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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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 세상의 파리 같은 놈이야. 그놈들은 가만히 노리고 있다가 우리의 부패한 데 들러붙어. 그놈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와 섹스한 것을 온 세상에 퍼뜨리고 다니는 더러운 파리야. 우리의 절대 자유와 절대 능력을 부패시키는 일이라면, 그놈들은 무슨 일이든 하지. 그놈들이 세운 불결한 마을을 지키려고.” ('오후의 예항', 145쪽)

두 사람은 그야말로 친숙하지 않았다. 인간과 짐승의 대화라면 좀더 가식적인 친밀함이 있을 텐데,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짐승들처럼 위험하게 서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싸우듯이 장난치고, 장난치듯이 싸웠다. 그 와중에 공포에 쫓기는 것은 고지 쪽이고, 화를 내면서도 유코는 대담하고 겁이 없었다. ('짐승들의 유희', 215쪽)

'오후의 예항'은 거칠게 요약하면, 과부가 된 어머니의 새 남편이 되겠다고 선언한 선원 사내를, 친구들과 모의해 살해하는 열세 살 소년의 이야기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햄릿'이다.

'짐승들의 유희'는 거칠게 요약하면, 두 연인이 자신들의 사랑과 결합을 가로막는 '병신' 남편을 교살하고 마침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역시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다, '클리타임네스트라'다.

굉장한 막장극인 것 같지만 사실 서양 문학 역사에 유구하게 흐르고 있는, 아버지 살해 서사의 변형된 두 가지 버전 소설이었다. '오후의 예항'은 말할 것도 없고, 유코와 고지 두 사람의 불륜처럼 그려진 '짐승들의 유희'는 실상, 잇페이라는 넘겨다 볼 수 없는 거대 아버지를 스패너로 때려눕히고 그의 아내 - 어머니를 차지하려던 고지의 계획이 어긋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버지 살해 서사의 줄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지와 유코와 성적 결합은 계속 방해되는데, 사실 간단히 무시해도 되는 그 벽 - 겨우 한 장의 모기장!- 을 넘지 못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던 두 사람은, 마침내 잇페이를 밧줄로 교살하고, '동쪽 산에서 한 줄기 여명'을 받으며 자수를 하러 간다. '하루의 첫 햇살을 받은 두 사람의 모습은 반짝이는 것 같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흐르고 모습과 발걸음도 자유롭고 생기가 넘쳐서 두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인 적은 없'어 '그야말로 신랑 신부 같'(357쪽)은 모습이이다. 비로소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의 금지를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넘어서고 난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싱그럽고 아름답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금기를 뛰어넘은 '짐승'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유희적 존재로서의 기쁨이다.

아들들이란. 대체 왜 그들은 어머니를 가만 놔두지 못하는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그들의 욕망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 물론 아니다. 어머니를 차지해야 '남자' - '남근의 완성자' -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처럼 '그다지 키가 크지 않은 사나이'가 어머니와 성적 결합을 하는 광경을 보며 동일시의 쾌락을 느끼고, '희고 얇은 다리를 가진' 주제에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와 통정하는 유사 아버지의 대가리를 검은 스패너 - 더욱 강한 남근으로 후려갈김으로서 아들의 반란을 완성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궁극의 금도를 넘지는 못하는데, 이것이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그린, 영웅-초인이 되지 못하는 남성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영원한 과부로, 남자 없는 여자들로 남는다.

두 편의 소설에서 유일하게 금도를 넘어선 인물 - 친딸과 성관계를 갖고 그와 비슷한 사진을 주머니에 부적처럼 넣고 다니는 남자 데이지로는, 따라서 결코 죽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그는 선악의 저편을 완벽하게 넘어선 초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유코-고지-잇페이 세 사람의 불균형한 관계를 사진에 담아 박제시키는 권력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다.

정말 너무나 유해한 작가인데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것... 세상 어디에서 미시마 유키오 같은 작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돌파해 산산조각을 내어놓고 달려가는 패기. 게다가 그의 문장은 얼마나 정치하고 아름다운가. 풍경 묘사에서부터 극세밀한 사물 묘사, 지독히 느리게 이어지는 아주 선명한 한 장면 한 장면의 묘사들. 주제의식과 표현방법 뿐 아니라 문장 한 줄 한 줄까지도 언어로 할 수 있는 극한으로 밀어부친 것 같은 이 귀기의 작가는, 여러분 다 아시는 그 방법 그대로 광인같이 세상을 버렸다.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극한으로 밀어부쳤다.

덧붙임)

'짐승들의 유희'에 나오는 이 기묘한 삼각관계의 공존은, 최근 읽은 무라타 사야카의 '지구별 인간'을 연상시켰다. 지구별에 불시착한 외계인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세 명의 남녀가, 지구인의 금기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알몸으로 뒹굴며 살인과 식인을 저지른다는 이 압도적인 엽기소설은, 분명 미시마 유키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서 이런 일본소설들을 넘어서는 괴작들을 만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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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최애의 아이 02 최애의 아이 2
아카사카 아카 지음, 요코야리 멘고 그림 / 대원씨아이/DCW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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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흥미진진한 전개. 추천받아 샀는데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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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인강까지 볼 수 있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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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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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래 기다려온 걸작입니다. 그토록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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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뷰404호 2022-06-05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떤데요?
 
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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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시종일관 눈, 새, 바다, 촛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한 편의 시처럼 전개된다. 사용하는 언어들만이 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이미지의 활용, 꿈과 환상, 뒤엉켜진 시간과 시점, 난데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목소리들, 논리와 핍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개 등이, 서정적인 읊조림을 갖고 몽환적으로 이어진다. 첫장부터 꿈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게, 사실주의적 기승전결과 논리적이고 분명한 서사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방법에 있어 직선적 정공법 보다는 꿈 속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몽롱함, 깊은 우울 속에 도돌이표를 찍고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은 맴돌음, 간접 화법, 감히 내가 보고 듣고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멀찍이에서만 전해들을 수 있는 먼 이야기 등의 전략을 취한다. 제주 4.3과 광주 5.18 학살을 다루는 목소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같은 비극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해야 하는가. 한강은 바깥을 도는 것을, 남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을,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보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신화적 방법을 택한다. 소설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눈'은 새하얗게 세상을 덮는 것, 때로는 거친 눈보라로 몰아치고 때로는 조용히 내려 쌓이는, 어떨 때는 마냥 두렵고 어떨 때는 마냥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삶-특히 시간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 학살에 대한 소설을 쓰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경하는 8월의 염천 아래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창문을 모두 닫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5월 말의 뜨거운 하늘 아래 썩어가야 했던 시신의 자리로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멸-느릿한 자살을 택한다. 그런 경하의 뜨거운 하루 하루에 서늘한 눈송이는 내리지 않는다. 그녀가 삶-시간으로 복귀하는 것은 12월 하순의 어느 날, 인선의 부름으로 시작되며 그 날 드디어 눈이 내린다. '지금 저게, 눈이니?' 라는 인선의 목소리에 창 밖을 보니 소설의 첫문장처럼 '성근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다.'(43쪽)



새를 구하러 가줘. 인선이 경하에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하게 명령한다. 이것은 생에의 명령이다. 숱한 죽음을 목도하고 우울의 나락에 빠져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경하에게 인선은, 제주도 자신의 목공방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을 하얀 앵무새 한 마리를 구하러 가달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쉬지 말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가달라고. 그리고 경하는 쏟아지는 제주의 눈을 만난다. 피할 수 없이 온몸을 후려치는 폭설은 삶의 마지막 단계, 그러니까 거의 임사의 단계다. 그리고 그 단계를 지나 비로소 경하는 인선의 목공방이라는 림보의 세계로 진입한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고, 서울의 병원에 누워 있는 인선이 촛불을 켜드는 곳으로. 새 한 마리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지 못하고 곱게, 곱게, 애도하고 애도하며 얼어붙은 땅 속에 파묻은 경하. 그녀의 곁으로 앵무새 아마는 신비롭게 돌아온다. 절대 나와 몸이 닿지 않도록 신경쓰는 인선은 나에게 어머니와 가족의 슬픈 기록들-1948년과 1960년의 시간들을 펼쳐보인다. 인선이 받쳐드는 촛불을 감히 끈질긴 희망이라고 말해도 될까. 죽음의 언저리까지 갔을 때 기어이 경하를 불러들이는 혼불 같은 불. 그리고 생생하게 뺨에 와닿는 눈의 차가운 감촉.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323쪽) 죽은 자의 뺨에서 눈은 녹지 않는 법. 경하의 피투성이 뺨 위에 내린 눈은 차갑게 스며들어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침내 인선의 촛불이 꺼졌을 때 경하는 말한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325쪽)





그 불꽃으로 끝내 무언가를 응시한다는 것. 차갑게 나뉘어진 눈의 격벽 속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 그 자리에서 경하의 새는 날개를 퍼덕인다. 묶여 있고 묻혀 있던 모든 것을 발굴하는 그 시간 속에서. 땅속에 묻었던 새의 시체가 꿰어놓은 실을 풀고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반짇고리 안쪽에 실로 꿰매어 놓은 오래된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실로 습자지로 꽁꽁 싸매어놓은 기록을 꺼내와 확인한다. 보고,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절대로 과거의 일로 밀어놓지 않으며 경하는 다시 산다. 그래서 한강의 이 적요한 소설은 생각보다 뜨겁고 힘찬 책이며,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누군가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그 누군가를 오래 보고 들으며 같이 아파 하는 사랑. 이 길고 긴 애도는 얼마나 뜨거운 사랑인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랑인가. 끝끝내 잊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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