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그 사람 -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장적폐 지음 / 이음스토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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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관심이 갔다.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이름 '적폐'를 필명으로 내세울 정도로 강렬한 작가가 있었는가?책에 관심을 갖자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매우 평범한 신파극이나 로맨스 소설쯤으로 생각될 정도로 단순하다.그러나 표지에 흰색으로 보일락말락하게 적어놓은 명조체의 글들 사이로 정치색 짙은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대통령' '북' '평화' '전쟁' 등의 낱말과 '조용필'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다큐멘터리인가?궁금증은 책을 펼치며 쉽게 풀렸다.'책을 열며' 제하의 작가의 글에서 '배제리스트'(작가는 '블랙리스트'를 대신해 이렇게 적시했다)에 관련된 글이구나를 알 수 있다. 책의 분위기나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대체 무슨 책이냐?’라고 물으면 ‘희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기본적인 책의 틀은 ‘희곡’이지만,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은 희곡의 앞뒤 그리고 사이사이에 나오는 작가의 자기 고백이다.

“사실, 형식은 희곡이지만 정확하게는 희곡으로 가장한 내 이야기, 희곡으로 가장한 부끄러운 기도문 정도일 것이다.”(56P)



이 책에 대한 설명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설명이 합쳐지면 이 책 한 권이 된다.

첫째, 가상 역사 희곡이다.

희곡의 배경은 2022년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희곡 속 시간은 가상 역사이다. 광화문 ‘촛불 역사’와 ‘대통령 탄핵’은 없었다. 2017, 2018년, 우리 대통령의 들고남이 현재와 다르고, 2018년 봄, 보수 정권의 대통령이 취임했다.

당연히 2018 평창올림픽과 같은 평화로의 국면전환도 없었다.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실험은 계속되고,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드디어 미국 코앞까지 도달했다.

한반도가 전쟁 바로 앞까지 갔다. 일촉즉발, 위기의 한반도…. 희곡 속 대통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그의 문제 해결방식은 문학적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2050년 미래에서 편지가 하나 날아들며, 연극이 시작된다.


둘째, 조용필 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희곡은 조용필로 시작해서 조용필로 끝난다.

우선 부제로 붙은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조용필 10집(1989년) part 2에 실린 조용필의 노래 제목이다. 조용필에 대한 존경을 담아 만든 오마주이다.

“2000년 전후 언제쯤이었던 것 같다. 조용필을 글감으로 뭔가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그 많은 시간을 조용필과 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23P)

이런 연유로 이 희곡의 배경음악은 모두 조용필의 노래다. “이 희곡의 절반은 조용필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썼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희곡은 불가능하고, 밋밋하기 이를 데 없는 절대 빈곤이 되었을 것이다.”(51P)

희곡의 부제로 쓰인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에서부터 〈서울 1987년〉, 〈상처〉, 〈애상〉, 〈정의 마음〉, 〈바람이 전하는 말〉, 〈그 또한 내 삶인데〉 등 희곡 본문에 직접 등장하는 곡이 13곡, 〈킬리만자로의 표범〉, 〈Q〉, 〈생명〉 등 길게 짧게, 여러 방식으로 인용된 곡이 12곡, 모두 25곡의 조용필 노래가 글감으로 쓰였다.

희곡의 처음 시작은 〈상처〉이고, 희곡이 절정에 이를 즈음엔 〈서울 1987년〉과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이 울려나온다.

“조용필이 없었으면 이 희곡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열두 살 어린이 때부터 좋아했던 나의 가수, 조용필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고 싶었다.”(37P)



셋째, 일기 혹은 기도문이다.

작가는 책날개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오래 전 사회학과 예술경영을 공부했고, 지금은 북한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북한문학 중에서 특별히 소설 쪽에 관심이 많다. 대학졸업 후 한 직장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성실하게 일했다. 장삼이사,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2015년, 저 위쪽에서 시작된 배제리스트가 내려와 닿은 맨 끝단, 거기에 내가 있었다. 내 인생계획에는 없던 기이한 만남. 배제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적폐라고 불렀다. 그래서 필명을 적폐로 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적폐(積弊)로 하면 사람들이 놀랄까봐 한자(漢字)를 바꿨다. 붉을 적(赤), 비단 폐(幣), 붉은 비단이다.”

작가의 이야기대로, 2015년 배제리스트 사건 당시, 배제리스트가 내려와 닿은 맨 끝단, 그곳에 그가 있었다.

배제리스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며, 2016년, 2017년, 2018년, 배제리스트로 대한민국이 들썩일 때, 저 위쪽 명령을 지시한 사람들이 재판정을 오가고 감옥으로 갈 때, 관련 기관들도 큰 몸살을 앓았다.

배제리스트 실행기관, 실행자로서, 모두가 죄인이었던 시절, 작가에게 글쓰기는 도피처, 피난처였다고 한다.(56P)

이 책은 그 기간 동안의 기도문, 참회문이다.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빚을 졌다. … 남은 날들, 빚진 얼굴들에게 이 빚을 갚으며 살아가겠다.”(278P)고 한다.


넷째, 시선, 사회 평론이다.

희곡 대사에 나오는 70여 개 단어에 각주가 달려 있다. 그런데 그 각주는 희곡 〈사랑했던 그 사람〉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 책의 각주는 각주 자체가 또 다른 본문처럼 보이니, 각주를 빼고 읽으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기도 좀 멋쩍은 형국이다. …

희곡의 빈약함을 메우기 위해서 그랬고, 희곡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그랬다.”(54P)

희곡의 각주들은 ‘BTOB(비투비)’, ‘장기려’, ‘윤동주’와 같은 이름들로부터 〈간양록〉, 〈상처〉,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그 또한 내 삶인데〉 등 조용필의 여러 노래들로까지 다채롭게 이어진다.

이들 각주 에세이는 사회학과 북한문학 전공자인 필자가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 사회 평론이다.

보통 시민의 순박한 바람부터 전공자의 깊이 있는 고민까지 두루 담고 있다.

대학시절, 조용필 〈Q〉에 나오는 대사처럼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도 가보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버렸다”라고 말할 만한 그런 연애를 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나의 첫사랑은 너무도 건전했고(?) 손목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지나갔다.

(중략) 돌아보면, 누군가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버리는 것이 그렇게 좋은 사랑은 아니었을 텐데….

스무 살 그 시절에는, 행여 그럴지라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디엔가 있을, 운명 같은, 우주 같은 사랑을 바랐던 것 같다.

〈Q〉를 들으며 드는 마지막 생각. 첫사랑이든 마지막 사랑이든 사랑을 쿨하게 보내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사랑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못 잊고, 아파하며 마음 쓰였던 시간들. 그때는 아팠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보낸 시간들,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며 조금은 더 성숙하게 되었고, 세상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다. (138P)



세상을 보는 입장과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친소(親疏)가 다를 수 있다. 국가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다. 꺼삐딴 리, 염상구, 염상진, 이명준…. 친소(親疏)가 낳은 다양한 삶의 유형들. 문제는 그 누군가의 친소(親疏) 팻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난과 조롱, 심지어는 타격의 대상이 된다. 수렴과 타협은 없다. 이상과 도덕이 높을수록 가차없다. 수렴은 패배이고 타협은 변절이다. 토착○○, 빨○○라는 속된 말들이 난무한다. 한국사회에 구조화된 비난과 조롱은 견고한 진영을 갖추고 서로를 향해 인생을 걸고 칼을 겨눈다. 서로를 향한 미움과 증오, 조롱은 끝이 없다.

(중략) 탁월한 국력, 높은 문화, 모두가 평화롭게 넘나드는 나라, 무엇보다 누구와 편먹지 않아도 되는 나라다.

우리 안 ‘꺼삐딴 리’는 더 이상 없고, ‘이명준’은 평화롭다. 그날에는 성조기든 일장기든 오성홍기든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생활의 악센트, 취향이 될 것이다.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일제 35년을 넘어, 동북아가 평화와 번영으로 내딛게 될 어느 날, 사랑하는 우리 딸들이 이룰 세계이다.” (241P)


〈사랑했던 그 사람〉은 희곡은 희곡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각주는 각주대로 자기 이야기를 해나가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큰 그림이 된다. 각자 취향에 따라, 희곡만 먼저 읽어도 좋고, 아니면 각주만 끝까지 읽어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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