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9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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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다’는 말이 위화감이 없고 당연하다는 뜻으로 통용된다는 점을 유념했을 때, 아스팔트킨트에게 자연이란 이제 도시다. 우리 세대에게 향수는 더 이상 들녘이나 벌판에서 오지 않는다. 그리움은 문방구 앞 오락기나 비디오 대여점 같은 애매한 디지털 문물로 옮겨갔다. 하지만 나는 촌스러운 동네에서 할머니 손을 타며 자랐다. 시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시라 치기엔 민망한 어중간한 곳이 바로 우리 동네였다. 마을 같은 동네였다.

집집마다 뒷산이 있었다. 숲에 난 길을 조금 걸으면 우리 집이 경작하던 밭이 몇 뙈기 나왔다. 조부모는 원래 농사를 짓는 분들이셨다. 수몰지구로 선정된 그네들 고향에서 보상금을 받고 대전으로 나와 다른 일을 찾았지만 본디 사람은 땅을 부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시골 어른 특유의 신념 비슷한 고집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부모는 조부모네 집 2층에 얹혀살고 있었다. 그 오래된 이층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장가못간 삼촌 둘에 엄마 아빠, 나와 동생까지 8명이 방방마다 빼곡히 차들어 살았다. 그리하여 낮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체르니 쳐대다 저녁에는 할머니 따라 밭에 가 고랑을 뒤적거리는, 그런 묘한 유년이 내겐 있는 것이다. 밭에 나갔다 간신히 집에 돌아오면 마당을 돌볼 차례였는데, 할머니는 감, 앵두, 참다래, 매실까지 좁은 마당을 참 알뜰히도 썼다. 그늘진 귀퉁이에는 참나무 원목을 일고여덟 개 세워두고 표고를 키웠고 사나흘에 한번 씩 바닥이 흥건히 젖도록 물주는 게 내 일이었다.

꼭 흙 만지는 일이 아니더라도 유년을 떠올렸을 때 퍼뜩 떠오르는 이미지는 일 나간 어른들 기다리며 집에서 홀로 포슬포슬한 찐감자를 먹던 어린 내 모습이다. 창밖을 내다보면 온통 물방울 맺힌 잎사귀들이었다. 축축하지만 포근했던. 빗소리 들리던.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고독.
아무튼 산골소녀도 아닌 내가 박완서가 그리는 풀과 초록에 대해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배경 덕이겠다.

『싱아』는 훌륭한 세태소설이면서 자전소설이고 성장소설이면서 마침내 여성소설이기까지 하다. 박완서가 여성이라는 의식을 가진 여성으로서 굴곡진 한국역사를 그대로 통과해 성장했으며 근대화와 전쟁이라는 시대상황을 조밀하게 복원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본인의 경험이고 어디부터가 픽션의 첨가인지 경계는 불분명하지만 소설은 화자인 박완서가 피난으로 휑해진 동네를 바라보며 끝난다. 글을 쓰겠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어쩌면 모든 글쓰기의 시작은 목격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관찰자가 아닌 증인으로 세우는 그런 작가를 나는 좋아한다. (그것이 자기의 미시적 삶이든, 시대와 사건이든)

박완서가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싱아의 맛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처럼, 나또한 그 시절 먹었던 수수대 맛이 지금도 혀끝에 얼씬거린다. 어떤 꿀이나 엿과도 비슷하지 않은 단맛. 정도를 지킬 줄 아는 단맛이랄까, 하여튼 오로지 맛만이 과거가 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얼굴에 낙서를 하고 자면 잠에서 깨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사람은 잘 때 콧구멍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데, 이 영혼이 밤새 여기저기 마음껏 떠돌아다니며 구경한 세상이 바로 꿈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영혼은 예의 그 경로를 통해 몸으로 다시 돌아와 아침에 깨어날 준비를 하는데, 얼굴에 낙서를 해놓으면 영혼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동이라도 트게 되면 사람은 결국 영혼을 잃고 죽게 되는 법이라고 했다. 은근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혹시 점이라도 잘못 찍었을까 싶어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늘 얼굴을 박박 닦아댔다.

지금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쯤, 몸을 무언가 정신적인 것을 담고 있는 그릇정도로 여길 수 없다는 것쯤 알만큼 컸다. 그렇지만 내 몸속 깊은 곳에 아직도 할머니가 설명해준 꿈의 원리를 믿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 그리운 이라도 만나는 꿈을 꾸면 우리가 다시한번 세상 위에서 조우했다고, 몸 없는 반쪽짜리 만남이더라도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실은 그이도 나를 마주치고 싶어 밤마다 세상을 온통 헤맸을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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