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위한 조시
- 외국에서 변을 당한 훈에게
1. 입관식
어릴 때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대학에 가서는 작은 아랫방을 나누어 쓰고
장가든 다음에는 외국에까지 나를 따라와
여기 같은 동네 바로 뒷길에 살던
내 동생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
동생이고 친구고 내 의지처였습니다.
싸움 한번도, 목소리 한번도 높이지 않은
들풀처럼 싱글거리며 착하게 살던 내 단짝,
하느님, 당신밖에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관을 덮고 나면 내일 하늘이 열리고
내일 지나면 이 땅에서 지워질 이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귀염둥이 내 자식이라고 받아주세요.
2.고잉 홈
고잉 홈
(너 몰랐지? 여기서는 관에다가
고잉 홈이라는 말을 많이 새겨넣는구나.)
네가 누울 관을 고르면서
줄줄이 늘어선 관을 공연히 어루만지면서
자꾸 읽게 된다. 고잉 홈.
그래, 너도 결국 집에 가는 거구나.
태평양 너머의 고향이든
저 높은 그 위의 고향이든
잘 가라, 아무 말 안 해도
나는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안다.
고잉 홈.
잘 있어, 형.
나는 집에 돌아가는 거래
너무 보고 싶어하지 마, 형.
네 쓸쓸하게 빈 목소리,
여기저기서 기막히게 들린다.
3.영화[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랜만에 같이 본 영화가 끝난 뒤
너는 술까지 한잔 사면서 내 건강 걱정해주고
(자식을 끝까지 믿은 아버지는 감옥에서 눈감고)
좋아했던 영화는 어디서 아직 상영중인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는 평생을 마감하고
아버지의이름으로 너를 보내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슬픔을 참아내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 너를 다시 만날 것 믿는다.
4.비 오는 나라
하루종일 봄비가 의심하는 세상을 적신다.
사람이야 언제 어디서고 죽게 마련이지만
외국의 봄날 흐리게 허물어진
동생이 저녁까지 봄비 되어 울고 있다.
비는 내려서 땅에 스며들고
스며서 땅 사이로 사라지는 침묵.
해직당한 고국을 그리워하던
적막 강산이 눈물 사이로 보인다.
온몸이 젖어서 두 눈을 크게 뜨는 너.
(혹은, 나.)
비는 왜 이렇게 소리치며 밤새 오는지.
빗소리 듣다가 풋잠 잠시 들고
또 언뜻 잠 깨어 다시 듣는 빗소리
집 밖의 사방에는 벌써 수상한 미명.
춥다.
너도 춥지?
5. 맑은 날의 얼굴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밝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번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번진다.
6. 있는 것이 안 보이는
네가 잠들고 싶은 곳은 너무 멀어서
외국 땅에 너를 묻고 이를 물지만
땅이야 뭐 다를 리가 없겠지
질소와 탄소와 뭐 그런 것들-
그러나 어째서 너가 땅만이겠느냐.
너는 죽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지만
너는 웃고 있겠지, 나를 놀리면서
형, 사실은 네가 죽고 내가 산 거야.
그렇지, 그렇게 유리창같이 환하게
너는 그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산 것과 죽은 것이 서로 보이는구나.
없는 것이 보이는 무지개같이
있는 것이 안 보이는 네 혼백같이-
7. 뱃길
혼자 물가에 왔다.
추운 동네의 깊은 물은
통곡같이 밀려가고 밀려오면서
파도 높이 흰 목숨을 패대기친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지 않는
못다 끝낸 네 몸짓 알아듣는다.
네 눈자위 점점 젖어오고
내 살은 천천히 언다.
상처투성이의 내 목숨이지만
너 가는 뱃길에 동무 되어주랴?
지국총, 지국총,
주름살투성이의 내 목숨이지만
너 가는 뱃길에 흥이 되어주랴?
지국총, 지국총,
요단 강인지, 천년 전의 한강인지
깊고 긴 강 건너에 눈을 주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네가 떠난 길.
8. 혹시 미시령에
동규형 시집 미시령인가 하는 것 좀 빌려줘,
너랑 마지막 나눈 말이 이 전화였구나.
나도 모르는 곳, 너와 내 말이 끝난 곳,
강원도 어디 바람 많은 곳인 모양이던데.
요즈음 네 무덤가에서 슴슴한 바람을 만나면
내가 몇 번을 잊어버리고 빌려주지 못한 미시령,
혹시 그곳에 네가 혼자 찾아간 것은 아닐까.
내년쯤 일시 귀국을 하면 꼭 찾아가봐야지,
네가 혹시 그 바람 속에 섞여살고 있을는지,
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바람만 만나게 되면
흔들리는 그거라도 옷자락에 묻혀와야지,
그 바람 털어낼 때마다 네 말이 들리겠지,
내 시를 그렇게 좋아해준, 너는 그러겠지,
형, 나도 잘 알아듣게, 쉽고 좋은 시 많이 써,
이제 너는 죽고 나는 네 죽음을 시쓰고 있구나.
세상 사는 일이 도무지 어처구니없구나.
시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도 하염없구나.
9. 조화
아직 비석도 세우지 못한 네 무덤
꽂아놓은 조화는 아름답구나.
큰비 온 다음날도, 불볕의 며칠도
조화는 쓰러지지 않고 웃고 있구나.
무심한 모습이 죽지 않아서 좋구나.
향기를 남기지 않아서 좋구나.
나는 이제 살아 있는 꽃을 보면
가슴 아파진다.
며칠이면 시들어 떨어질 꽃의 눈매
그 눈매 깨끗하고 싱싱할수록
가슴 아파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아프다.
10. 청량리 꿈
책방에 들렀더니 네가 책을 읽고 있더구나. 뒤돌아
서서 책만 열심히 읽기에 긴가민가 너를 불렀더니 태
연스럽게 고개를 들더구나. 여전히 건강한 얼굴로 나
를 반기더구나. 반가웠다, 정말.
나는 급한 마음에 우선 물었지. 너 지금 도대체 어
디에 살고 있는 거냐? 청량리! 청량리? 그래도 네 식
구들한테는 소식을 알려야지. 아무도 네가 이렇게 살
아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단다. 청량리?
형, 나도 알아. 그렇지만 이제 나한테 미국 이야기
는 하지 마. 나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을 거야. 편
지도 안 쓰고 전화도 안 할 거야. 형이 그냥 잘살고
있더라고만 전해줘. 그래, 그래. 그렇게 전하구말구.
그래, 청량리면 어떻고 어디면 어떠냐.
문득 잠이 깨고 아쉬운 마음 몸을 저리게 하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이던 너를 보았으니 좋구나. 잘살아
라, 어디서든-한새벽의 한정 없는 눈물은 내가 몰
래 닦으마. 잘살아라, 어디서든-늪 깊은 내 낙담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마.
11. 남은 풍경
새 한 마리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작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가 날아가보린 후에도 나뭇가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풍경이 혼자서 어두워집니다.
이슬의 눈 (마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