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노부인이 던진 네 가지 인생 질문
테사 란다우 지음, 송경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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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Really, Really you want? Then that's okay."

피비의 대사다. 그냥 별의미 없이 지나간다. 배경으로 약간의 웃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특별한 설명도 없다.

앞뒤 상황을 말하면 이렇다. 친구인 '조이'는 연기 수업을 진행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복서 배역의 오디션 기회가 온다. '조이'는 정작 자신이 그 배역을 맡고 싶어 한다. 욕심에 '조이'는 학생에게 '동성애자 복서' 역할을 지시한다. 학생을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지시한 내용이다.

이때, 자신을 자책하던 '조이'에게 친구 '피비'가 말한다.

“If you really really wanted it, then it’s okay!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정황상 '괜찮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친구, 피비는 말한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괜찮다라는 '위로'를 끄집어내는 전개 방식이 너무나 단순 명료하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괜찮다니...

스치고 지나가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영상을 본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가만히 물어보자. 어떤 논리와 책임, 의무를 배제하고 '정말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인가, 혹은 머리에서 결정한 내용인가.

주인공는 일상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도중 숲속 노부인을 만난다. 노부인은 네가지 인생 질문을 한다. 완전히 소진되어 번아웃 된 주인공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정말 내가 원한 것인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1년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지금처럼 계속 살고 싶은가'

네 가지 질문에 공통점은 '정말 그러한가'하는 물음이다. 가슴과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단순하다. 내린 결정이 '정말' 그러한가, 하고 되묻는다. 단 한번의 되물음으로 우리는 제길을 찾는다. 선택은 대체로 '이성'을 따를 때 합리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합리적인 선택'만 하고 살겠는가.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아도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리의 인생을 채워가는 '합리적인 선택'은 점점 비중을 늘리다가, 어느 순간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듯 던져 진다. 즉,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한참을 진행하다가 되돌아 올 것이라면 처음부터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회가 정형화 되면서 합리적인 판단은 '해답'처럼 되어간다. 사회가 만들어낸 정답은 마음과 반대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성'에 따라 계속해서 진행된다. 그렇게 발생하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우리 삶에 '진심'이 사라지고 '합리성'만 남는 경우다.

어린이의 선택은 꽤 진실하다. 별것 아닌 것에도 골똘한다. 모든 선택을 처음 내려보는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해 신중히 접근한다. 다만 어른들의 선택은 '진실하지 못하다.' 어른들은 과거에 대략적인 선택을 내린 바가 있으며 그 데이터를 근거로 대체적인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 즉, 진실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데이터에 따른 '득실'을 따져 들게 된다. 고로 우리의 판단은 거의 자동적이다. 우리는 선택하길 싫어한다. 골똘해 하지 않기 위해, 어떤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결정 지어 놓는다.

'짜장과 짬뽕' 중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파랑과 빨강'중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오른쪽과 왼쪽' 중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대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고, 과거에 만든 가이드라인에 따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선택이라는 건 굉장한 특권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피로감으로 쌓인다. 선택은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근현대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고로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억압'이나 '억제'로 보인다. 부정적인 단어다. 그렇다면 선택이 제한된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때로 선택은 '피로도'를 쌓게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선택 피로도'가 쌓이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아침부터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일을 할지 정해지지 않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선택'에 대한 '자유도'가 높다. 다만 그만큼 '선택 피로도'도 함께 높아진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선택피로'에 관한 말을 했다. 그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선택의 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사람은 너무 많은 선택을 할 때 피로를 느낀다. 이런 피로는 나중에 있을 중요한 문제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왜 항상 회색 티셔츠만 입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이와 같이 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적은 결정을 내립니다. 내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같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어요.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위해 '선택'을 제어한다. 우리에게는 유한한 에너지가 있다.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고로 더 좋은 선택을 위해, '선택'을 줄이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자유란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독을 동반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지배받고 복종하는 것을 통해 도피하고 싶어하는 이유다."

생각보다 우리는 '자유'보다 '복종'을 택한다. 주체적인 의지를 갖고 행하는 것보다 정해준데로 움직이는 일을 선호한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정신적 에너지를 덜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내려진 해답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편하고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위험 부담도 적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지부조화'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되물어야 한다.

“you really really want?

정말 정말 원하는가?

Then that's okay.

그러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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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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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바사니오'의 대사다.

"나는 학창 시절, 화살 하나를 잃게 되면 그것을 찾으려고 꼭 같은 방향으로 다시 쏘았네."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

누군가는 잃어버린 화살에 좌절하고 잃어버릴 화살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좌절과 두려움은 과거와 미래, 둘 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단지 행동하지 않는 오늘에 영향을 끼칠 뿐이다. 실수에 대한 능동적 대처는 중요하다.

첫째,

받아 들인다.

인정한다.

수용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 판단할 수 있으며 실패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사용할 두 번 째 화살은 그 두려움에 과감하게 당겨질 수 없다.

잃은 화살을 '담담'히 받아드릴 자신감, 다음 화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행동력이 그것이다. 과거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하다.

몇 번의 큰 실수를 했다. 실수라기도 실패에 가깝다. 사람은 실수하지 않고도 실패할 수 있다. 내가 그렇다.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판단은 활이 내 손을 떠났을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을 공포에 떨며 바라봤다.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매몰비용의 오류, 이미 나아간 진행 방향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것은 화살 뿐 아니라, 화살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용된 감정에 '본전 가치'를 찾았고 다시 뒤로 무르기엔 지나치게 나갔다.

일단 진행하고 '실패'라는 끝을 알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끝이 닿는 극점에서 공포의 극한을 보았다. 무수하게 쪼개지는 극한의 극한. '적분값'은 내가 흘린 눈물과 쏟은 시간, 그리고 모든 감정의 총합이었다. 단순한 실패나 성공을 넘어, 내가 걸었던 모든 발자취와 그과정에서 겪은 모든 경험의 집합체였다.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그 끝을 알고 그 끝을 경험했다.

매몰비용의 오류를 범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합리적인 집착이 아니라고 여겼다. 끝에 나를 기다리던 '실패'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가고저 했던 '성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실수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적분값 만큼을 도돌이표로 돌려 없애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사니오'의 두 번째 화살처럼 즉각적으로 능동적인 대처를 했으면 어땠을까. 두려움에 아껴둔 두 번째 화살은 한참이나 지나도록 사용하지 못했다. 나의 시간과 노력은 첫번째 화살을 찾느라 소모됐고 결국은 찾지 못했다.

결국 매몰비용의 오류를 통해 얻은 교훈은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이렇다.

담담히 받아 들인다.

무감정하게 다음 행동을 실행한다.

결국 그 실패는 내 깨달음으로써 가치를 얻었다. 실패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현재는 증명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은 단순한 희극이 아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깊게 다룬다. 바사니오의 대사는 이런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묵직하게 들어오는 대사 하나를 급하게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기껏해봐야 몇 그램되지 않는 작은 종이와 활자지만 나의 공포의 적분값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거울을 보고 똥이 묻었는지, 겨가 묻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보고 자신이 보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 신뢰와 우정의 중요성, 그리고 사랑을 위한 결단과 희생. 이 메시지는 작품이 왜 시대를 초월하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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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순간, 치트키 독서 - 실패의 순간에 나를 일으켜준 것은 언제나 ‘책’
이혜주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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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5~6년전, 한 블로그를 방문한 적 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른다. 한 여성의 블로그였다.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제목을 발견했다.

구백 몇번 째 독후감 이었던가...

게시글을 봤더니, 수년 전 글이다. 최근 글을 살폈다. 이미 일 천 번째 글을 작성해 둔 뒤였다. 대단해 보였다. 그 기록. 그 시간.

천 권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는 주인장의 지적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부러웠다. 물론 도서 갯수를 늘렸다고 지적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원래 책을 좋아했지만 기록이 없었다. 얼마나 읽는지도 몰라고, 어떤 책을 좋아하고, 스스로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갖고 싶다.'

저 기록과 시간이 쌓은 '결과물' 말이다. 네이버가 임의로 생성한 나의 블로그를 보았다.

메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블로그 제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 블로그 초기 메뉴에 있던 '낙서장'이었던가, 거기에 글 하나를 남겼다. 초라한 한 자리 숫자가 자리수를 그대로 하고 단계를 올렸다.

아득한 1000이라는 숫자를 갖고 싶다. 꿈꾸고 잊었다. 시간이 지났다. 하루 하나, 어쩌면 둘... 그렇게 쌓은 기록은 어느덧 일천 구 백개를 넘었다. 독후감도 천 편이 넘었다.

그냥 그렇게 했다. 스쳐진 동경은 잊혔고 기록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다. 이제는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상이 된 글쓰기는 숫자가 아니라 의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도서인플루언서'

특별하게 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가 내 블로그를 본다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끼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1000이라는 숫자는 불타는 열정으로 쌓여지는 결과는 아니다. 블로그를 하며 깨달은 바는 그렇다. 때로는 불타는 열정보다 식지 않는 꾸준함이 더 큰 성과를 쌓는다.

의식 없이 쌓은 기록은 '로그' 형식으로 남겨졌다. 시간의 순서로 항해했다. 기록은 과거의 방향을 말했고 지금은 연장선에 있었다. 책은 '책'이 아니라, '나'를 설명했다. 그것은 '빅데이터'가 되어 나를 설명했다.

벌써 6년 전, '인공지능'은 소설에서 나오던 개념이었다. 현재 ChatGPT 서비스가 출시됐다. 2000권이 넘게 쌓여 있는 나의 빅데이터, 그것을 ChatGPT에게 넣었다.

인공지능은 나의 MBTI를 추론하고 대체로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 줬다. 스스로를 갈아 넣은 글이 '빅데이터'가 되어 대체적인 '자아'를 보여줬다.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 보듯.

인공지능이 평가한 나를 찬찬히 들여다 봤다.

읽고 잊힌 기억들. 쓰고 잊힌 기억이 정보로 짜집어지고 다시 나를 표현해 냈다. 같은 샘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내가 씹고 뱉은 정보는 나를 나타내게 했다.

'해우소'라는 이름답게 누군가의 배설을 씹고 삼켰다. 다시 소화했고 다시 배설했다. 그러니 그 배설은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닮았다. 내가 읽은 책은 다른 누군가가 읽은 책과 그 활자 배열이 정확히 일치했으나 다른 걸 만들어 냈다.

'코딩 해줘'

'소설 하나 만들어줘'

'그림 그려줘'

'노래 만들어줘'

간단한 명령으로 인간보다 더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명령을 이해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내놓는 시대가 지났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등'이 아니라 '첫번째'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지 언정, 스스로 주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 명령에 복종하는 철학 없는 똑똑이들의 최고의 적이 될 것이며 해답을 찾는 질문자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수족이 될 것이다.

'도서인플루언서' 이름을 지어 두었지만 그냥 '책 좋아하는 쌍둥이 아빠'일 뿐이다. 독서는 '나'와 '쌍둥이'에게 향해 있을 뿐이다. 다만 쓰여지는 글의 배설이 누군가의 양분이 되고 다시 그것이 돌고 돌아 나의 양분이 된다. 그 순환의 매커니즘에서 '사회'를 느끼고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이 순환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나아가 사회와 연결된다. 이 연결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독서와 글쓰기의 힘이며, 인공지능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다.

이 책은 '도서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인 '우아한밍블' 님의 출간도서다. 평범한 공무원에서 책과 글을 만나며 글의 일상과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 가감 없이 들어가 있다. 스스로 질문하는 사람의 성장은 역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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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부작 북케이스 세트 - 전2권 (10주년 한정판)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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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 세계 1000만 부 돌파

51주 연속 역대 최장기 종합 베스트 1위

국내 판매 200만부.

결과가 마케팅인 '책'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선택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베스트셀러'를 선호하여 찾아보진 않는다. '트렌드'를 판단할 뿐이다. 다수에게 선택 받았다고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매 부수로만 따지자면 '수학의 정석'은 4천 500만권이다. 매년 100만권이 팔린다. 운전면허시험 문제집도 2천 500만부가 팔렸다. 그 책이 지금의 나에게 적합한가. 아니다. 나에게 적합한지, 그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미움받을 용기'는 '베스트셀러'이며 요건이 적합했다. 특정 사람에게 집중 판매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에게 필요하다. 왜 그런 선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특정 집단이 아니다.

시대가 선택한 책이다.

왜 시대는 이 책을 선택했는가.

'미움받을 용기'

도서의 제목은 '미움받을 용기'다. 도서 제목은 아이콘처럼 쓰여지기도 했다.

관계에 얽힌 우리 동양인들에게 '미움받을 용기'는 제목부터 위로를 준다. 목차에서 매력을 주고 내용에서 깨달음을 준다.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행동이 미워서 미워하는 것일까. 그저 미움이 먼저지 않을까. 미움이 먼저라면 미움은 누구나 받게 된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페스트'와 '지옥'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인간 존재와 윤리적인 고민을 보여준다. '신의 형벌'로 여겨진 '페스트'가 그저 단순한 질병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유사하다. 드라마에서는 ‘신의 저주’로 여겨지는 ‘형벌’이 불특정 임의로 설정된다. 이 설정은 아들러의 목적론과 유사하다. 이유가 있어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을 뿐이다. ‘목적론’은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가 미움받는 것은 그저 확률에 의한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행동'이 원인이 아니다. 결심이 원인이다. 결심 후 행동에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아드러의 목적론은 그렇게 우리를 자유케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의 말처럼 어떤 깨달음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아들러는 주체성을 상대, 외부, 과거에서 현재의 나로 가지고 온다.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와 '지금'이다.

이책은 우리에게 단순한 자기계발서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위로와 깨달음을 얻는 이유다. 시대가 선택한 이 책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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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리커버 에디션) - 손흥민 첫 에세이
손흥민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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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어떻지 모르지만 손흥민에 대해 잘 모른다. 한창 그가 주가를 올리던 시기, 개인적인 어려움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세상이 손흥민 선수에 열광을 하던 시기, 전혀 그의 존재도 모르고 삶을 살았다.

불현듯 그럴 때가 있다.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고 있나' 할 때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TV프로그램이나 시대의 아이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손흥민'의 책, 그의 영상을 찾아 본 것은 '손웅정'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누군가는 '손웅정 작가'를 보고 '손흥민 아버지'라고 떠올리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손흥민'은 '손웅정 아들'로 보인다. '스포츠'가 단순히 '신체 강화'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스포츠'가 다른 무언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그 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철학'을 만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금도 손웅정 작가의 '책'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트로피를 받은 손흥민에게 칭찬을 하고 들어오며 '트로피와 상장'은 분리수거 잘 하고 오라고 했다는 말.

'손웅정' 작가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책의 일부다. 이 책은 갑자기 마음에 들어왔고 밤 10시 30분이 되어 급하게 서점으로 뛰어가 구매한 책이다. 직원이 마감 정리를 할 때, 잽싸게 구매해서 잠들기 전에 속독으로 훑었다.

다급함에 훑어 내려가다, '탁'하고 걸렸던 부분이다.

'내가 읽은게 맞나?'

책은 '손웅정 작가'의 성격처럼 그저 '툭'하고 그 일화를 소개했다. 뭐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그저 '툭'하고 넌지시던진 그 몇 줄이 가슴에 '팍'하고 꽂혔다. 아이의 추억을 간직하겠다며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꽃모양 색종이도 모두 쌓아두던 나에게 던지던 메시지였다. '물건'이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만히 보면 내가 쓴 글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머니에 관한 일화다. 어머니는 거의 모든 것을 버리길 좋아하셨다. 기분 좋게 구매한 어떤 것을 보고도 '쓰레기'를 사왔다며 타박 하셨다. 때로는 '책', '일기장', '상장'을 비롯해 깔끔하게 버리셨다. 당시 일었던 약속한 마음이 괜스레 죄송스러웠다.

최근 읽었던 손웅정 작가의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에서 다른 인사이트를 얻었다. 이것을 읽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서를 읽으면서, 읽고 난 뒤 꾸준하게 버렸다. 자가용으로 몇 차를 갔다 버렸는데도 아직도 버릴 것이 많다.

수 년 간, 단 한번도 선택받지 못한 것들.

또한 비슷한 종류의 다른 선택지들.

그런 것들이 다음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영원히 쌓여 있을 것만 같았다. 찻장에 '비타민'이 보였다. 종류는 두 종류였다. 가만보니 어떤 하나는 선택을 받고, 다른 하나는 선택 받지 못했다. 선택 받던 녀석을 다 먹고 나면 선택받지 못한 것을 두고 다른 선택지를 또 구매했다. 다만 매번 비타만에 손을 뻗을 때마다 새로운 비타민을 다시 구매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미련을 두었다.

'미련(未練)'이란 '한자'의 뜻을 보건데 '아닐 미(未)에 익힐 련(練)'을 쓰고 있다. 어쩌면 아직 '익혀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미 내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붙잡고 있는 마음이다.

물건 뿐만 아니다. 과거와 사람. 나는 거기에 익혀지지 않았다. 잊혀져야 할 것을 붙잡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익숙치 않으니, 거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짧게 일주일 간 손웅정을 빙의했다. 매일 두 시간 씩 청소를 하느라 보낸다는 그를 보며 '미친척'하고 버릴 것을 버렸다. '버리는 방법'에 대한 많은 책과 청소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리고 대략 꽤 필요한 뼈대만 남고 상당히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비로소 느껴졌다.

'개운하다'

혼탁했던 시야가 말끔해진 느낌이다. 집안에 '선택지'는 사라졌고 본질만 남았다. 불필요한 고민과 생각이 단순화 되는 느낌이다.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독서법에 무서운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뒤늦게 그의 행동이 '독서'에 기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손흥민'의 책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손흥민'의 책을 읽었다. 손흥민의 책에는 꽤 많은 분량이 '아버지'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주인공이 곁으로 비껴서며 조연으로 등장할 때, 그 사람의 객관성이 명확하게 보였다.

이 부자가 서로 주고 받은 말 중에 가장 많은 핵심 키워드가 보였다.

'호사다마'

언젠가 친구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개인적인 성장이 꽤 이뤄지고 있을 때, 친구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 야속한 마음에 내가 했던 말은 '긍정'이었다. 이후 안좋은 일로 고통스러워 할 때, 친구가 한 말이 있다. '새옹지마'.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고, 나쁠 때는 모든 것이 나쁘게만 보인다. 좋을 때 갖는 '긍정'은 '긍정'이 아니다. 때로 좋을 때 보이는 나쁜 면이 긍정이다. '긍정'은 '수긍하다'의 '긍'과 같다. '옳다고 여기다'라는 의미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양면 중 '좋은 면'만 보는 것도, '나쁜 면'만 보는 것도 모두 긍정이 아니다. 긍정은 모든 상황과 현상에 존재하는 양면은 모두 바라보고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호황은 좋다. 불황은 더 좋다'

책에서 언급한 이 말이 더욱 와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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