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고 매혹적인 고대 이집트 - 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선정한 유물로 읽는 문명 이야기 손바닥 박물관 3
캠벨 프라이스 지음, 김지선 옮김 / 성안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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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손바닥 박물관> 시리즈가 나왔다.

"품위있고 매혹적인"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고대 이집트' 편이다.


리버풀 대학교 이집트학 박사 학위를 받고 맨체스터박물관의 이집트와 

수단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캠벨 프라이스의 책을 

<문명의 보물 고대 그리스>, <위대하고 찬란한 고대 로마>, 

<대담하고 역동적인 바이킹>으로 <손바닥 박물관> 시리즈를 모두를 번역한

김지선 번역가가 작업했다.

그래서 인지 이 시리즈 전반의 글에 익숙해졌고 번역이 매끄럽다고 느껴진다.


고대 이집트 예술에서는 '품위'라는 개념이 중요했다고 한다.

엄청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장인들이 '품위'라는 가치를 작품 속에 담아내기위해

동일한 시각적 언어에 의지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즉, 이집트 초기에 규칙들을 만들고, 

이후 3000년간은 수많은 모티프의 표현방식이 고착되었으며

더 이전의 작품을 복제하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특징을 가진 이집트 예술은

나중에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콘셉트와 심상의 지속성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집트'를 머리속에 떠올리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금, 은, 보석들을 아낌없이 사용한 아름다운 장신구,

로마신화를 바탕으로 동물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신비로운 조각상,

드넓은 사막 위에 우뚝 솟은 피라미드와 피라미드를 장식한 스핑크스,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된 매혹적인 투구,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이라 등등


 

이 책은 고대 이집트 유물을 연대에 따라 무려 일곱 장으로 나누었다.

이집트의 가정에서 이용한 물품이나 장식물, 국가 및 파라오에 관계된 유물,

종교적 실천과 관련된 유물, 죽음 및 사후에 관련된 유물로 테마를 정해

200점에 이르는 유물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특히 기록(상형문자!)과 유물이 함께 남아서 이집트의 생활을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상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역사를 좋아하고 고고학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집트'가 

늘 탐구하고 싶고 알아가고 싶은 존재가 되게 만드는 것 같다.

 



<손바닥 박물관>은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지 못하는 약점을

'손바닥'의 크기와 유물의 크기를 비교하는 그림을 매 유물에 첨부함으로써 극복하고,

박물관에서 큐레이터의 설명(혹은 오디오 가이드) 없이도 수록된 모든 유물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이름, 출처, 크기, 시대, 현 소장지 등)와 함께

그 유물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지식까지 곁들여

집 안에서 세계 곳곳에 수록된 멋진 유물들을 자세히, 편하게, 언제나 볼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의 벽화나 파피루스 같은 문서에서 나오는 상형문자들이 곳곳에 새겨진 

누가 보아도 '이집트'의 인장이 강하게 박힌 유물들이 물론 눈길을 끌지만,

개인적으로 책의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신기함을 가지고 더 오래도록 보았던 부분은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현대에도 꽤 훌륭한 보존 상태를 보이는

천과 종이로 된 유물들이었다.


엄청나게 더운 이집트의 기후와, 까마득한 시간을 

낡고 삭기 쉬운 연약한 조직들이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집트인들의 놀라운 '매장' 기술 덕분이다.

시신의 부패를 최소화하는 미이라를 만들어 낸 그들의 기술과 지식의 배경에는

탄산나트륨과 염화나트륨이 자연적으로 이루는 혼합물인 천연 탄산소다라는 물질의

덕이 크고, 이집트 인들이 3000여년 전에 그런 물질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파라오의 시신을 방부처리할 때, 그 과정에서 나온 모든 폐기물을 보존하게 했던

이집트의 문화와 예술의 규칙과 지속성의 추구 때문이었다.



무덤->미이라->이집트->저주(!)로 이어지는 '도굴'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이집트의 장례 '산업'은 사실 가장 부유한 이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희생된 노예 및 하층민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박물관의 소장품은 이집트 사회의 죽은자와 가장 부유했던 자들에

크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그것으로 이집트를 과잉대표하고 있다고 

학문적 지식과 연구에 바탕을 둔 통찰을 보여준다.


어마어마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도굴꾼(특히 유럽인들-ㅁ-+ 진짜 남의 나라를 탈탈 

털어먹으면서 자기네 나라의 박물관을 꽉꽉 채웠던 몰염치의 사람들이

식민주의 시대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버티고 있다!)

의 약탈과 유물의 파괴에서도, 아이러니하게 박물관에 보존되어 살아남은 유물은

이집트 사람들이 내세를 생각하며 현실을 견디는 의미에서 시작된 피라미드가

페르시아나 로마, 그리스 인들 같은 외부 세력들의 이집트 침입에 맞서

이집트의 민족주의를 보여주는 공동의 상징으로 남게 된 현대의 해석을 만나며

한 왕조, 거대하고 매혹적인 문명이 끝을 맞이하게 되는 아스라함을 낳는다.



집에서 탐험하는 손바닥 박물관 시리즈.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어 익숙한 유물부터, 우리에게 아직 덜 알려진 유물을 만나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상상하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룰 문명은 어디가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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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법칙 - 십 대와 싸우지 않고 소통하는 기
손병일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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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와 싸우지 않고 소통하는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감정의 법칙>은

중2병, 사춘기, 반항, 학교폭력 등등 말만 들어도 무서운 단어들을 피하고만 싶은

어른들이 (특히 부모님)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자녀교육의 정답은 없고, 대개의 경우 부모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대를 사용해서

자신의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에너지와 시간, 노력이 올바른 방향과 방식이나 적절한 때를 갖춰 

아이에게 닿지 않는다면 부모는 부모대로 힘들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멀어져간다.


<감정의 법칙>은 부모들을 다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부모에게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고 싶고, 가능한 자기 아이가 상처받지 않길 원하는 

부모들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당신이 뭘 알아?" 라고 하기엔 저자의 공력이 만만치 않다.

저자는 그 무섭다는 중학생과 30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중학교 교사이다.

저자도 아들과 딸을 키우며 생각과 이론, (남의 아이에겐 먹혔던!) 경험대로

적용한다고 해도 결과가 예상과 영 다르게 나오는 경험을 실제로 한 부모이기도 하다.


체육 교사이며 학생들에게나 학생들끼리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최전선에 있는

생활지도부서에 오래도록 근무한 저자는 다양한 아이들의 어려움과 갈등을 만났고

갈등/문제점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것이 결국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감정'의 문제와 꼭 캐치해야 하는 '메세지'를 읽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아이의 문제행동을 다룬 프로그램에서

아이의 요구, 감정을 '어른'의 평가와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조절/해결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부모가 섣불리 개입/간섭하면

혹은 자신의 아이에게 '흠'이 생길 새라 재빠른 해결만을 원한다면

아이의 억눌리고 잘못 표현된 감정과 마음은 동일한 문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제거되지 못한 위험요소로 아이와 함께 자란다는 것을 느꼈는데,

<감정의 법칙>을 보아도 그런 경우들이 많이 나온다.


저자는 청소년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갈등 및 치유에 관련된 도서를 충분히 읽고

지식적인 정보를 (출처와 함께) 제공하며

부모의 지식이나 가르침, 자녀교육의 방식이 어떤 모양과 색깔, 온도를 가져야 할 지

읽기만 해도 마음이 갑갑해지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며 알려준다.




사랑스러웠던 아이의 '변신'으로 마음 고생하는 부모들에 대한 위로도 있다.

그러나 그저 "힘들죠, 힘내요" 같이 얄팍하고 하나마나한 위로가 아니라

부모 본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왜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지

설득적으로 예를 들어 알려주어, "나 때문에" 라는 죄책감에 포기하지 말도록

기운을 북돋아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십대.

하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아이들로 인해 자녀교육에 고민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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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이 5년 후 나에게: Q&A a day 빨강머리앤 Q&A a day
더모던 편집부 엮음 / 더모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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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입 안에서 저 단어를 굴려보기만 해도, 주제곡이 자연스럽게 재생되고

<빨강머리 앤>의 원작 소설의 글씨보다 하얀 자작나무 숲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의

그 '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면, 아마 당신도 '그' 빨강머리 앤의 팬일 것이다.


TV 애니메이션으로 앤, 알프스의 하이디, 우유를 배달하던 네로를 만나던 세대가 자라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채워줬던 캐릭터들을 기꺼이 사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캐릭터'들을 내세운 기획형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QnA a day' 시리즈는 동일한 질문을 3년, 5년, 10년 동안 똑같이 물어보고

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이 달라지는 것을 기록하며 볼 수 있는 컨셉의 책이다.


이 컨셉이 빨강머리 앤과 만나서 <빨강 머리 앤이 n년 후 나에게> 시리즈를 세상에 내놨다.

3년, 5년, 10년으로. 본인의 취향과 결심(!)에 맞추어 고를 수 있게 한 출판사 :)


덕후의 마음을 알아도 너무 잘 안다. ^^ (덕후의 얄팍한 지갑 사정도 잘 알아주었으면;;;)

3년을 사면서도 5년이 궁금하고, 10년은 엄두에 나지 않지만 구성이 궁금한 다음 독자를 위해

(내가 다른 분의 리뷰에서 도움을 얻었듯)  몇 페이지 공개해본다.


<빨강 머리 앤이 n년 후 나에게> 시리즈는 매력부자 앤 3가지 버전 표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시진 않으셔도 될 것 같다.

5년 후의 안쪽에는 차마 놓기 너무 아쉬웠던 '3년 후' 표지의 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1월의 상쾌한 시작을 알리는 에너지 넘치는 앤의 모습.

아마, '5년 후' 앤의 표지를 아쉬움 속에 내려놓으신 분이라면 (3년 후와 마찬가지로)

첫 장의 앤의 모습으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들 것 같다.



매일매일, 언뜻 보면 사소하지만 바로 답하기에는 꽤 생각을 요구하는 앤의 질문들이

앤의 다양한 일러스트와 함께 실려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3년 후는 쓰는 칸이 3개, 5년 후는 5개, 10년 후는 10개다.


매년, 동일한 질문을 받고 그에 답하는 내가 달라짐 혹은 비슷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며, 내년의 내 모습과 과거의 내 모습,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는

재미있는 발상이 QnA a day 시리즈가 매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일정이나 계획, 감정을 적는 1번 일기장이 있다면

페이지를 펼칠 때 무슨 질문이 나올지 궁금한 2번 일기장으로 사용하기에도 충분히 설렌다.


일주일 전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가물가물한 내가

1년 전 나에게 던져진 질문을 기억할리가 없다. ㅎㅎㅎㅎ


친구를 묻는 질문에 안부를 묻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말, 세상은 반짝거리며 낭만적인 것들이 널려 있는데 그걸 너무 모르고 산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이 질문을 보고 웃음이 났다.

가장 최근에 받은 전화는 광고성 전화였다.

앞으로 5년 뒤엔, 과연 '전화'라는 것을 받게 될까?

'10년 후' 시리즈를 선택하신 분들은 철지난 질문들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받기 전에 두근거리고, 받고 나면 만족하는 <빨강 머리 앤>이 실린 모든 책들 중에서

앤과 함께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기록하는 '성장 일기'로 삼기에 정말 좋은 책이다.


3년 후나 5년 후의 속지는 똑같은 것 같다.

10년 후는 어떨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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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내 책 쓰기 어때요? - 하루 한 장 글쓰기로 베스트셀러까지
송숙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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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SNS로 여기저기 생각나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기록과 끄적임을 남기는 것은 일상적이지만

막상, 내 글을 묶어서 책으로 내려고 생각하면 손이 오그라든다.

이런 책을 과연 누가 돈을 주고 사서 볼까? -혹은 굳이 내 sns까지 와서 볼까?- 싶은 마음과

내가 하는 경험, 생각, 느낌이 그다지 특별하진 않은 것 같은 작아지는 마음이 만나면

"그래. 내가 무슨 책이라고!" 하고 주저앉게 되고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1호 글쓰기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

<오늘부터 내 책쓰기 어때요?>는 1일 1페이지로 100일 동안 

송숙희 저자의 글쓰기 과제를 성실하게 해낸다면, 그리고 자기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평범하고 특색없어 보이는 내 이야기도 참 예쁘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책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작가니까,

나의 이야기들을 잘 골라내고 다듬어서 보기 좋게 보배롭게 꿰매는 방법을 

총 5장에 걸쳐 하나씩 설명하고 실천해 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오늘부터 내 책 쓰기 어때요?>는 취미로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도 

글쓰기에 플랫폼을 연결시켜 세상이 원하고, 심지어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도,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의 삶과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내 인생의 이야기를 남기고픈 사람도

자신들의 목적에 맞춘 글쓰기 비법을 배워볼 수 있도록 

공통되며 핵심적인 글쓰기 비법과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비법같은 구체적 요소를

비율좋게 포함해서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충분히 잘 활용될 수 있는 책이다.


아직 나의 글을 세상에 보이기에 부끄러움과 주저함이 앞선다면,

부록 1일 1페이지 100일 글쓰기 워크북을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처럼 써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추천사는 아니겠지만

표지 뒷면에 있는 유명인들의 '글쓰기'에 대한 말이 마음에 남는다.


"모두가 셰익스피어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좋은 걸 전하고 싶다는 마음.

 그것으로 충분하다." - 워런 버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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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
존 란체스터 지음, 서현정 옮김 / 서울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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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체가 이 책의 이야기 전부를 담은 <더 월>은 

(아마도 책이 안 팔리는 요즘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야 하는 필요가 다분히 느껴지는)

띠지의 2019 부커상 후보작이라는 말 없이도 내용으로 충분히 승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부커상과 <파이낸셜타임즈>, <이브닝스탠다드>가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벽'이라는 단어로 연상될 수 있는 스토리를 충실히 따르지만 

책 속의 인물들에게 마음을 줄 수 밖에 없는 몰입도와 호소력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이 책의 참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더 월>의 저자는 존 란체스터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다채로움'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영국의 언론인이고,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라,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962년생임을 감안해 보았을 때, 영국의 기운이 아직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시기에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의 경험과 영국에 다시 들어와 교육받고 런던에서 살고 있는 현재가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더 월>의 배경은 기후 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고, 정치적으로 분열하여 황폐화된 세계다.

한 섬나라에 모든 해안선을 둘러싸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다.

이 '벽'이 주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외부에서 안락한 '섬'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침입자를 경계하는 곳이기도 하고

외부와 내부를 갈라 차이와 차별을 낳는 물리적 '벽', '한계'이기도 하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이 2년 동안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전'과 '위험'이기도 하다.


책의 주인공은 이 벽 위에 새로 발령난 신입 경계병 조셉 카바나이다.

그는 앞으로 2년 동안 벽 위에서 버티며 침입자로부터 벽을 사수해야 한다.

운이 좋아 별탈 없이 (즉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죽거나 실종되거나, 침입을 훌륭히 막는다면)

2년을 보낸다면 '벽과 관련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누군가는 생사를 거는 2년이, 그 기간을 이미 보내버린 사람에게는 '관련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내부인을 지켜주는 '벽'이 그 내부인들 사이에서도 '고립'과 '외로움'을 빚어내는

이 지경에 다다르면 도대체 이 '벽'을 왜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야만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던 내부인이 상황이 바뀌어,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을 세우고 지키기를 원하는 시스템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외부인으로 신분이 바뀌어 버렸을 때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주고 '차이'를 만들어 주었던 그 벽의 높고 차갑고 단단함을 실감하는 것.

이것은 그냥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삶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임을

책을 읽으며 진하게 깨닫고 느끼게 된다.


특히 섬나라에서 사는, 그리고 EU와 브랙시트가 함께 따라붙는 영국에서 글을 쓰는 저자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글 속에 군데군데 녹아들어있음도 감지하게 된다.



소설이 마냥 소설같지 않게 느껴지니 소설 속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만나게 되면

또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결국, 벽으로 갈라진 사회를 구원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내쳐진 -혹은 그 사회에 속하길 거부한-

사람들끼리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바탕으로 한 연대이고

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받아들임' 으로 표현되는 넉넉한 마음과 

불확실함을 극복하고 타인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는' 용기, 환멸을 이기는 단단함임이 아닐까.




-스포일러 없이 쓰려고 노력중이나 역시 쉽지 않다...-

주인공에게 닥친 위기, 그 위기 중에 만나는 조력자, 그리고 다음 위기를 보고 있으면

세상은 쉽지 않고, 하나의 위기와 도전을 견뎌내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과제가 기다린다는

씁쓸한 진리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벽이 만들어지기까지, 지구가 자기 것인냥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벽을 만들어 보편적인 복지와 안전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고

벽을 이용하여 -그리고 그 벽을 지키게 젊은 세대를 몰아가며- 시스템 유지를 원하는

그 지배세력/기성세대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현실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뭘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히파가 말했다.

"난 알아. 그냥 가보자, 그게 최선이야."

히파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는 상판까지 쭉 뻗어 있었다.

(중략)

드디어 맨 위에 다다라 출구 사이로 올라가 금속 상판에 벌러덩 드러눕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다리가 한 단만 더 있었어도 상판으로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는 해냈다.


(p.280-281)


장미빛 희망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마음에 무척 들었다.

현실은 내 바람이나 기대처럼 말랑하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현실을 꿋꿋이, 한 칸 한 칸 밟으며 살고 있고

그건 꼭 나만의 일은 아니다. 

내 옆에도 역시 한 칸 한 칸, 온 힘을 다해 오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세울 수도, 손을 뻗어줄 수도 있는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소설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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