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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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황정은 작가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출간하고 상수동 이리 까페에서 낭독회를 가졌을 때, 독자와의 질문 대답 시간에 내가 첫타자로 '이 책에는 문단 첫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던데 의도적인 것이냐' 라고 물었다. 작가는 대답했다. '의도적인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질의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당연히 의도적이라면 왜 의도적인 것인지에, 무슨 의도였는지에 대한 후속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질문용 마이크는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우리집에는 황정은 작가의 전작이 다 있는데, 2010년 민음사 출간작 '백의 그림자'는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다. 2012년 창비에서 출간된 단편소설 모음집 '파씨의 입문'은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다. 바로 이 다음책이자 내가 의문을 제기했던 2013년도 출간작 '야만적인 앨리스씨' 부터는 다시 문단 들여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그때부터 '계속해보겠습니다'와 이번 '디디의 우산' 역시 들여쓰기를 거부하는 형태로 문단을 짜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디디의 우산' 수록작 'd'의 전작격이라 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수록작 '웃는 남자'의 경우에는 들여쓰기가 되어 있다.


단 한 칸. 두 번의 스페이스 바. 왜 이것을 하지 않을까? 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어떤 소설에서는 하고, 어떤 소설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냥 우연인가? 랜덤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럼 무엇인가? 어떤 의도가 있고 무슨 패턴이 있는가? 답을 모르겠다. 이거 하나가 나를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의도와 목적. 이런 것 없이 씌어지는 소설-책이 있을까? 작가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 긴 시간과 여러 사람의 공을 들여 기필코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이것을 찾는다. 마치 계주 선수처럼, 저 뒤에서 달려와 내 손에 파란 바통을 넘기려고 하는 작가의 페이스에 맞춰 나도 먼저 달리기를 시작하며, 그 바통을 제대로 받아쥐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리고 그 바통을 쥐면, 다음 선수에게 달린다.


'디디의 우산'은 명백히 목적이 있는 소설이고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d'를 읽으며 이 소설을 쉽게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를 생각했다. 1층인 집이 묘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 반지하가 되어 버리는 그런 집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고,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세운상가의 골목길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그렇다, 이 소설은 철저히 '공간성'에 대한 소설이었다. 완만한 내리막의 반지하와, 골목길에서 마시는 양귀비차, 1950 6 28일 폭파된 한강 다리, 일본에서 건축 공부한 자들이 지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세운상가와 창문도 없고 오디오 놓을 자리도 없는 고시원 방. 그리고 차벽. 광화문을 에워싼 거대하고도 거대한 차벽-이른바 명박산성. 어디로도 빠져 나갈 수 없어 카프카의 ''에 나오는 K처럼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야 하는 청계천과 종로의 거리들. 이 소설은 '공간' 에 대한 서사이며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도였다. 그리고 그 공간성의 제약을 기어이 넘어설 수 있는 '소리'-진정한 파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윤선오 노인이 꿈꾸던 물 흐르는 소리, d가 고시원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엘비스 프레슬리, 세운상가 564호에서 울려 퍼지는 진공관의 소리까지. 그 소리들은 '공간'-'space',두 번의 스페이스 바, 달칵달칵, 만들어진 한 칸의 공백-을 넘어서려는 어떤 결정적 파동이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 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1) 소설의 의도와 목적은, 소설의 형식과 맞물리고 독자는 여기서 쾌감을 느낀다. 문자를 해독하는 사람, 문자열이 만들어낸 형식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 시야가 멀어지고 있는 '아무것도 말할...'의 주인공에게 너무나 잔인하게도, 오직 묵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쾌감이다.


그러나 공간을 넘어서는 파동을 말하는 듯한 이 소설은, 결국 그 '공간'에 대한 밀도 깊은 묘사로 최종 기억된다. '디디의 우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이나 '천변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 '쏘다니기'의 서사였고 청각 이미지보다 시각 이미지에 강한 나-아마도 다수의 현대적 독자들에게 결국 기억 남는 것은 철저히 현실적인 그 공간들이다. 오늘날 박태원의 소설들이 그러하듯 '디디의 우산'도 언젠가 하나의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가장 가깝게는 세운상가가 사라지는 날, 학생들이 갇혔던 연세대 생활관이 철거되는 날, 명박산성과 세월호 집회가 잊혀지는 날, 고시원과 반지하가 (간절히 바라옵게도) 사라지는 날, 그렇게 되리라. ' TR이나 IC가 발명되기 전에 나온 빈티지'인 여소녀의 진공관처럼, '세종대로 사거리는 두개의 긴 벽을 사이에 둔 공간이 되어'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어 진공이나 다름 없고 '저 소리는 이 진공을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2)하지만 기어이 그 소리는 진공관 안을 뜨겁고 뜨겁게 채워 수백 만개의 불꽃이 되고 그것을 의심하는 자의 손을 아프게 하고 뻗어 뻗어 나가리라. '이제 그 얘기 그만하면 안 될까.' 하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2017 3 10일 오전 열한 시-생명권 보호 의무에 대한 판결문을 읽는 소리. 공간과, 공간이 만드는 진공에 대해, 그리고 진공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기어이 얘기하고야 마는 이 현실밀착의 목적 분명한 소설은 불완전한 혁명의 시대가 가고 언젠가 그 시절의 레퍼런스가 필요한 날 반드시 다시 책장에서 꺼내지리라. 몇 번이고.







1)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292'

2) 황정은, 'd',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p.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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