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리스 시대의 철학부터 중세 철학, 근대 철학 총 3부로 나뉘고, 22장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상 체계는 다소간 그것이 발생하는 문명과 그 창시자의 인격과 이전 체계들의 성격에 의존하면서, 당대와 그 이후 시대의 이념과 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p.17). 특히 철학자로 하여금 입장을 취하게 만든 논리적이고, 사실적이고, 특색적인 철학적 고찰에 대한 탐구(p.18)가 특징적인 구조와 조직을 갖춘 체계로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논의를 한다.
흥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 대한 부분(p.357)이다. 종교개혁은 무익한 스콜라주의를 경멸하고, 교회의 권위와 현세적 권력을 반대, 인간 양심을 높이는 점은 르네상스와 비슷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지성을 자랑하는 르네상스와 함께 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르네상스의 낙관론적인 쾌락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 18세기 계명의 시대가 나타났고(p.504), 당시 자연과학의 연구가 열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교육학에서 유명한 루소는 인간이 문명과 거기에 동반되는 악을 완전히 배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확고하게 믿었다(p. 512).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오직 제도에 의하여 악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뭔가 내가 알고 있던 루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자연주의자였던 루소의 외침이 단순한 원시적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요구가 아닌, 자연적인 사회 조건의 창출과 자연적인 교육 방법에 의해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있게 바라본 장은 제16장 이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p.515~561)이다. 마침 대학원 시절 한 수업 중 칸트를 공부하며, 교육철학방법론에 대한 내용으로 작성한 글이 있어서 덧붙여보도록 하겠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한 학기의 수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면, 항상 고민하던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뭘 알아가고 있지? 주워들은 것은 많은데, 깊이는 있는가? 라는 부분은 고민해보아도 쉽게 채워지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러한 질문으로 고민하던 찰나, 듣게 된 이번 교육철학 수업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교육학도이기에, 교육철학의 부분이 빠져서든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교육철학방법론이란 과목명부터 참 좋았다. 무언가 굉장한 것을 배울 거라는 기대감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의 나는 뭔가 달라졌을 거라는 성취감도 혼자서 느껴가면서 한 학기를 보낸 듯 하다.
먼저, 이번 수업을 통해서 나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 예로 변인들 간의 영향을 알아보는 연구를 통해서 학위 논문을 준비해야겠다는 결의를 하고, 나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진로와 희망을 선택했다. 특히나 희망은 내가 대학원에 오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단어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연장 계약을 하면서 근무를 할 수도 있었지만,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내가 바라는 삶을 살겠다는 희망.. 어찌보면 당시 나의 실존이 나에게 과제를 제시한 부분이 아니였나?라고 생각된다. 여전히 고민되는 부분이 희망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였다. 이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희망에 대한 철학적인 논문을 찾아서 논문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라는 고민을 해보았다. 막연하지 않고 좀 더 명확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개념을 잡아야겠다라고 생각한 부분이 해석학을 통해서 첫 번째로 변화된 부분이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 관점의 변화가 두 번째로 미친 영향이다. 무작정 읽었던 나였다면 이제부터는 저자와 직접 만나기를 해볼 계획이다. 글자 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마치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느껴볼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선 저자 자체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자 한다. 그런데 만약 저자의 인물에 대해서 파악을 하다가 자신의 생활과 상반되는 내용을 적었다고 한다면 그 내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짧은 소견으로는 루소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에밀 그 자체는 훌륭한 양육서이지만, 그 글을 쓴 작가의 생활과 일치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학을 배운 나로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작가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까지도 읽어가는 것이 해석학인가?
마지막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현실 속에서의 해석학적인 삶을 유지해보고자 한다. 그 예로 곧 대학원 과정을 마치게 된 시점에서 나에 대한 앎과 세상에 대한 앎을 하나씩 채워가고자 한다.
처음 읽었던 독일교육학의 이해에서 “해석학은 관용을 보이고 독단을 방지하는 다양한 관점을 지닌 해방적인 생각이다. 해석학은 의미 있는 사태를 해명하지만 새로운 것을 확립할 수는 없다. 그와 함께 해석학은 보완적인 사고이며 보완해주는 사고방식이다. 즉 해석학은 서로를 보충해 주는 다른 추가적인 방법에 의지한다. 다시 말해 순수한 해석학은 하나의 구성물이며 완벽한 학문적 인식을 위해서는 충분치 않다.”라는 이야기는 해석학을 배운 나에게 잊지 말아야 할 구문인 듯 하다. 선이해를 통해서 의미를 찾아가고, 또 다음의 선이해를 통해서 의미를 알아가듯이 끊임없이 배워가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정말 벽돌과도 같은 책이다. 책을 덮은 지금도 읽었는지, 보았는지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같은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을 살펴보니 어떻게 이 책을 집중도 있게 다 읽었는지를 묻고 싶을 정도다. 방대한 양 속에서 책을 즐겨 읽는 나도 진이 빠질 정도였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은 철학 전공자, 교육철학 전공자, 그리고 철학에 관심있는 일반인 정도로 하고 싶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작성이 되었다는 평으로 많은 이들에게 읽혔지만, 사실 방대한 내용(누차 강조)으로 인해 완독에는 도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른 서양철학사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을 세밀하게 다뤘다는 점은 굉장하고, 훌륭하다. 추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다시 펼치기까진 용기가 필요해보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