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다면. 그러면 마음도 더 편하게 어디론가 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많은 걸 쌓아두고 살고 있는 걸까. 악기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른 곳으로 가서 살게 되면 지금처럼 많은 짐을 만들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냥 또 쉽게 떠날 수 있게 지내야겠습니다. 그러면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는 데 더 자유롭지 않을까요. (윤석)-122쪽
이곳에 10년, 20년을 산 것도 아니고, 고국에서 쫓겨나듯 오거나 고국이 싫어서 망명을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여태까지 해보지 않은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고 자진해서 온 길이었는데... 그러다가 굳이 중심에 있는 이유 하나를 끌어내보았는데, 그동안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20대 말과 30대 초반의 외국생활 동안 저의 내부에 끊임없이 쌓여온 어떤 내상이 이젠 역으로 서서히 저를 무너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가진단을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시 한 대목처럼 키 큰 서양 사람들을 당해내려고 '목을 너무 길게 빼'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윤석)-164-165쪽
이제는 준비가 잘 되었으니 귀국을 하기로 마음먹고 고국의 모교를 방문했으며, 모교 부총장님과 의료원장님의 분에 넘치는 환영과 제안을 받았지요. 그러나 한 가지 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고국을 떠나기 직전 군인사법 94조인가, 군인이 정치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정보부에 끌려가 혼이 단단히 났을 때, 그때 절대로 다시 고국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던 그들과의 무서운 약속이었지요. 그러나 실제로 짐을 싸고 돌아갈 준비를 하던 내 다리를 잡은 것은 한국일보 기자였던 내 남동생이 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고국을 떠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문리대 학생 시절부터 신문밖에 모르던 내 동생이 7.4공동성명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젖먹이를 데리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동생 가족의 보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부양가족이 많아졌고 그 후에는 이런 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하면서 귀국을 완전히 포기하고 '바람의 말'이니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같은 시를 혼자 울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종기)-168쪽
시월 중순부터 다음 해 4월 말 정도까지는 플로리다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이 시기 때문에 이곳 사는 사람은 여름의 살인적 더위를 참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거의 매일 청명이고 바삭하게 따뜻한 날씨입니다. (마종기)-176쪽
왜 시를 공부하다 못해 전공까지해야 하는 건지 역시 알 수가 없네요. 외람되지만 그런 시각들은 결국 제도권 시인들의 아집, 폐쇄성, 과도한 아카데미즘이 아닐까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전공하고 등단하지만, 시에 목이 마를 때마다 서점에서 새로운 시들을 갈급하듯 찾아보지만 몇 편 읽기도 전에 한숨 쉬며 시집을 닫는 횟수가 더 많은 저로서는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시를 읽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요. (윤석)-215쪽
저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음악도 마음껏 하고, 고국의 음식도 마음껏 먹고, 우리나라 말로 말하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살기 위해 돌아갑니다. 지금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고 슬픈 소식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껏 멀리서 듣고 보아온 소식들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저는 너무 바쁘고 또 멀리에만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 소식들 한가운데에서 부대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거리에서, 투표함 앞에서, 식당에서, 술집에서, 집 안에서, 운동장 안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지요. (윤석)-216쪽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려 하지 않는 자들은 정치든 경제든 교육이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죄악입니다. 세대가 지나 아이들이 죗값을 치를 것이고 우리나라에는 허약하고 온통 '경쟁'의 망령과 '힘'만을 쫓아가는, 문화는 실종된 나라가 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음악은, 시는, 과학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자란 재주로 이런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밖에 없지요. 12년간 공학자로 살아왔지만, 공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위로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남은 하나, 음악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의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경쟁과 천박한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다면.. (윤석)-222-223쪽
언젠가 윤석군이 음악 때문에 따로 공부는 안 하겠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나도 그 근거를 이해합니다. 왜냐면 나도 시 쓰는 공부를 따로 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오래해 오고 있으니까요. 요즈음의 좋다는 시를 보면 좀 껄끄러운 공부의 흔적이 많이 보이곤 하지요. 공연히 시의 모양새를 위해 단어를 못 알아듣게 뒤틀어버리기도 하고 어려운 퍼즐을 만들기도 하지요. 상징과 알레고리를 곳곳에 지뢰같이 묻어 놓고 의미가 깊은 시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마종기)-226쪽
우리가 예술가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자유로워진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온전한 자유를 알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 자유 사고에서만 우리는 예술의 진정한 힘을 보고 느끼고 또 즐기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기자기한 퍼즐도 상징도 자유혼의 오체투지가 없이는 우리를 흔들고 신음하게 하는 살아있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나는 믿고 삽니다. (마종기)-226쪽
내가 가톨릭이어서인지, 아니면 멀리 살아서인지 서울의 한 일간신문이 집요하게 내게 추모시를 쓰라고 독촉을 했지요. 헌데 나는 그 부탁을 거절 했어요. 그 이유는 물론 내가 실력이 없어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지요. 물론 내가 고국에 있던 60년대 초에는 옳지 못한 권위주의에 대항하다가 쇠고랑도 차고 포승에도 묶이고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중앙정보부의 지시가 징역 2년형이라는 귀띔을 받고 아무 소리 안 하고 외국에 나가 살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리고 그것을 수십 년 지켰어요. 그러니 내가 민주화라는 말 앞에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추기경님은 당신을 스스로 '바보'라 칭하시고 '고맙습니다.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지요. 그런 '바보'앞에서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마종기)-231쪽
당분간 외국에 나가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 앞에서 이런 말씀 드리려니까 우습기도 하지만, 한동안은 영화도 외국영화는 보고 싶지 않은 정도지요. 여행도 외국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요. 유럽에 있으면서 미국하고는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아요. 기본적인 모든 것, 집밖에 나가서 부딪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였지요. 미처 인식을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보니 항상 긴장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익숙한 말, 냄새, 바람에 푹 빠져서 지내고 싶을 따름이예요. (루시드폴)-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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