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시종일관 눈, 새, 바다, 촛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한 편의 시처럼 전개된다. 사용하는 언어들만이 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이미지의 활용, 꿈과 환상, 뒤엉켜진 시간과 시점, 난데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목소리들, 논리와 핍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개 등이, 서정적인 읊조림을 갖고 몽환적으로 이어진다. 첫장부터 꿈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게, 사실주의적 기승전결과 논리적이고 분명한 서사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방법에 있어 직선적 정공법 보다는 꿈 속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몽롱함, 깊은 우울 속에 도돌이표를 찍고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은 맴돌음, 간접 화법, 감히 내가 보고 듣고 안다고 말할 수 없고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멀찍이에서만 전해들을 수 있는 먼 이야기 등의 전략을 취한다. 제주 4.3과 광주 5.18 학살을 다루는 목소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같은 비극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해야 하는가. 한강은 바깥을 도는 것을, 남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을,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보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신화적 방법을 택한다. 소설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눈'은 새하얗게 세상을 덮는 것, 때로는 거친 눈보라로 몰아치고 때로는 조용히 내려 쌓이는, 어떨 때는 마냥 두렵고 어떨 때는 마냥 아름답고 고요한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삶-특히 시간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 학살에 대한 소설을 쓰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경하는 8월의 염천 아래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창문을 모두 닫고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5월 말의 뜨거운 하늘 아래 썩어가야 했던 시신의 자리로 자신을 위치시키며 자멸-느릿한 자살을 택한다. 그런 경하의 뜨거운 하루 하루에 서늘한 눈송이는 내리지 않는다. 그녀가 삶-시간으로 복귀하는 것은 12월 하순의 어느 날, 인선의 부름으로 시작되며 그 날 드디어 눈이 내린다. '지금 저게, 눈이니?' 라는 인선의 목소리에 창 밖을 보니 소설의 첫문장처럼 '성근 눈발이 흩어지고 있었다.'(43쪽)



새를 구하러 가줘. 인선이 경하에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강하게 명령한다. 이것은 생에의 명령이다. 숱한 죽음을 목도하고 우울의 나락에 빠져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경하에게 인선은, 제주도 자신의 목공방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을 하얀 앵무새 한 마리를 구하러 가달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쉬지 말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가달라고. 그리고 경하는 쏟아지는 제주의 눈을 만난다. 피할 수 없이 온몸을 후려치는 폭설은 삶의 마지막 단계, 그러니까 거의 임사의 단계다. 그리고 그 단계를 지나 비로소 경하는 인선의 목공방이라는 림보의 세계로 진입한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고, 서울의 병원에 누워 있는 인선이 촛불을 켜드는 곳으로. 새 한 마리의 죽음을 하찮게 여기지 못하고 곱게, 곱게, 애도하고 애도하며 얼어붙은 땅 속에 파묻은 경하. 그녀의 곁으로 앵무새 아마는 신비롭게 돌아온다. 절대 나와 몸이 닿지 않도록 신경쓰는 인선은 나에게 어머니와 가족의 슬픈 기록들-1948년과 1960년의 시간들을 펼쳐보인다. 인선이 받쳐드는 촛불을 감히 끈질긴 희망이라고 말해도 될까. 죽음의 언저리까지 갔을 때 기어이 경하를 불러들이는 혼불 같은 불. 그리고 생생하게 뺨에 와닿는 눈의 차가운 감촉.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323쪽) 죽은 자의 뺨에서 눈은 녹지 않는 법. 경하의 피투성이 뺨 위에 내린 눈은 차갑게 스며들어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마침내 인선의 촛불이 꺼졌을 때 경하는 말한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325쪽)





그 불꽃으로 끝내 무언가를 응시한다는 것. 차갑게 나뉘어진 눈의 격벽 속에서 기어코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 그 자리에서 경하의 새는 날개를 퍼덕인다. 묶여 있고 묻혀 있던 모든 것을 발굴하는 그 시간 속에서. 땅속에 묻었던 새의 시체가 꿰어놓은 실을 풀고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반짇고리 안쪽에 실로 꿰매어 놓은 오래된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실로 습자지로 꽁꽁 싸매어놓은 기록을 꺼내와 확인한다. 보고,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을 절대로 과거의 일로 밀어놓지 않으며 경하는 다시 산다. 그래서 한강의 이 적요한 소설은 생각보다 뜨겁고 힘찬 책이며,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인 것이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누군가에게서 돌아서지 않고, 그 누군가를 오래 보고 들으며 같이 아파 하는 사랑. 이 길고 긴 애도는 얼마나 뜨거운 사랑인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랑인가. 끝끝내 잊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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