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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처럼 글쓰기.

정희진 선생님처럼, 나역시 안다는 것은 곧 상처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본인이 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사회적 가해자의 위치에 서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분명 녹록치 않은 힘겨운 일이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자신이 절대적이고 은밀한 약자였음을 인지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몇 번을 겪어도 내내 가슴 시리는 경험이다.
앎이라는 건 견고했던 자신의 내벽에 균열을 내는 일이고, 그것은 필연의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 모든 예견된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려는 노력을,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진보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나는 어제 새벽, 일명 ‘애호박 게이트‘를 지켜보면서 유아인은 스스로 나아지기를 포기한 인간이구나, 생각했다.
유아인은 자신이 늘 그렇게 타파하고 싶어했던 억압의 역사를, 맥락을, 마주보고 반성하고 성찰하길 포기했다.
표면의 언어만으로 약자의 운동을 평가하고 재단했다. 비겁하게.
그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증오‘의 맥락을 뜯어보지 않아도 되는, 이해를 시도해보지 않아도 되는, 그 권력은 어디에서 오나?
수 백년을 일방적인 약자로 살아왔던 이들에게 증오를 철회하고 그저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그 권력은 어디서 오나?

나는 그 권력이 이 모든 차별과 억압의 테두리 밖에 서있는 그의 몸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진짜‘와 ‘가짜‘를 (감히)구분하는 검증의 시선 속에 젠더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가‘란, 보통 권력의 상위계급에 속한 이들에게 허락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모든 운동의 원동력은 언제나 분노와 증오였다.
참다못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가 거세된 도덕적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억압이고 혐오다.
당신이 허락하는 선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운동을 인정하겠다는 태도가 바로 당신의 기득권을 증명한다.

유아인의 진짜 속내를, 저의를(만약 그런게 존재한다면말이지만..) 나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토록 일침 날리고 싶어했던 세력의 무한지지를 받게 된 지금, 당신은 정말 만족하냐고 묻고 싶다. 니가 하고 싶었던 말과 행동의 결과가 겨우 이것이냐고 묻고 싶다.
더불어, 전역증까지 만들어가며 유아인에게 ‘까방권‘을 선물하는 남성들에게도 묻고 싶다.
너희에게 군대란 결국 여성을 배척하는 원초적 경험의 상징일 뿐인 거냐고.

남성들(적어도 내가 마음으로 아꼈던 내 지인들)이여, 제발 그에게 우상적 이미지를 씌우지 말자. 동의하지 말자. 응원은 더더욱 하지 말자.

유아인은 그저 이해를 노력하지 않는,
반성을 노력하지 않는,
도태된 또 한 명의 한국 남자(줄이지 않았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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