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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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긴 읽되 바보 천치 같이 읽은 것’1)이 아닐까 두렵다. 그러나 이 책이 어떤 ‘진정성’의 반석 위에 세워진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음운과 음소 단위에서부터 짜여진 섬세한 언어 유희와, 책의 전후를 수십 번도 넘게 오가게 만드는 기묘한 형식 실험을 통해 나보코프는, 진정성의 가치를 완벽히 뒤집어엎는 가상성의 예술을 극한치까지 선보인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의 반복되는 진술은 나중에는 소설 전체를 통째로 의심하게 만들고, 이 ‘픽션’ 속에 누구와 무엇이 ‘픽션 속의 현실’이고 누구와 무엇은 ‘픽션 속의 픽션’인가를 혼란스럽게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니고 모든 것이 ‘픽션’일 수 있다는 무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종국에는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은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픽션’과 대비되는 ‘현실’의 자명성에까지 회의하며 책을 덮게 된다.  


나보코프가 1962년 출간한 책 ‘창백한 불꽃’은 시인 존 셰이드의 옆 성에 사는 찰스 킨보트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얼핏 보면 그저 셰이드의 열광적인 팬이자 그와 깊은 친교를 나눈 이웃으로 보이는 킨보트는, 머리말에서 밝히기를 위대한 시인 존 셰이드의 마지막 시가 담긴 카드 묶음을 셰이드의 부인에게서 건네 받았다고 한다.고  그는 이 시 카드에 자신의 길고 긴 주석을 달아 출판할 계획을 세운다. 책 ‘창백한 불꽃’은 그 ‘출판 계획 원고’를 독자가 일종의 ‘편집자’가 되어 들여다보는 텍스트다. 소설의 제목인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의 유작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4막 3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킨보트가 주석에서 설명하는 바, 태양에게서 은빛(창백한 불꽃)을 훔쳐가 겨우 빛을 발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인 달을 노래하는 구절이다.


999행의 영웅시격 2행 연구로 이루어진 시 ‘창백한 불꽃’과 이어지는 킨보트의 주석. 독자의 눈과 손은 바쁘게 책의 앞뒤를 오가야 하고 이를 미리 짐작한 킨보트는 ‘간단하게  아예 두 권을 사서 편한 테이블 위에 나란히 펴놓고 보는 것이 현명하리라’(p.35) 충고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긴 주석은, 독자가 금방 알 수 있듯 셰이드 시의 충실한 해석이 아니다.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단어와 그에 대한 주석의 형태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북구의 나라 젬블라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 간신히 탈출한 친애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를 쫓는 암살자 그라두스까지 나오면서 주석은 시의 종속적 자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개친다.2)


킨보트가 주석에서 말하기를, 그는 셰이드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어 왔으며, 젬블라 왕국의 이야기를 계속 셰이드에게 전해 그가 젬블라와 그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의 이야기를 시로 집필하도록 유도했다 한다. 그러나 킨보트의 이 진술은 온통 의심될 수밖에 없는 것이, 간간히 주석을 비집고 나오는 (생명을 가진 것처럼! 킨보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는 몸부림처럼!) 존 셰이드와 그의 아내 시빌 셰이드의 언행들을 보면 이 부부는 킨보트를 친교의 대상이거나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귀찮아 하고 질려 한다. 킨보트는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하’(p.210)지만, 셰이드는 그런 그를 피한다.


“내가 왜 당신에게 시의 주제를 줬는지, 아니 그보다 당신에게 그 주제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다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슨 주제?” (p.355~356)


운명의 장난처럼 생일까지 겹치는 셰이드와 킨보트. 시인은 시를 쓰고 주석자는 그것에 주석을 단다. 처음엔 위대한 시와, 그 시의 빛을 훔쳐와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는 주석들이 마치 ‘아테네의 데이몬’에 나오는 태양과 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킨보트의 주석이야말로 ‘태양’이고 셰이드의 시는 그것을 비춰 드러내기 위한 ‘달빛’ 같은 존재였다는 역전이 일어난다.


킨보트는 자신의 성 안에서, 창문 너머로 오래도록 존 셰이드를 관찰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셰이드는 발끝 뿐이다. 킨보트의 시선은 셰이드에 대한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줄 자를 응시하는, 달에게 빛을 쏘는 태양의 거만한 시선이며, 셰이드를 통해 자신의 빛을 되비쳐 보려는 나르시시즘의 시선이다. 옹달샘에 비친 자기의 상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도취된 나르시스가 킨보트-폐왕 카를 크사베리이며 존 셰이드는 킨보트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나’ 다.  그렇기 때문에 킨보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성’의 세계 안에서 열심히 젬블라의 모험담을 시로 담아 줄 셰이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결국 친애왕 카를을 시해하려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의 손에 의해 엉뚱한 셰이드가 죽음을 맞고, 킨보트는 셰이드의 유고를 손에 넣고 경황 중인 시빌 셰이드에게 합의문에 서명하게 한 후 달아난다. 그러나 킨보트가 살펴본 시인의 유작은 그가 기대했던 젬블라 폐왕의 모험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나의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 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p.36)다. 킨보트는 셰이드의 시어들을 성냥 삼아, 킨보트-카를의 이야기에 불을 지핀다. 셰이드의 ‘기표’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킨보트가 부여하는 ‘기의’만이 강요된 참뜻, 주석자가 선포하는 진실이 된다. 셰이드의 시어들은, 그 카드들은 옛날 ‘어느 찬란한 아침 셰이드가 소각장의 창백한 불꽃 속으로 초고 더미를 몽땅 던져 태우는’ 것처럼, ‘화형식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나비들’(p.20)의 운명이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을 계속 읽다보면 심지어 이 ‘검은 나비’- 유작시조차도 셰이드의 것이 맞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독자는 이 책의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시 ‘창백한 불꽃’은 과연 셰이드의 것일까? 세상에서 오직 시빌 셰이드 한 명만이 보았을 뿐인 이 카드들이? 우리가 이 카드에 적힌 ‘창백한 불꽃’ 이라는 시를 존 셰이드의 유작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킨보트의 머리말 때문이다. 우리는 킨보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하지 않고 존 셰이드라는 존재를 접한 적도 그의 시를 읽은 적도 없다. 어쩌면 이 ‘시’는 처음부터 킨보트의 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속임수, 주석이라는 형태를 불러오기 위한 밑작업, 킨보트로 정체를 속인 카를 왕처럼 ‘셰이드의 유작시’로 정체를 속인 ‘킨보트의 자작시’는 아닐까? 이게 정말로 셰이드의 유작시가 아니라면, 그럼 정말로 존 셰이드라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셰이드는 ‘그림자, 스페인어로는 거의 ‘인간’에 가까운…’(p.216)이름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거의 인간에 가까운 ‘인물’. 셰이드는 누구의 그림자인가. 나보코프가 창조한 픽션 속의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픽션 속의 킨보트가 창조한 인형, 픽션 속의 픽션일 수도 있다. 물 속에 비친 상이 나르시스 그 자신이었듯 킨보트가 응시하는 셰이드는 바로 킨보트 자신이다. 이 생각에 도달했을 때 독자는 아찔한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픽션이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즐거움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어진 세계에서 겪는 쾌락의 현기증이다.

의심이 계속 될수록 이야기는 미궁에 빠지고 독자는 길을 잃는다. 독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왕궁의 벽장 뒤 통로를 그냥 계속 걸어나갔던 카를왕의 길처럼, 그저 나보코프가 설계한 어둠 속을 걷다가 극장 한가운데로 빠져나오는 길 뿐이다. 독자가 도달할 무대는 시를 쓰는 셰이드와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와 그 킨보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그림자단의 그라두스까지 겹쳐보이고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그림자극의 무대이다. 삶이 태양이라면 죽음은 달과 같으며,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와 같은 것.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빌려 인생도 결국 흔들리는 그림자일 뿐이라고, 삶과 죽음의 고리를 이어놓은 것이 아닌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중략)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p.371) 결국 초인종을 울릴 것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삶의 그림자, 삶의 발끝에 길게 이어져 있는 죽음이다. 끝에는 그라두스까지도 이 반복되는 킨보트-카를-셰이드의 거울상 끝에 사자(使者)의 형태로 서 있는, 거울상의 변주로 보인다. 유리에 비친 상이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반사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하나의 인물이 계속 분열되어 비치듯이. 거울 속에선 유리에 비친 나가 반복되고 그 거울은 또 유리 속에서 반복되어 끝없이, 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셰이드-킨보트-카를- 그라두스-셰이드-킨보트-카를-그라두스...’ 같은 것의 반복, 단 한 사람 ‘나’의 반복만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킨보트라는 - 어쩌면 그 이름조차 가짜일 - 미치광이 혹은 가공할 예술가, 게임메이커가 꾸며낸 픽션일지도 모른다.3) 그리고 그 게임메이커는 바로 작가 나보코프 자신의 ‘그림자’다. 반복되는 ‘나’의 연쇄 끝에, 이윽고 이야기의 최종 메타자인 나보코프의 상이 거울의 저 끝에 떠오르는 순간,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나보코프는 킨보트를 꾸며내고 킨보트는 젬블라와 카를 크사베리를 꾸며내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시인 셰이드까지 꾸며낸다. 마뜨로쉬까 인형처럼 겹치고 겹치는 픽션의 중첩. 이 안에서 정신 착란에 빠진 잭 그레이는 그림자단의 암살자 그라두스로 둔갑하고,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로 둔갑하며,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 노인네였을지도 모르는 존 셰이드는 미완의 영웅시를 남긴 위대한 시인으로 둔갑한다. 그 모두는 나보코프의 그림자이다. 마뜨로쉬까를 끝까지 열어 보아도 그 속은 텅 비어 있을 뿐. 타자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그저 거울에 비추어진 무수한 ‘나’의 반복만이 있을 뿐인 가짜 상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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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2019, p.194. 이하 인용은 괄호 안에 페이지 수만 표기.


2)주석을 읽다 보면 워드스미스 대학의 러시아 문학 교수 찰스 킨보트가 젬블라의 폐왕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킨보트의 진술을 전적으로 신뢰했을 때 가능한 일이며, 킨보트의 ‘믿을 수 없는 화자’ 성질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독자라면 킨보트가 카를 크사베리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나아가 젬블라라는 나라가 이 ‘픽션’ 속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까지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3) 킨보트조차도 마지막엔 이렇게 여지를 남긴다.

‘오돈과 합작으로 <젬블라 탈출>이라는 신작 영화를 제작할지도 모른다. 연극 평론가들의 단순한 취향에 영합해 무언극을 지어낼지도 모르겠다.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을’.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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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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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의 거장’ 앨리스 먼로의 소설 ‘거지 소녀’는 작가의 소설 중에서도 초기작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에서 태어나 자란 로즈의 소녀 시절부터, 그녀가 토론토, 밴쿠버, 또 여러 캐나다의 타운들을 두루 거쳐 다시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온 중년기까지를 그리고 있다.

총 10편의 단편소설 속 로즈의 인생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하다. 한 편 한 편의 단편소설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진행되고 등장인물은 거의 항상 바뀐다. ‘거지 소녀’ 연작은  ‘여인의 일생’ 이라는 제목의 10편짜리 단막극 모음으로 읽힌다.

매 맞는 소녀, 선배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학생,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희구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 갈등하는 젊은 여성, 불륜을 저지르는 유부녀,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혼녀, 치매 걸린 새어머니를 돌보는 딸. 로즈는 10편의 단막극들에서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다. 작가 앨리스 먼로는 하층 계급 출신의 지식인 여성이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장소, 사람, 상황과 마주치는 모습을, 그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이며 인생의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지를, 냉정한 관찰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 한다.


첫 소설인 <장엄한 매질> 은 마지막 소설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와 수미상관적으로 맞물려 있다. 여기에서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웨스트핸래티에서의 학창 시절, 해티 선생님이 로즈에게 던진 말과 같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이것은 로즈의 되바라짐과 시건방짐, 자만심과 허영을 비난하는 웨스트핸래티의 말이다. 로즈는 과연 뭘까? 매질을 당하는 소녀, 혼자 방에서 울음과 수치심을 삼키는 소녀, 그러나 달콤한 간식들에 자존심을 허물어버리는 소녀. 로즈 안에는 영웅적인 면모는 전혀 없고 의지도 강인함도 없다. 똑똑하지만 뜻은 높지 않고, 자존심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약하고 불안 많은 속물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살 수도 없고,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야심 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없다. 하나의 상으로 정리될 수 없는 인물, 일이 닥칠 때마다 그 때 그 때 생각하고 대응하는 즉흥적인 인물이 로즈이고 이것은 그녀의 배우성이 천부적인 것임을 입증한다.


 <장엄한 매질>과 이후 두 소설에서 묘사되는 웨스트핸래티- 더럽고 빈곤하며 ‘대체로 비루하고 희붐하고 흥미롭고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세상’인 웨스트핸래티는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다. 타이드 영감이 딸을 학대하고 아이까지 갖게 만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폭행해 죽게 만드는 곳이다. 조용한 일상 속에 폭력이 들끓는 이 마을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등 그 자체다.’(p.34)

폭력은 정의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실제로 이 ‘정의의 매질’은 타이드 남매에게 새 삶을 선사하기도 한다. 웨스트핸래티에서 폭력은 용인되고 거의 장려된다. 매질은 하나의 위풍당당한 연극, 로즈의 처음 생각처럼 장엄한 의전 행위다. 어긋난 것을 올바르게 만든다는 폭력은 핸래티 공동체의 도덕이며, 로즈를 가혹하게 구타하는 로즈 아버지와 타이드 영감을 죽인  말채찍 패거리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매질을 하는 아버지와, 매질을 주문하고서도 달콤한 간식으로 달래려고 드는 플로를 통해, 로즈는 인생의 연극성을 배운다. 매 맞는 피해자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로즈에게 우월감을 선사하고 굴종이 주는 보상은 달콤하다. 그리고 인생에서 어떤 행동들은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연극적으로 행해진다는 깨달음. 코라와 함께 했던 순간들과 무덤 놀이 또한 삶을 하나의 연극처럼 만드는 장치들이다. 놀음PLAY이 중요하다. 진정한 것, 확고부동한 것, 겉과 속이 일치하는 것은 없다. 플로가 <특권>에서 로즈에게 말하듯, 대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로즈는 과일 반쪽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는 식으로 허세를 부리며 뭔가 대단한 사람을 연기해보려고 하지만, 그녀보다 더 화려한 배역을 연기한 루비 캐루서스나 조슬린 앞에 로즈의 작은 허세는 사소해진다.


그녀는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픈 갈망을 느꼈다. 강타당하고 애무받고 전락하고 소진되는. (p.117)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 특히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되고 로즈는 이것을 선망한다.  <야생 백조>에서, 기차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로즈를 추행한다. 독자의 관행적인 예상을 거부하고 로즈는 불안 속에서도 그 추행을 즐긴다. 플로가 주입했던 몸가짐 바른 여성으로서의 로즈와, 성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달콤한 성취감을 느끼는 로즈가 뒤엉킨다. 욕망보다 더 갈급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성인이 된 로즈는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고 싶어 한다. 토론토에서의 삶은 ‘이름만 바꿨을 뿐 자기 모습 그대로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에서 로즈와 독자는 새로운 세계-대도시에서의 생활이 주게 될 변화, 활력 그리고 관능을 예감한다.


대학에서 만난 역사학도 패트릭-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이 부르주아 사나이는, 정의의 기사에 자신을 대입하고 그가 구해주어야 하는 가련한 처녀의 자리에 로즈를 끼워넣는다. 그의 감정은 가난과 역경에 대한 동경이며, 베푸는 자로서의 쾌감이다. 패트릭의 기만적인 사랑에 로즈는 저항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로즈에게 황홀한 일이었다. 타인의 눈에 맞춰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해 왔던 로즈의 미성숙함과 타인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로즈의 속물성으로 인해 그녀는 패트릭과 약혼한다.


 그녀는 유명하고 선망받는 사람, 날씨하고 총명한 사람이고 싶었다. -p.134


로즈는 대학에서 깨닫는다.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다. 정말로 그랬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어리석었을까?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어리석었다.’ -p.137



결혼 직전 마지막 순간에도 로즈는 허영의 왕관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의 모습에 마음이 찡해져서, 너무도 다정하고 서글퍼져서, 그에게 뭔가를 주고 놀라운 관대함을 베풀고 싶어’(P.175)하는 부분은 허영의 절정이다. 권력의 관계는 역전된다. ‘그토록 볼품 없는 거지 소녀였던 내가, 나에게 몸이 달아 있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전능함의 환상. 그녀는 시혜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고 패트릭에게로 뛰어든다.


로즈는 결국 십 년 후 파경을 맞는다. ‘기사와 숙녀가 살고 만행과 헌신이 있는 세상에서 활약하고 싶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연기하고 싶어하는 남자 패트릭은 기실 로즈의 딱 맞는 짝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는 자신의 부르주아 계급성 안으로 소라게처럼 들어간다 (아버지가 사준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자랑하는 모습처럼). 그러나 패트릭은 온타리오에서 너무나 먼 브리티시컬럼비아 출신이었고 그의 계급은 굳건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p.145)이며 패트릭 또한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보수적 견해를 큰소리로 떠드는 자족적인 인생을 산다. 하지만 ‘거지 소녀’ 로즈는 그렇지 못하다. 패트릭의 아내가 되어서도 웨스트핸래티 출신의 가난한 소녀, 물질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빈곤한 계급의 소녀 로즈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받아야 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ㄴㅇ사랑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녀의 환상과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배역을 맡고자 하는 욕망은 불륜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그녀가 유부남인 클리퍼드와 톰을 선택하는 것, 미스터리한 남자 사이먼을 선택하는 것은 그녀 안에 분출해야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즈의 딸 애나는 로즈와 다르다. <섭리>에서  애나는 로즈와 헤어져 밴쿠버로 돌아간다. 결국 ‘섭리’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애나는 애나의 자리에 로즈는 로즈의 자리에- 것을 의미한다. 애나는 패트릭과 로즈의 부부 침대를 차지하고 부르주아 가정의 아이가 되어 흡족해 한다. 이 침대는, 이 자리는 로즈의 것이 아니었다. 로즈는 따뜻한 가정과 기둥 달린 침대의 삶보다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방랑의 삶, 순간 순간 떠오르는 욕망을 자유롭게 분출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로즈는 일생에 걸쳐 누군가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산다. 패트릭을 배신하고 톰에게 배신당하고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확신에 스스로 배신당하는 삶이다.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p.308


로즈와 달리 플로는 나이 들면서 어린아이 같아진다. 소녀 시절의 로즈처럼 단것을 갈망하고, 치매 환자가 되어 스펠링 놀이를 하고 간호사를 깨무는 노인이 된다. 인생의 길을 방랑하며 수많은 캐릭터로 변신했던 로즈, 너무나 혼신을 기울여 모든 역할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젠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된 로즈의 삶과 플로의 삶은 다르다. 플로는 변함없이 플로였고, 플로답게 노년에 이른다.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는 이 책의 원제였다. 책의 처음에서 플로가 했던 그 질문은 마지막에서 해티 선생님을 통해 반복된다. 처음엔 가볍게 느껴졌던 그 질문은 이제 둔중한 무게로 독자의 가슴을 누른다. 로즈는 과연 뭘까? 이는 모욕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로즈의 고정되지 않는 자아를 짚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무엇’이라고 정의되지 않는 존재,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을 자신의 생을 통째로 바쳐 연기해낸 즉흥 배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속의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와도 연결된다. 밀턴 호머는 경계심과 억제가 없는 인물이고, 연극적인 행진을 좋아하며, 아기에게 성자처럼 축복을 내려주는 역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로즈의 친구 랠프 길레스피는 밀턴 호머의 모사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밀턴 호머처럼 되어 버렸다. 밀턴 호머와 랠프 길레스피는 실제 인생과 연극을 섞어, 연극이 실제가 되고 실제가 연극이 되게 만든다. 연극과  생활을 합일시킨 배우는 가장 위대한 연기를 해낸 것이지만 그 대가로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것은 주어진 규범의 한도 내에서만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연기,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플로의 표현대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로즈와 밀턴, 랠프는 사회가 요구하는 선을 넘어 ‘연기’를 ‘사는’ 인물이 되고 이 과도함은 경계의 대상이 되며, 선을 지키는데 실패한 배우는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로즈가 랠프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랠프는 죽음 이후 나란히 묻히게 될 동료와도 같고, 그래서 두 사람의 재회 또한 재향군인회관에서 이루어진다. 랠프의 자족적인 모습, 당혹감 속에서도 긍지를 가진 모습은 밀턴 호머와 완벽하게 일치되어 보인다. 밀턴 호머를 너무 열심히 연기하다 그 자신이 밀턴 호머가 되어버린 랠프 길레스피. 삶을 배역과 완전히 일치시킨 이 ‘배우’를 보면서 로즈는 우애와 공감을, 복잡한 삶의 궤적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느낀다. 로즈는 자기 인생이 허튼 것, 우스꽝스러운 것, 장난 같은 것이라고 느껴왔다. 섬세함도 깊이도 없는 실수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플로는 그녀에게 수치를 알라고 했고, 해티 선생님은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라는 거친 의문을 던졌지만,  로즈의 수치심과 당혹감은 동료 랠프 길레스피를 보며 가라앉는다.


책은 로즈의 끝없는 이주가 마침내 온타리오 주 웨스트핸래티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물론 로즈의 삶은 이후로도 이어질 것이고 로즈가 다시 어디로 길을 떠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연작소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랠프 길레스피의 죽음을 마음에 간직하는 중년 로즈의 모습으로 끝난다.


10막짜리 긴 장막극이 아니라 10편짜리 단막극 모음과도 같았던 소설. 매 편마다 로즈의 모습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달랐고, 출연자들도 저마다 개성이 뚜렷해서, 로즈라는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인생소극(笑劇) 시리즈를 본 기분이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보았다는 느낌.  로즈는 편마다 새로운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나 자신’을 알고 목표에 따라 미래를 계획하며, 그것을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인물- 이런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로즈는 결코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로즈는 ‘나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떠돌았고 늘 뒤집혔고 일이 닥치면 그 때 생각하며 그 때 그 때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와도 비슷하달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대책없고 미성숙한 사람이겠지만, 그녀는 ‘확고부동하며 정의 가능한 나’가 되기를 거부했다. 대신 매 회 다른 연기PLAY를 선보이며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복잡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속물성을 온몸으로 열연하였다. 어느 소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복잡다단한 캐릭터 앞에, 작가 앨리스 먼로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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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룸
김의경 지음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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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경의 첫 소설집 '쇼룸'을 읽었다. 8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처음 수록된 소설 '물건들'은 다이소에서 쇼핑을 하다 재회한 대학동창 영완과 '나'의 동거 이야기다. 천원 이천원으로 생활용품 - 생활에 꼭 필요한 것도 있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정말 필요한가 고개를 갸웃거려 볼 수도 있는 - 들을 이것저것 주워 담을 수 있는 '다이소'를 주요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는 자체가 일단 흥미로웠다. 가난한 커플인 영완과 '나'는 값비싸고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사는 대신 부담없이 사고 쓰고 버릴 수 있는 생활용품들을 사들이는 것으로 소비 욕구를 채우고 가난한 직장인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그 때 그 때 해소한다. 그러나 '그 때 그 때' 해소하는 '때우기식' 삶의 방법은 이 커플 안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볼품없는 살림살이지만 저렴한 물건들로라도 예쁘게, 단정하게, 보기좋게 꾸미고 정돈하며 살아가고파 하는 영완.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 키우는 삶을 조심스럽게 꿈꾸는 '나'. 그러나 현실은 이 커플에게 찬바람 쌩쌩 불어댈 뿐 이들의 낮은 임금과 부모 부양의 책임은 그 작고 소박한 꿈조차 꽃피울 수 없게 하고 이들의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은 다이소에서 별 필요도 없는 싸구려 물건들을 소비하는 것으로 대충 소모되고 만다. 응집되고 커져서 큰 불꽃으로 피워올라야 하는 이들의 욕구가 '유리캔들홀더 위의 티라이트'처럼 가볍게 불타 올랐다가 조용히 사그라들고 마는 것. 결국 이들의 오순도순했던 동거 생활도 조용히 끝장나고 만다. 남은 것은 다이소 안에서 흩어져 버린 연인의 자취 뿐이다. 

분량도 제일 길고, 소재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서술력도 다른 일곱 편의 소설들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우울한 이야기 같지만 다이소라는 가벼운 공간이 주는 느낌을 가져와서인지 무겁게 처지지 않았고, 고민을 하면서도 축 처지지 않는 '나'의 적당한 건조함과 냉담함이 타깃층 독자를 잘 겨냥했다 싶었다.


이후의 '세븐 어 클락' 부터 '빈집' 까지는 모두 광명에 문을 연 이케아를 둘러 싼 일종의 연작소설이다. 스웨덴에서 건너온 조립가구인 이케아는 저렴함과 간편성, 보기좋은, 결정적으로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존재적 가벼움'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 모든게 예쁘게 전시되어 있는 이케아의 '쇼룸' 에서 그 '예쁨', '간편함' '가벼움'을 소비하는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들. 그러나 그 저렴한 가구를 소비하는 와중에서 내 옆에 선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결말은 희망의 온기를 놓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로 보였다. 


'부유한 유학파 부부의 꿈'이 담긴 바우하우스 고시텔의 이야기를 그린 '2층 여자들'은 책의 마지막 소설이다. 고시원을 다룬 소설들은 꽤 여러 편 나와 있기에 솔직히 가장 식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이소나 이케아만한 공간적 소재는 아니었다. 고시원의 분절적 삶 속에서도 끈끈한 애정과 전통사회적 상호 부조를 꿈꾸는 총무의 캐릭터도 다소 뻔했다. 특히 마지막에 총무가 돈을 가지고 도망치는 이야기나, 그런 총무를 고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작가가 이전의 이케아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희망의 의지가 약해보여 아쉬웠다 - 그래도 '나'가 총무를 고발하는 허위 문자를 전송하지 않은 것으로 마무리한 건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다이소'나 '이케아' 같은 공간성 안에 잘 녹여낸 점, 진지하지만 질척이거나 우울하지 않은 건조한 서술이 매력적인 책이었다. 작가의 첫 책이라 처음엔 수준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 후속작도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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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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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은 그제야 6을 그릴 수 있었다. 아주 정확한 곳에 6을 그릴 수 있었다. 한솔은 언제부터 보편시민에서 박탈당한 것인지 27번 창구의 직원에게까지 설명했다 창구를 오가며 스물일곱 명의 직원에게 서른네 번 정도 설명했다. 한솔의 인생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편시민에서 박탈당했는지 또한 배제라는 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야 서류에 필요한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한솔은 그 서류로 보편시민 등록을 마치고 이제 프라하에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솔은 프라하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 p.55

이 소설은 작가 본인도 소설 속에 썼듯, 명백하게 카프카의 영향 아래 씌어진 소설이다.

사실 카프카 이후, 세계의 많은 작가들은 전부, 마치 거대 행성의 힘에 빨려 들어온 것처럼

카프카의 중력권 안에 좌표를 찍고 있다.

박솔뫼의 이 소설도 그런 위성소설 중 하나다.

그러니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생각한다. '이런 책을 백 권 읽을 바에는 카프카의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낫지.'

레이먼드 카버를 흉내낸 미국소설 풍의 책을 읽고, 로베르토 볼라뇨를 흉내낸 남미소설 풍의 책을 읽고, 프란츠 카프카를 흉내낸 동유럽소설 풍의 책을 읽는 것은 힘빠지는 일이다. 그 돈과 시간과 체력으로 레이먼드 카버과 로베르토 볼라뇨와 프란츠 카프카를 그냥 오리진으로 읽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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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은 여행기다.

두 인물 - 한솔과 나미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부산에서도 만남을 이어간다.

기차에서 만났던 그들은 부산 여객선 터미널에서 만나 일본으로 떠나는 배들을 응시하며 대화를 나눈다.

난데없는 만남과 어지러운 사유, 뭔가 비껴나가는 듯한 대화, 통합되지 않는 이야기들, 맥락 없는 돌아다님.

홍한솔 김영우 조유이 나미 신유미 등등 어떤 이름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다. 홍상수 영화 같다.

한솔은 아마도 성전환 수술을 받은 -M F의 기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 같고, 나미는 사이비 종교 교단에서 탈출해 나온 사람이다.

들은 육체-정신의 측면에서 '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부산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더욱 증폭되고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생각 속에 더욱 적극적으로 '향유'된다. 이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불안은 도망쳐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향유된다'.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소설 전체의 정조로 삼고 있는 책.

'나는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탐정' 이라는 은유로 드러내는 책.

그러나 불안에서 출발한 그 질문은 불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불안은 거기에 있고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흥밋거리다.

우울증과 불안증은 현대인의 새로운 쾌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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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이즈에 비해 책값이 비싸고 인쇄 상태가 나빴다. 비뚜름하게 인쇄가 되어 있어 읽기에 힘들었다. 독립출판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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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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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황정은 작가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출간하고 상수동 이리 까페에서 낭독회를 가졌을 때, 독자와의 질문 대답 시간에 내가 첫타자로 '이 책에는 문단 첫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던데 의도적인 것이냐' 라고 물었다. 작가는 대답했다. '의도적인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질의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당연히 의도적이라면 왜 의도적인 것인지에, 무슨 의도였는지에 대한 후속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질문용 마이크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우리집에는 황정은 작가의 전작이 다 있는데, 2010년 민음사 출간작 '백의 그림자'는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다. 2012년 창비에서 출간된 단편소설 모음집 '파씨의 입문'은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다. 바로 이 다음책이자 내가 의문을 제기했던 2013년도 출간작 '야만적인 앨리스씨' 부터는 다시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그때부터 '계속해보겠습니다'와 이번 '디디의 우산' 역시 들여쓰기를 거부하는 형태로 문단을 짜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디디의 우산' 수록작 'd'의 전작격이라 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수록작 '웃는 남자'의 경우에는 들여쓰기가 되어 있다.


단 한 칸. 두 번의 스페이스 바. 왜 이것을 하지 않을까? 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어떤 소설에서는 하고, 어떤 소설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냥 우연인가? 랜덤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럼 무엇인가? 어떤 의도가 있고 무슨 패턴이 있는가? 답을 모르겠다. 이거 하나가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의도와 목적. 이런 것 없이 씌어지는 소설-책이 있을까? 작가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 긴 시간과 여러 사람의 공을 들여 기필코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이것을 찾는다. 마치 계주 선수처럼, 저 뒤에서 달려와 내 손에 파란 바통을 넘기려고 하는 작가의 페이스에 맞춰 나도 먼저 달리기를 시작하며, 그 바통을 제대로 받아쥐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리고 그 바통을 쥐면, 다음 선수에게 달린다.


'디디의 우산'은 명백히 목적이 있는 소설이고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d'를 읽으며 이 소설을 쉽게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를 생각했다. 1층인 집이 묘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 반지하가 되어 버리는 그런 집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고,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세운상가의 골목길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이 소설은 철저히 '공간성'에 대한 소설이었다. 완만한 내리막의 반지하와, 골목길에서 마시는 양귀비차, 1950 6 28일 폭파된 한강 다리, 일본에서 건축 공부한 자들이 지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세운상가와 창문도 없고 오디오 놓을 자리도 없는 고시원 방. 그리고 차벽. 광화문을 에워싼 거대하고도 거대한 차벽-이른바 명박산성.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 없어 카프카의 ''에 나오는 K처럼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야 하는 청계천과 종로의 거리들. 이 소설은 '공간' 에 대한 서사이며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였다. 그리고 그 공간성의 제약을 기어이 넘어설 수 있는 '소리'-진정한 파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선오 노인이 꿈꾸던 물 흐르는 소리, d가 고시원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엘비스 프레슬리, 세운상가 564호에서 울려 퍼지는 진공관의 소리까지. 그 소리들은 '공간'-'space',두 번의 스페이스 바, 달칵달칵, 만들어진 한 칸의 공백-을 넘어서려는 어떤 결정적 파동이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 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1) 소설의 의도와 목적은, 소설의 형식과 맞물리고 독자는 여기서 쾌감을 느낀다. 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문자열이 만들어낸 형식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시야가 멀어지고 있는 '아무것도 말할...'의 주인공에게 너무나 잔인하게도, 오직 묵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쾌감이다.


그러나 공간을 넘어서는 파동을 말하는 듯한 이 소설은, 결국 그 '공간'에 대한 밀도 깊은 묘사로 최종 기억된다. '디디의 우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이나 '천변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 '쏘다니기'의 서사였고 청각 이미지보다 시각 이미지에 강한 나-아마도 다수의 현대적 독자들에게 결국 기억 남는 것은 철저히 현실적인 그 공간들이다. 오늘날 박태원의 소설들이 그러하듯 '디디의 우산'도 언젠가 하나의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가장 가깝게는 세운상가가 사라지는 날, 학생들이 갇혔던 연세대 생활관이 철거되는 날, 명박산성과 세월호 집회가 잊혀지는 날, 고시원과 반지하가 (간절히 바라옵게도) 사라지는 날, 그렇게 되리라. ' TR이나 IC가 발명되기 전에 나온 빈티지'인 여소녀의 진공관처럼,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이 되어'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어 진공이나 다름 없고 '저 소리는 이 진공을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2)하지만 기어이 그 소리는 진공관 안을 뜨겁고 뜨겁게 채워 수백 만개의 불꽃이 되고 그것을 의심하는 자의 손을 아프게 하고 뻗어 뻗어 나가리라. '이제 그 얘기 그만하면 안 될까.' 하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2017 3 10일 오전 열한 시-생명권 보호 의무에 대한 판결문을 읽는 소리. 공간과, 공간이 만드는 진공에 대해, 그리고 진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기어이 얘기하고야 마는 이 현실밀착의 목적 분명한 소설은 불완전한 혁명의 시대가 가고 언젠가 그 시절의 레퍼런스가 필요한 날 반드시 다시 책장에서 꺼내지리라. 몇 번이고.







1)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292'

2) 황정은, 'd',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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