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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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시종일관 눈, 새, 바다, 촛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한 편의 시처럼 전개된다. 사용하는 언어들만이 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이미지의 활용, 꿈과 환상, 뒤엉켜진 시간과 시점, 난데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목소리들, 논리와 핍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개 등이, 서정적인 읊조림을 갖고 몽환적으로 이어진다. 첫장부터 꿈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게, 사실주의적 기승전결과 논리적이고 분명한 서사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방법에 있어 직선적 정공법 보다는 꿈 속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몽롱함, 깊은 우울 속에 도돌이표를 찍고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은 맴돌음, 간접 화법, 감히 내가 보고 듣고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멀찍이에서만 전해들을 수 있는 먼 이야기 등의 전략을 취한다. 제주 4.3과 광주 5.18 학살을 다루는 목소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같은 비극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해야 하는가. 한강은 바깥을 도는 것을, 남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을,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보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신화적 방법을 택한다. 소설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눈'은 새하얗게 세상을 덮는 것, 때로는 거친 눈보라로 몰아치고 때로는 조용히 내려 쌓이는, 어떨 때는 마냥 두렵고 어떨 때는 마냥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삶-특히 시간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 학살에 대한 소설을 쓰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경하는 8월의 염천 아래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창문을 모두 닫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5월 말의 뜨거운 하늘 아래 썩어가야 했던 시신의 자리로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멸-느릿한 자살을 택한다. 그런 경하의 뜨거운 하루 하루에 서늘한 눈송이는 내리지 않는다. 그녀가 삶-시간으로 복귀하는 것은 12월 하순의 어느 날, 인선의 부름으로 시작되며 그 날 드디어 눈이 내린다. '지금 저게, 눈이니?' 라는 인선의 목소리에 창 밖을 보니 소설의 첫문장처럼 '성근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다.'(43쪽)



새를 구하러 가줘. 인선이 경하에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하게 명령한다. 이것은 생에의 명령이다. 숱한 죽음을 목도하고 우울의 나락에 빠져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경하에게 인선은, 제주도 자신의 목공방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을 하얀 앵무새 한 마리를 구하러 가달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쉬지 말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가달라고. 그리고 경하는 쏟아지는 제주의 눈을 만난다. 피할 수 없이 온몸을 후려치는 폭설은 삶의 마지막 단계, 그러니까 거의 임사의 단계다. 그리고 그 단계를 지나 비로소 경하는 인선의 목공방이라는 림보의 세계로 진입한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고, 서울의 병원에 누워 있는 인선이 촛불을 켜드는 곳으로. 새 한 마리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지 못하고 곱게, 곱게, 애도하고 애도하며 얼어붙은 땅 속에 파묻은 경하. 그녀의 곁으로 앵무새 아마는 신비롭게 돌아온다. 절대 나와 몸이 닿지 않도록 신경쓰는 인선은 나에게 어머니와 가족의 슬픈 기록들-1948년과 1960년의 시간들을 펼쳐보인다. 인선이 받쳐드는 촛불을 감히 끈질긴 희망이라고 말해도 될까. 죽음의 언저리까지 갔을 때 기어이 경하를 불러들이는 혼불 같은 불. 그리고 생생하게 뺨에 와닿는 눈의 차가운 감촉.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323쪽) 죽은 자의 뺨에서 눈은 녹지 않는 법. 경하의 피투성이 뺨 위에 내린 눈은 차갑게 스며들어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침내 인선의 촛불이 꺼졌을 때 경하는 말한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325쪽)





그 불꽃으로 끝내 무언가를 응시한다는 것. 차갑게 나뉘어진 눈의 격벽 속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 그 자리에서 경하의 새는 날개를 퍼덕인다. 묶여 있고 묻혀 있던 모든 것을 발굴하는 그 시간 속에서. 땅속에 묻었던 새의 시체가 꿰어놓은 실을 풀고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반짇고리 안쪽에 실로 꿰매어 놓은 오래된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실로 습자지로 꽁꽁 싸매어놓은 기록을 꺼내와 확인한다. 보고,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절대로 과거의 일로 밀어놓지 않으며 경하는 다시 산다. 그래서 한강의 이 적요한 소설은 생각보다 뜨겁고 힘찬 책이며,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누군가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그 누군가를 오래 보고 들으며 같이 아파 하는 사랑. 이 길고 긴 애도는 얼마나 뜨거운 사랑인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랑인가. 끝끝내 잊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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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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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The Friend)'로 2018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신작 '어떻게 지내요'. 원제 'What are you going through?'는 영어에서 한국어 제목 그대로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삿말이지만 직역을 하면 '당신은 무엇을 겪어내고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2017년 9월에서 시작해 그 이후의 어느 날까지를 종이 위에 기록하는데, 화자가 겪어낸 시간들은 '친구의 죽음을 지켜본 시간들' 이다.


  2017년 9월 셋째 주, 한 남자 대학 교수의 강연장, 암에 걸린 친구의 문병을 갔다가 돌아온 화자가 교수의 강연장에 참석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수는 열렬한 기후변화 운동가이면서 지독한 회의주의자,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으며 그러므로 더 이상의 재생산도 의미가 없다고 믿는 극단적 허무주의자다. "시기적절한 행동은 내면의 평화를 얻으려는 개인의 노력도 아니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태도도 아닌, 임박한 파멸에 대한 광적이면서 과도한 집단적 집착입니다."(23쪽) 라고 말하는 교수의 강연은 이후 소설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는 듯 하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는 희망 없는 치료를 받으며 심한 부작용과 암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대신 안락사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며 화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끝까지 암과 투쟁해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지도 않고, 암 치료 과정을 통해 극기와 내면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생각도 전혀 믿지 않는 친구의 결정은, 역설적이게도 친구 자신이 싫어하는 인물인 '교수'의 주장과도 닿아 보인다. 미래는 이미 공포와 파멸로 정해져 있고 무엇을 해도 가능성이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저 빨리 목숨을 끊는 것-절멸해버리는 것만이 답이라는 이 시니컬함은 이 소설의 주된 화두다.


 화자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뉴잉글랜드의 외진 별장으로 가서 친구의 자살을 돕기로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을 예전 애인이었던 '교수'에게 발설하여, '절대 경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할 것' 이라는 조언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정된 자살의 시간은 점점 미뤄진다.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243쪽) 인간은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한다 - '교수'가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던 그대로. 소설의 뒤로 갈수록 '지연되는 친구의 죽음'은 '지연되는 인류의 멸종'과 겹쳐지며 소설 전체에 우울한 그늘을 남기고 화자는 거의 매일 벤치에 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우울증자의 상태로 변해간다. 그러면서 화자는'늘 그렇듯이 언어란 결국 모든 것을 변조해버릴 것'임을 새삼 되뇌는 화자는, '진실하지 않은 자료, 읽는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문서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라며 이 소설-기록의 집필 자체에 회의한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요컨대 이 책은 오직 죽음과 편집증에 대한 책이며 이 두가지가 화자를 구덩이로 몰고 가는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에 애를 써온 화자를 결국 실패자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이야기다. 하지만 화자는 실패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라고 중얼거리며 끝내 부서지기를 거부한다. 고양이의 죽음, 이웃 할머니 아들의 죽음(할머니의 죽음과도 다르지 않다), 친구의 죽음, 나아가서 세계의 죽음. 소설에 가득한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이며, 하루 하루 늙어가고 죽어가는 몸과 정신에서 비롯된 편집증적 몸부림 또한 함께 흘러넘치는 소설이다. "인류는 죽음 소망에 빠져 있다"라는 소설 속 화자의 말은 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을 듬뿍 받았고 다들 좋아했던 , 고통이 만연한 세계에서 가능한 온갖 특권을 누리며 자란 아이(49쪽)같은 인간은, 인간 정신이 지닌 자기기만의 무한한 능력(56쪽)으로, 죽음에 대해서 그렇듯이 대부분은 나이듦도 부인하며 (65쪽) 살아간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고, 최후에는 예외없이 모두 죽음과 노화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편집증과 우울에 빠져버린다. 예견된 끝장을 끝없이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인 (기후 변화와 탄소 배출 증가 앞에 우리가 그러듯이) 존재가 인간이다.


 다정해보이는 제목과는 다르게 매우 비관적이고 염세적이며, 우울의 흔적이 짙게 뭍어있는 소설이므로 예쁜 표지와 제목에 속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전작 '친구'에서 보여주었던, 시그리드 누네즈의 죽음에 대한 깊은 천착, 죽어가는 누군가를 옆에서 지켜보며 같이 무너져내린다는 것의 처절함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는 단연 추천한다. 요사이 문학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작가의 독특한 관념 세계가 자유로운 스타일의 작법과 어울려 남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는 책이다. 만만찮은 주제 의식이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듯한 서술 방식으로 피어나며, 화자의 자유로운 말하기- 그러나 최후에는 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이 무릎꿇음의 결말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 인디캣 책곳간과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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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 일터에서의 사고와 죽음, 그에 맞선 싸움의 기록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 / 포도밭출판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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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려온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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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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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청춘러브로망. 툭하면 울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대책없이 용감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고 믿는 소녀 감성을 읽기에 나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다.

주인공 설희가 만나 시종일관 도움을 받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더 셜리 클럽의 존재 또한 감동을 주지 못했다. 화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언제나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사랑과 지지와 도움을 주는 '나'의 분신들-모두 셜리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복제, 화자의 욕망의 구현체인 '유일한' 셜리들이 만들어내는 이 완전무결한 천국의 그림은 거대한 클론들의 유토피아를 보는 것처럼 섬뜩했다. 이것은 '연대'가 아니라 '복제' 아닌가. 이것이 연대가 되기 위해서는 설희는 피터, 린다, 도라 같은 '이름 가진 타자' 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확히 그 반대이며, 심지어 설희의 연인인 'S'조차도 셜리와 같은 이니셜을 가졌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셜리'가 되고 만다.

모든 타자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려는 이 나르시즘적 욕망, 나의 복제로서의 그 타자들이 오직 내가 나에게 그러듯, 또 내가 자신에게 필요로 하듯 나를 도와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주고 언제나 위로의 모르핀을 놔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 수동적인 자기함몰의 이야기였다. 성숙한 자아는 나르시즘을 깨고 나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알을 깨고 타자들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걸 피하기 위해선 그저 한없이 리틀, 리틀,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리틀 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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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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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다고 생각하는 기법이, A가 옳고 훌륭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B를 깎아내리는 거다. 많은 불륜 드라마에서 자주 시전되는 기법인 바, A가 바람을 피우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우자 B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식이다. 주위의 어리석고 비열한 속물들을 나열하며 그에 비해 주인공이 얼마나 뛰어나고 지적이고 깨어있는가를 강조하는 스타일. 세상을 선 아니면 악, 좋은 사람 반대편엔 항상 나쁜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 구도를 바탕으로, 독자나 시청자에게 쉽게 다가가고 쉽게 자극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다. 애석하게도 ‘아메리카나’는 바로 이런 스타일을 사용한다.


‘아메리카나’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나기를 꿈꾸는 청춘들의 이야기,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서 각자 좌절을 겪은 후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두 권에 걸쳐 속도감 있게 묘사된다. 캐릭터는 분명하고 서사는 빠르고 힘차다. 이것이 치마만다 아디치에가 갖는 소설적 힘 -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쉽고 강하게 빨려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그러나 쉽고 강하다는 건 언제나 무리수를 바탕으로 하기 쉽다. 치마만다 아디치에는 이야기의 강렬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스트레이트한 전달을 위해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장점을 포기하고 인물의 심층적 내면으로 진입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주인공 A -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시점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고 진단하고 평가한다.


이페멜루와 오빈제 두 인물이 바라보고 서술하는 타인과 세계-B는 매우 단순하며 아주 쉽게 깎아내려진다. 그 시점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절대 다수의 속물과 극소수의 ‘오비 오차’(깨끗한 마음)만이 존재한다. 아디치에가 그리는 여성상을 보면,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사치스럽고 물질 숭배적이다 (이페멜루의 엄마, 친구 라니이누도, 우주 고모). 그리고 그에 대척되는 존재, 위 인물들의 속물성을 폭로해줄 존재로서의 지적이고 자유롭고 우아하며 완전한 여성이 존재한다 (오빈제의 어머니) 아디치에의 이런 이분법적 인물 설정은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도, ‘아메리카나’에서도 반복된다. 어째서 항상 남편 없는 여자 교수, 라는 설정이 등장할까? 여자는 창녀 아니면 성녀라고 하는 구태의 표현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여자는 무능한 속물 아니면 고고한 교양녀 둘 중 하나일 뿐이고 주인공 이페멜루는 두 인물형 사이를 방황하다 분열된다.


악하고 어리석은 인물들의 대척점에 서 있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인 ‘남편 없는 여자 교수’. 남자들의 세계는 더 하다. 이 소설에서 ‘오비 오차’를 가진 남자는 오빈제 뿐이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세속적인 성공이나, 각종 허세 (블레인의 지적&도덕적 우월감도 포함) 에 절어 있는 인물들이고, 유일하게 조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백인 남성 나이젤은 훗날 오빈제의 백인 페르소나로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한다 - 즉 그는 ‘백인 오빈제’가 된다.


이들이 갖는, 또는 작가가 이들에게 부여하는 지적&도덕적 특권은 대단해서 심지어 선량한 고용주 킴벌리나 흑인 인권운동가 블레인조차도 이들에 비하면 우월감에 젖은 속물이 되고 만다. 특히 블로거 이페멜루가 보여주는 ‘통찰력’은 대단하다. 소설 속 이페멜루의 블로그 포스트들은 참 속시원한 글이긴 하지만 그녀의 친구 라니이누도의 지적처럼 ‘스스로의 온당함에 대한 확신’ (2권 p.293)과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면 자신이 이미 되어버렸을까봐 두려운 사람으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권 p.296)는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두 권의 책 내내 반복되는 세계에 대한 혹독한 비판적 시선들은 ‘나’를 남과 비교하고, 혹시나 내가 열등한 존재라는 자각이 들까봐 비교 결과를 기어이 메타적 시선에 기반한 ‘우월감’으로 포장한 결과로 보인다. 즉 겉으로는 내가 저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그들보다 못하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어두운 마음이 있으니 애써 그걸 부정하기 위해 과장되게 반대편을 깎아내리고 내가 옳다고, 내가 맞다고, 내가 더 제대로고 더 통찰력 있고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월감’, 이것이 이페멜루를 위안해주는 모르핀이며 미국 속에서 꺾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코카인이다.


아디치에가 그리는 이페멜루와 오빈제는 이 똥통 같은 세상에 유일하게 깨끗하고 지적이며 통찰력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이 가여운 커플은 어린 시절엔 똥통 나이지리아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청춘기에는 가혹한 지배국 - 내가 사랑하지만 결코 나를 사랑해주지는 않는 잔인한 대타자 - 미국과 영국에게 상처받는다. 나이지리아는 참을 수 없는 속물성의 세계이고 미국과 영국은 우러러볼 수밖에 없지만 결코 내가 편입할 수 없는 고아한 문명 세계이다. 문명 세계에서 가장 밑바닥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그 세계에 끼어들 수 없다. 이페멜루는 매춘을 허용하여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얻고, 똥 치우기를 거부한 오빈제는 결국 영국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이페멜루는 분열된다. 왜? 속물적인 나이지리아 세계에서 나는 그래도 다르다는 지적&도덕적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왔던 이페멜루가 돈 백 달러에 매춘을 하고 남자를 잘 만나 영주권을 얻는 행동 - 장군의 첩이 되어 부유한 삶을 누린 우주 고모나 그녀의 흔한 친구들과 같은 나이지리아 속물들의 행동을 스스로 수행한 순간, 그녀가 우울과 자기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기가 형성해 놓은 자아상과 스스로가 어긋남을 알았을때 인간은 우울과 분열을 느끼니까.


이 책을 한 줄 요약하자면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나이지리아 상류층 자녀들의 우울증과 고향으로의 도피’ 라고 할 수 있겠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이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디치에의 이 소설에도 또한 ‘성장’ 은 없다. ‘오비 오차’의 긍지와 자존심을 안고 살아가던 가엾은 어린 커플이 세상의 호된 맛을 본 후, 결국에는 ‘돌아와’ ‘재결합하는’ 이 이야기에는 어떤 성장도 없고 그들은 우울과 분열의 결과로 고향으로 ‘퇴행’했을 뿐이다. 뛰어난 아이로 평가받던 디케의 자살기도, 거듭 불행한 길만을 선택하는 이페멜루의 기행, 그런 이페멜루와의 사랑을 끊어내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있는 인물 오빈제의 우유부단함. 이 모든 것이 바로 그것, ‘자신이 뛰어난 줄 알고 살아왔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 후 뒤이어 오는 우울과 분열’ 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지리멸렬하며 자기파괴적인 방어 기제를 사용해 후퇴한다. 똥통 같은 세상에 배를 대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강물 위를 떠돌며 자신들만의 위태로운 사랑, 그 유리로 만든 성 안에 칩거하는 이 어리고 가여운 커플을 보며 내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오빈제의 아내 코시는 그토록 촌스럽고 보수적인 인물이었어야 했고, 이페멜루의 남자친구 블레인은 도덕적 우월감에 절어 있는 오만하고 가부장적인 남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A를 옹호하기 위해 B를 깎아내리는 건 쓰기에도 쉽고 읽기에도 쉽지만, 너무나 쉽고 단순해서 위험하고 조잡한 기법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카레닌을 나쁜 남자로 만들지 않았고 심지어 브론스키와 오블론스키조차 숨막히게 매력적이고 다정한 남자들로 그려냈다.




* p.s.

두 권의 아디치에 소설을 읽고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 큰 흥미가 생겨 화상영어 시간이 나이지리아 여성 튜터 두 명을 검색해 각각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내가 아디치에를 읽었다고 말하자 그들은 '꺅-' 소리를 지를 정도로 좋아했고 곧바로 '치누아 아베체'를 아느냐, 그의 소설 'Things fall apart' 를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었고 많은 조언을 해주어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아디치에 소설 속에 나오는, 은수카의 나이지리아 대학교를 졸업한 튜터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녀는 에누구 출신의 이보족 아가씨였다. 그녀는 나이지리아의 수도가 라고스도 은수카도 아닌 아부자라는 걸 가르쳐 주었고, 에누구 인구의 99.9%는 이보족이며, '이보족'이 아니라 '입뽀족'이라고 나의 발음을 수정해주었다. 큰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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