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나 1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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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다고 생각하는 기법이, A가 옳고 훌륭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B를 깎아내리는 거다. 많은 불륜 드라마에서 자주 시전되는 기법인 바, A가 바람을 피우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배우자 B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식이다. 주위의 어리석고 비열한 속물들을 나열하며 그에 비해 주인공이 얼마나 뛰어나고 지적이고 깨어있는가를 강조하는 스타일. 세상을 선 아니면 악, 좋은 사람 반대편엔 항상 나쁜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 구도를 바탕으로, 독자나 시청자에게 쉽게 다가가고 쉽게 자극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다. 애석하게도 ‘아메리카나’는 바로 이런 스타일을 사용한다.


‘아메리카나’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나기를 꿈꾸는 청춘들의 이야기, 그리고 미국과 영국에서 각자 좌절을 겪은 후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두 권에 걸쳐 속도감 있게 묘사된다. 캐릭터는 분명하고 서사는 빠르고 힘차다. 이것이 치마만다 아디치에가 갖는 소설적 힘 -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쉽고 강하게 빨려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그러나 쉽고 강하다는 건 언제나 무리수를 바탕으로 하기 쉽다. 치마만다 아디치에는 이야기의 강렬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스트레이트한 전달을 위해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장점을 포기하고 인물의 심층적 내면으로 진입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주인공 A -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시점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고 진단하고 평가한다.


이페멜루와 오빈제 두 인물이 바라보고 서술하는 타인과 세계-B는 매우 단순하며 아주 쉽게 깎아내려진다. 그 시점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절대 다수의 속물과 극소수의 ‘오비 오차’(깨끗한 마음)만이 존재한다. 아디치에가 그리는 여성상을 보면, 대다수의 여자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사치스럽고 물질 숭배적이다 (이페멜루의 엄마, 친구 라니이누도, 우주 고모). 그리고 그에 대척되는 존재, 위 인물들의 속물성을 폭로해줄 존재로서의 지적이고 자유롭고 우아하며 완전한 여성이 존재한다 (오빈제의 어머니) 아디치에의 이런 이분법적 인물 설정은 ‘보라색 히비스커스’에서도, ‘아메리카나’에서도 반복된다. 어째서 항상 남편 없는 여자 교수, 라는 설정이 등장할까? 여자는 창녀 아니면 성녀라고 하는 구태의 표현처럼, 아디치에 소설에서 여자는 무능한 속물 아니면 고고한 교양녀 둘 중 하나일 뿐이고 주인공 이페멜루는 두 인물형 사이를 방황하다 분열된다.


악하고 어리석은 인물들의 대척점에 서 있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인 ‘남편 없는 여자 교수’. 남자들의 세계는 더 하다. 이 소설에서 ‘오비 오차’를 가진 남자는 오빈제 뿐이다. 다른 남자들은 모두 세속적인 성공이나, 각종 허세 (블레인의 지적&도덕적 우월감도 포함) 에 절어 있는 인물들이고, 유일하게 조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백인 남성 나이젤은 훗날 오빈제의 백인 페르소나로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한다 - 즉 그는 ‘백인 오빈제’가 된다.


이들이 갖는, 또는 작가가 이들에게 부여하는 지적&도덕적 특권은 대단해서 심지어 선량한 고용주 킴벌리나 흑인 인권운동가 블레인조차도 이들에 비하면 우월감에 젖은 속물이 되고 만다. 특히 블로거 이페멜루가 보여주는 ‘통찰력’은 대단하다. 소설 속 이페멜루의 블로그 포스트들은 참 속시원한 글이긴 하지만 그녀의 친구 라니이누도의 지적처럼 ‘스스로의 온당함에 대한 확신’ (2권 p.293)과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면 자신이 이미 되어버렸을까봐 두려운 사람으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권 p.296)는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두 권의 책 내내 반복되는 세계에 대한 혹독한 비판적 시선들은 ‘나’를 남과 비교하고, 혹시나 내가 열등한 존재라는 자각이 들까봐 비교 결과를 기어이 메타적 시선에 기반한 ‘우월감’으로 포장한 결과로 보인다. 즉 겉으로는 내가 저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그들보다 못하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어두운 마음이 있으니 애써 그걸 부정하기 위해 과장되게 반대편을 깎아내리고 내가 옳다고, 내가 맞다고, 내가 더 제대로고 더 통찰력 있고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월감’, 이것이 이페멜루를 위안해주는 모르핀이며 미국 속에서 꺾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코카인이다.


아디치에가 그리는 이페멜루와 오빈제는 이 똥통 같은 세상에 유일하게 깨끗하고 지적이며 통찰력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이 가여운 커플은 어린 시절엔 똥통 나이지리아에서 적응하지 못했고, 청춘기에는 가혹한 지배국 - 내가 사랑하지만 결코 나를 사랑해주지는 않는 잔인한 대타자 - 미국과 영국에게 상처받는다. 나이지리아는 참을 수 없는 속물성의 세계이고 미국과 영국은 우러러볼 수밖에 없지만 결코 내가 편입할 수 없는 고아한 문명 세계이다. 문명 세계에서 가장 밑바닥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그 세계에 끼어들 수 없다. 이페멜루는 매춘을 허용하여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얻고, 똥 치우기를 거부한 오빈제는 결국 영국에서 추방된다. 그리고 이페멜루는 분열된다. 왜? 속물적인 나이지리아 세계에서 나는 그래도 다르다는 지적&도덕적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왔던 이페멜루가 돈 백 달러에 매춘을 하고 남자를 잘 만나 영주권을 얻는 행동 - 장군의 첩이 되어 부유한 삶을 누린 우주 고모나 그녀의 흔한 친구들과 같은 나이지리아 속물들의 행동을 스스로 수행한 순간, 그녀가 우울과 자기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기가 형성해 놓은 자아상과 스스로가 어긋남을 알았을때 인간은 우울과 분열을 느끼니까.


이 책을 한 줄 요약하자면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나이지리아 상류층 자녀들의 우울증과 고향으로의 도피’ 라고 할 수 있겠다.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이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디치에의 이 소설에도 또한 ‘성장’ 은 없다. ‘오비 오차’의 긍지와 자존심을 안고 살아가던 가엾은 어린 커플이 세상의 호된 맛을 본 후, 결국에는 ‘돌아와’ ‘재결합하는’ 이 이야기에는 어떤 성장도 없고 그들은 우울과 분열의 결과로 고향으로 ‘퇴행’했을 뿐이다. 뛰어난 아이로 평가받던 디케의 자살기도, 거듭 불행한 길만을 선택하는 이페멜루의 기행, 그런 이페멜루와의 사랑을 끊어내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 있는 인물 오빈제의 우유부단함. 이 모든 것이 바로 그것, ‘자신이 뛰어난 줄 알고 살아왔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안 후 뒤이어 오는 우울과 분열’ 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지리멸렬하며 자기파괴적인 방어 기제를 사용해 후퇴한다. 똥통 같은 세상에 배를 대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강물 위를 떠돌며 자신들만의 위태로운 사랑, 그 유리로 만든 성 안에 칩거하는 이 어리고 가여운 커플을 보며 내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오빈제의 아내 코시는 그토록 촌스럽고 보수적인 인물이었어야 했고, 이페멜루의 남자친구 블레인은 도덕적 우월감에 절어 있는 오만하고 가부장적인 남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A를 옹호하기 위해 B를 깎아내리는 건 쓰기에도 쉽고 읽기에도 쉽지만, 너무나 쉽고 단순해서 위험하고 조잡한 기법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선택을 옹호하기 위해 카레닌을 나쁜 남자로 만들지 않았고 심지어 브론스키와 오블론스키조차 숨막히게 매력적이고 다정한 남자들로 그려냈다.




* p.s.

두 권의 아디치에 소설을 읽고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 큰 흥미가 생겨 화상영어 시간이 나이지리아 여성 튜터 두 명을 검색해 각각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내가 아디치에를 읽었다고 말하자 그들은 '꺅-' 소리를 지를 정도로 좋아했고 곧바로 '치누아 아베체'를 아느냐, 그의 소설 'Things fall apart' 를 읽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문학과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었고 많은 조언을 해주어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아디치에 소설 속에 나오는, 은수카의 나이지리아 대학교를 졸업한 튜터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녀는 에누구 출신의 이보족 아가씨였다. 그녀는 나이지리아의 수도가 라고스도 은수카도 아닌 아부자라는 걸 가르쳐 주었고, 에누구 인구의 99.9%는 이보족이며, '이보족'이 아니라 '입뽀족'이라고 나의 발음을 수정해주었다. 큰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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