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필요한 사회적 관계가 부족하다는 주관적인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소속된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거나 버려졌거나 단절됐다고 느낄 수 있다(p.34). 그런데 묘하게도 16세기 후반까지는 영어에 외로움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p.93).
저자는 외로움과 고립, 고독에 대한 구분을 하며(p.34), 외로움과 우울증, 불안에 대한 구분을 한다(p.79). 상담을 하다보면, 사소한 단어의 차이가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상대가 느끼는 것을 명확하고, 세심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아니라는 거부가 강하게 다가온다. 특히, 온라인 상담을 할 땐 단어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특히 디지털 기술과 사회의 공생 관계가 긴밀해진 데 따른 총 심리적 비용과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평가 중인데, 17년 피츠버그 대학교의 브라이언 프리맥 교수와 동료들은 SNS에 더 많이 접속하는 사용자들이 덜 접속하는 사용자들보다 외롭다고 느낄 가능성이 2배 높음을 발견했다(p.144~145). 참 어려운 상황이다. 외롭고 우울해서 SNS로 가느냐, 혹은 SNS를 많이 해서 외롭고 우울해질까?
때론 SNS를 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보인다. 얼마 전 아끼는 동생과 이야기를 하다 SNS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 역시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며, 내가 읽은 책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요즘 인스타 안 해요. 왠지 나만 불행하게 사는 거 같아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진을 보면 우울해져서 안 하기로 정했어요."

진짜가 된다는 것은 취약성을 보이는 일이다. 본모습을 숨기거나 왜곡했을 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는 경우에는 특히 용기가 필요하다(p.158).
나는 내 또래보단 젊게 살지 못 하는 사람이다. 애늙은이 소리를 어린 시절부터 들었다보니,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내 모습을 때론 꾸며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 차를 타면 들려오는 노래는 90년대 혹은 80년대 노래가 종종 나온다. 한 번은 박사 과정 때 지도 교수님을 차로 모셨는데, 차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곤, "제 시대의 노래를 듣고 있네요? 그런데 전 요즘 노래를 듣는데."
다소 다른 이야기같지만, 내 왼쪽 편에는 아직도 5년 넘게 쓴 휴대폰이 있다. 아직도 통화 등이 잘 되서 굳이 바꿀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휴대폰이 새로 나오면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은데, 이상하게 나는 딱히 관심이 없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한 선배가 "징하다"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진짜가 된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과 꾸민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뭐가 옳다 그르다고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어쩌면 약해보이는 것, 혹은 약해보였을 때의 나에게 다가올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 숨기고 생활하는 것을 아닐까?
1부를 읽은 후 느낌은 원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부에서는 연결된 삶을 만드는 법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나온다.
자기 비판은 파멸적인 자기대화로 이어질 수 있기에(p.257) 자기자비를 통해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판단과 조소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혹은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p.2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