나 아닌 무언가를 대표하려는 유혹에 빠뜨린다.

물론 작가의 사회적인 역할 수행에 대한 요구는 때론 정당하고 윤리적이다.

다만, 발언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무엇의 중요함이 도리어 훼손되기 일쑤다. 이승우는 쓰는 자의 태도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조건들을 열거한다.

작가는 중요한가를 묻지 말고 절실한가를 물어야 되며 내가 관여되지 않은 절실함들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절실한 것만 쓰려고 할 때 나는 나 아닌 누구, 혹은 무엇을 대표하려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작가는 휘둘리지 않게 된다.

이승우는 자기문학을 하려고 하는 창작자들에게 세 가지를 주문한다. 욕망의 억제, 세상과의 거리두기, 초연함.

그는 40여 년 동안 소설을 쓰면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지를 기준 삼아 글을 써왔다고 고백한다.

절실한 것들을 보여주려고 했고 절실하게 본 것들을 소설로 말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오랜 시간 층층이 모여 나의 문학이 된 것이라고 말이다.





표현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무조건적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낸 표현, 그것이 손을 뻗는 동작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 (p.70)

의미는 읽는 순간(에야) 발생하는 일회적 사건이다. 이 불완전과 불충분을 보완하려면 더 많은 단어와 문장을 더해야 하고,

설령 그런다고 해도 완전한 재현에는 성공할 수 없다. 사물의 표현이 그럴진대 변화무쌍하고 신묘불측한 인간의 감정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 (p.54)





모든 문장은, 아무리 잘 쓴 문장도,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 그것이 문장의 속성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참여해서 하는 일종의 번역 작업이다.

- (p. 54)

나는 타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를 이루고 있는 타인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p.109)

유혹과 위협 앞에서 때론 긴장하고 때로는 초연하게 써온 것이, 그처럼 아슬아슬한 것이 문학이었다.

- (p. 218)

어쨌든 소설가의 삶, 그 속에 녹아든 애환과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아 호기심으로 이 책을 펼쳤다면 소설가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철학을 담은 책으로 느껴졌다. 독자들은 몰입하여 사색하기를 바라는 분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권하고 싶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에서 진행하는

체험단,리뷰단에서 제공 받아 작성한 솔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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