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열대어 케이스릴러
김나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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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남편은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목격자일 겁니다."

유력한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그의 아내가 혼수상태로 잠들어 있다가 깨났다. 기억을 상실한 채로...

깨어난 아내는 위와 같은 말을 들었다. 그 혼란과 공포.

추리물은 초반에 몰입시키지 못하면 매력이 없다.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작가가 숨겨놓은 복선도 모두 의미가 상실한다.

그러니 이렇게 강력한 도입의 스릴러를 일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은 '오디오북'으로 듣건데 무척 흥미진진했다. 문체가 간결하고 쉬운 것이 '일본추리'를 닮았다. '일본 추리'라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올랐다. 수요가 있기에 반드시 공급도 있을 법한데 발견하지 못했다는게 못내 아쉬웠었다. 이제야 발견했다. 아마 '김나영 작가'의 도서를 몇 편 더 보게 될 것 같다.

도서는 '윌라 오디오북'에서 추천 목록으로 알게 됐다. 최근 '윌라 오디오북'의 이름이 새롭게 바뀌었다. 윌라 2.0이다.

'스타벅스 커피'가 '스타벅스'로 바뀌면서 '커피' 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윌라'가 '오디오북'을 넘어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의지를 담은 듯하다. 현재 '밀리의 서재'를 구독 중이다. KT 요금제에 구독료가 포함되어 있어 이용중이다. 개인적으로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어찌됐건 거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전자책 이용 빈도가 높아졌다.

확실히 전자책을 이용하다보니 평소보다 독서량은 늘어난다. 워낙 바쁜 탓에 한 동안 도서리뷰를 올지 못했으나 근래들어 거의 1일 1독 수준으로 도서리뷰를 올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제는 전자책으로 읽는 비중도 꽤 늘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자책으로 완전히 갈아 탈 수는 없다.

윌라의 경쟁사는 아마 '밀리의 서재'일 것이다. 밀리의 서재는 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만족하는 편이다. 밀리의 서재가 아쉬운 부분은 나에게 명확하다. 나처럼 '병렬독서'를 하는 사람에게는 꽤 쥐약이다. 물론 내부에 '읽고 있는 책'을 분류 볼 수 있긴 하지만 플로팅 형식으로는 최근에 읽었던 한 권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번갈아가며 도서를 바뀌 읽기는 힘들다. 때로는 오디오북과 전자책을 병렬로 읽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새로 다운 받게 되는 과정도 복잡하다. 윌라 오디오북은 이런 부분이 보완된다. 또 소설 부분에 대해 성우의 연기력이나 연출도 좋다.

기존 '윌라오디오북'의 포지션은 조금 애매했었다. 밀리의 서재에서도 오디오북이 있고 보유도서량도 밀리의 보다 적어 보였다. 그러나 윌라2.0이 되면서 강력한 차별점이 생겼다.

첫째, Kids다. 매주 아이와 도서관을 가서 수십권의 책을 빌려와 읽었다. 밀리의 서재에는 어린이 관련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윌라에서 Kids 목록이 생기면서 드디어 아이들 도서도 충분해졌다. 이로써 윌라를 구독해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해졌다.

둘째, 전자책이 생겼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전자책이 생겼다는 점은 '밀리의 서재'와 더욱 비슷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제안할 부분이 있다면, 오디오북을 듣다가 전자책으로 넘어가고 싶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부분이다. 기술적으로 '목차'에서 큰 단락만이라도 연동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정도만 해도 아주 만족스러울 법하다.

셋째, 개인적으로 '고객센터'가 적극적인 편이다. 사실 '도서관련 플랫폼'에서 '고객센터' 이슈로 이용을 하지 않는 편이 많았다. 다만 '윌라'의 경우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인 편이었다. 일단 지금에서는 윌라와 밀리를 병행하기로 했다.

다시 '붉은 열대어'로 돌아와서,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게이고'의 글을 닮았다. 다만 단순히 '게이고'와 닮았다,가 아니라 문장에 문학적인 표현도 충분히 있어 단순히 추리 소설를 읽는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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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놀라운 실상
미야구치 코지 지음, 부윤아 옮김, 박찬선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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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권유로 MBTI 검사를 했었다. 유형별로 사람을 나누는 일에 관심이 없었으나 분위기에 편승하여 검사를 했다. 짧게 끝나는 간단한 문답이 이어졌다.

문항을 풀면서 혼잣말은 이랬다.

'원래 다 그렇지 않나'

문항이 묻는 것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를 마쳤다. INFJ라는 결과가 나왔다. INFJ는 매우 희귀한 성격이었다. 이후 옆에 있던 지인이 검사를 했다. 도무지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을 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것은 아니며 내가 굉장히 소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나무에서도 다른 모양으로 가지가 자란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모두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각자 자신을 기준으로 중심을 잡고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산'이나 '강', '바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그들에게 푸는 이유는 그들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기대치'도 없다. 즉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이유는 '기대치' 때문이다.

아이가 한살 때, 방청소를 깨끗하게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는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큰소리로 운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기대치'가 생긴다. 기대치는 갈등의 원인이 되곤 한다.

정치에서 '평등'의 개념은 '보수', '진보'에 따라 다르다. 보수 진영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주장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비례적 평등'을 주장한다.

기회적 평등이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평등을 말한다. 반대로 비례적 평등이란 결과의 수량을 평등하게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기회적 평등은 모두가 같은 출발선 위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 일이고 비례적 평등은 모두가 같은 도착점에 있을 수 있도록 출발점을 조정해 주는 일이다.

'미야구치 코지'의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에는 '알랜드 보통'의 '불안'과 보면 비슷한 인사이트를 준다. 우리가 과연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아이가 7살 정도에 글씨를 썼는데 글씨에 좌우가 반전되어 있었다. 어떤 부모는 b와 d를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을 나무란다. 'ㅇㅏ를 'ㅓㅇ'라고 적은 아이를 답답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 발달 상태가 성인과 달라 반전된 상태로 보인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잣대가 무용이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회의 평등'과 '비례의 평등' 중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적정한 균형이 필요하다. 다만 분명 '출발점'이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로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출발점에 우리는 그들이 '없다'라고 여길 수는 없다.

범죄자의 일부는 인식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일본의 재소자 일부는 '인지능력'이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이 유의미한 차이가 있으면 그것을 '장애'라 부른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인지능력장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범죄는 '나쁘다'는 일반적 인식과 다르게 어떤 이들은 단순히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아이가 글자를 좌우반전된 상태로 그렸던 것이 단순한 실수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어떤 이들은 특별한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이것은 '죄의식 없는 범죄자'를 변호하기 위해 '선량한 피해자'의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가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을 씌울 지언정 그곳에 도덕적 결함이나 '선악'을 투영하기까지는 속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적 평등의 사회를 살면서 우리는 모두가 그렇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다. 누구는 분명 열심히 하고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누구나 열심히하면 '메시'나 '호날두'가 될 수는 없고, 누구나 열심히 했다고 '모차르츠'나 '베토벤'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분명 남다른 출발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은 필연적으로 늘어난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은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비만인도 존재한다.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일 수 있지만 누구나 같은 세상을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할 법한 범주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케이크를 삼등분 하는 방법을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내는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는 사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리고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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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은 몽땅 써라 - 먹고 놀고 마시는 데 목숨 걸어라, 다시 살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라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윤지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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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꽤 일리있다. 가진 돈을 몽땅 써야 한다. 일부 이 말에 공감한다. 예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배운 바 있다. 친구에게 스타크래프트를 배운적 있다. 게임은 단순하다. 광물을 캐고 자원으로 유닛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면 된다. 현실 전쟁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광물자원'과 같은 경제력이다. 게임은 시작과 동시에 4명의 일꾼을 준다. 일꾼들이 일을 시작하면 '광물자원'의 숫자가 올라간다.

이때 필승의 전략은 이렇다. 쌓이는 광물자원을 최대한 0으로 만들어야 한다. 50원이 모이면 또다른 일꾼을 생산하고 100원이 모이면 건물을 짓고 다시 50원이 모이면 일꾼을 생산한다. 돈이 쌓이도록 놔두는 것은 기회비용을 날리는 행위다. 어리석게도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절약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꾼이 생산하는 50원을 아껴 큰 건물을 생산하려는 시도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게임을 아는 이들은 안다. 가진 돈을 몽땅 쓰다보면 나중에는 잠시 전투를 하는 도중에도 엄청난 돈이 쌓이게 마련이다. 결국은 아껴쓰는 것보다 몽땅 회전 시키는 편이 이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구보다 빠르게'다.

게임에서 가장 비싼 건물 중 하나는 '커맨드센터'다. 대략 500원 미네랄 정도 된다. 초기에는 꽤 목돈에 해당된다.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맨드센터를 짓고 확장하지 않으면 한정된 자원은 결국 남에게 빼앗긴다. 한정자원을 나눠 갖는 현실 구조와 똑같다.

저축은 은행의 채권을 사는 투자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많은 투자 방법 중에서 기대 수익이 가장 보잘 것 없으며 자신의 기회비용을 채권을 구매하여 묵혀두는 일이다. '저축'이 최대 '선'이라면 은행은 어째서 사람들이 저축한 돈을 '저축'하지 않고 '기업'에 대출해주겠는가. 그리고 기업들은 어째서 그것을 대출받고 운용하겠는가.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저축'이 '이윤' 추구의 최대 선이라면 기업은 '대출'이 아니라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적당한 인플레이션에 걸맞는 성장을 하고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고 결국 개인을 고용한다. 빌린자가 빌려준 자를 고용하는 이상한 구조가 형성된다.

돈은 '기회비용'의 다른 말이다.

가령, 욕구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욕구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다. 이 욕구를 '교육'에 비교해보자. 어떤 이는 교육에 지출할 경제적 능력이 있고, 어떤 이는 없다. 둘이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등가교환에 의해 돈을 지불하는 행위는 무언가를 얻는 행위와 같다.

반드시 물품일 필요는 없다. 경험이나 인맥, 능력 때로는 기회일수도 있다. 돈을 지불하면 그에 합당한 댓가가 돌아온다. 물론 아무 의미없는 소비성 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튜브든 글쓰기든 요리든,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경험한 적 없는 세계가 있다면 과감하게 지불하여 새롭게 배우고 시도하는 것이 좋다.

인류가 저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인류는 대략 1만년 전 정착을 시작했는데 '농업혁명'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인간에게 '잉여생산물'을 선사했다. 그전까지 인간에게 저축은 존재하지 않았다. 쓸만큼 쓰고 필요없으면 버렸다. 농업혁명은 분명 '부'를 만들어낸 혁명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계급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상 농민이 지배계층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농민은 언제나 피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은 착취 당하거나 세금을 징수 당하는 존재들이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계층은 대개 외부에서 무기를 들고 침략한 '침략자'이거나, 과거 토지를 획득한 '정복자'의 후손이다.

유럽축구리그를 보면 스폰서들을 익숙하게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스포서의 상당수는 '보험회사'라는 점이다. 현재의 보험사들은 '보험업무'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잉여자금을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투자회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경제력있는 회사는 '보험회사'인가. 보험의 기원은 '도박'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보험회사는 영국의 '런던로이즈'이다. 런던로이즈는 본래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이 찾는 카페였다. 그러다 17세기 말 카페를 다니던 손님들 사이에 선박이 무사히 항구로 돌아올지 내기를 시작했다. 카페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농민들이 잉여수확물을 저축한 이유는 그들이 풍요로운 생산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다. 농사는 꽤 예측가능성이 높은 사업이다.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날씨와 기온이 있고 이에 맞는 수확시기가 정해져 있다. 다만 이 안정적인 패턴 중 예외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저축해야 한다. 다시말해 미래지향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불안을 낳고 행동을 제한한다.

계산된 예측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소유'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한 살인 아이는 불안함이 없다. 7살인 아이에게도 불안함은 없다. 불안은 꽤 안정적인 경제력을 가질만한 나이부터 갖게 시작하는데 아이러니하다.

현대인 대부분의 소비는 '필요'보다 '과잉'하다. 다시말해 '소비력' 자체가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고로 소유는 특히 물건을 살 기회와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수단이다. 비록 집은 없지만 '고급승용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 실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필요없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눈이 두 개가 있는데, 누군가 눈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답변하겠는가. 아마 상대할 가치를 못느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이 완전하게 형성된 이들에게 지위를 설득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사람에게는 일생간 소득주기와 소비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무지막지하게 소비하고 생후 20년 동안 생산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즉 소비력과 생산능력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소비가 죄라면 인간의 삶에서 '죄'를 짓지 않는 기간은 생각보다 크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당연히 출산률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에는 '소비'가 발생한다. 이것을 완전히 절저한다는 것은 '생산'만이 '선'이라는 좋지 못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생산력'을 넘어서는 '무절제한 소비'는 분명 옳지 못하지만 자신의 생산력 내에서 충분히 소비하고 즐기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 모든 것에 '선'은 아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도 옳다는 것이다. 그 또한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아이들과 함께 외식할 수 있는 기회비용,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다가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한 비용,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이들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다가 갖게 될 고급 정보들에 대한 기회비용.

그런 기회비용들이 통장잔고에 쌓여, 연 3%도 안되는 성장률로 잠들어져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그 잠든 잔고를 깨워 더 빠르고 신속하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돈이 돈다는 것이 맞을까. 멈춰져 있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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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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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소설을 몇 편 읽어 본 적은 있다. 그때 왜 더 찾아 읽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아주 취향 저격이다. 기본적으로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 다만 공장에서 찍어 낸듯한 추리 소설에 실증이 난 편이기도 하다. 기욤 뮈소의 소설을 몇 권 소유하고 있다. '브루클린의 소녀'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이 있는 듯하다.

'브루클린의 소녀'는 아주 가벼운 분위기로 소설이 시작한다. 정말 일상적이고 가볍다. 사랑하는 연인과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언쟁으로 사건은 비화된다. 점점 이야기는 거대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주인공 라파엘은 성공한 작가다. 그의 삶은 무난했다. 전업 작가로써 성공했고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도 있다. 그러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다. 자신의 커리어를 더 우선시 하는 아내를 만났고 이런 이유로 어린 아들을 혼자 양육하는 조건으로 이혼한다. 이후 커다란 방황을 한다. 소설 중간에 난데없이 '육아 일기'가 등장한다. 이 대목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정신없이 육아하며 '추리'하는 맛이 꽤 현실적이다.

소설의 진행 방식을 보니 내 과거 기억도 중첩됐다.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있으며 역시 한 눈을 팔면 방 전체가 뒤집어지는 육아 전쟁에서 일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소설 속 주인공에 흠뻑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내 개인사와 과거가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그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약혼녀 '안나'를 만난다. 안나와 미래를 약속하며 '라파엘'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진다. 그는 집요하게 그녀의 과거를 캐묻는다. 이 과정에서 '안나'는 '라파엘'에게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도저히 일반적일 수 없는 사진.

그 사진을 본 '라파엘'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뜨겁게 타오른 감성이 차가운 이성에 식었다. 비워둔 자리를 후회한다. 그리고 다시 '안나'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안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극적을 돌변한다. 마주하는 모든 정황은 하나도 일관성이 없으며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파변 덩어리들만 무수하게 생겨난다.

'작가가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나'

걱정이 드는 즈음, 소설은 벌여려놓은 이야기를 하나씩 밀봉하고,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몇 번이나 과정이 반복되니, 몰입하던 상황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훨씬 넘어 섰다.

소설의 형식을 보면 대략 '미국드라마'를 닮았다. 미국 드라마를 자주 보다보면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확대된다. 확대된 이야기에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온다. 각 등장인물마다 사연과 히스토리가 있고 인물의 상황과 내면을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따로 전개해 나간다. 이 소설도 그렇다. 소설을 보다보면 '미국드라마' 프리즌브레이크가 떠오른다. 하나의 사건에 얽혀 있는 다양한 사람의 이해관계가 개인에서 점차 사회로 확장된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다보면 모든 플롯 뒤에 숨은 반전을 예측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어떤 부분에 반전이 숨겨져 있을지는 예측할 수는 있다. '브루클린의 소녀' 역시 어느 정도의 반전을 짐작할 수 있긴 하다. 과정을 풀어가는 일이 워낙 자연스럽고 긴박하여 빠져들어 읽다보면 반전 내용과 상관없이 흥미롭다.

소설은 워낙 쉽게 읽히고 빠르게 이해가 된다. 소설의 장마다 각 장에 맞는 '명언'이 한 마디씩 적혀 있다. 단순히 소설에 해당하는 명언이지만 적잖게 여러면에서 자극이 되는 좋은 글들이 많았다. '기욤 뮈소'의 다른 소설도 기대가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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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자서전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지음, 김명신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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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9개월 만에 열병으로 눈멀고 귀먹어 말조차 못하지만 그녀는 낙관주의자였다. 1968년, 여든 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정싱인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서전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적었다.

눈 뜨고 감사함 없이 사는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를 준다. 그녀는 눈이 보이는 친구들을 시험해 보곤한다. 숲속을 오래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 묻는다. 친구는 '별거 없었어'라고 답한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보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것에 전부인 사람들에게 본다는 것은 그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점자로 글을 읽었으나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문학을 읽고 철학서를 읽었으며 더 많은 간접 경험을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고 가보지 못한 세상을 봤다. 과연 누가 눈을 감고, 누가 귀를 닫고 있는가.

철학에서 보는 건 그림자고 아는 것 역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진리를 파악하고 우주를 그대로 포착한다. 그림자는 실재다. 즉, 실재라 믿는 것은 대체로 그림자다.

인간은 굉장히 희한한 포유류다. 포유류는 다양한 색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호랑이가 빨간 이유다. 무슨 말일까. 원래 호랑이는 은폐를 위해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 녹지에 숨기 위해 호랑이는 초록색 털을 가져야 한다. 초록은 보호색이 되며 다른 동물들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감춰준다. 그러나 호랑이는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이렇다. 유전적으로 '초록'을 만들어 내는 것은 '빨강'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또한 호랑이가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이 '적록색맹'이다. 우리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이는 호랑이가 대부분의 초식동물에게는 녹색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조류'는 육안으로 비가시광선을 본다.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먹이를 찾거나 방향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육안'을 사용한다. 직접 두 눈으로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여 방향을 찾아간다.

그 말은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가시광선'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동물은 가시광선을 훨씬 뛰어넘는 빛을 본다. 고로 그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아주 극일부다.

우리 조상은 채집 생활을 했다. 과일을 먹는 생활 습관 덕분에 조상들은 붉은 원추 세포를 부활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붉은색을 볼 수 있게 됐다.

이것은 말한다. 즉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가시광선을 넘어 볼 수 있는 감각, 그것은 아마다 '글을 해석하는 감각'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통해, 타인과 과거, 미래, 철학을 모두 볼 수 있다면 과연 '헬렌켈러'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세상을 봤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굉장히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책에서 본 것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상황까지 온다. 독서는 간접경험이다. 다만 대부분의 직접경험도 차츰 퇴색되면 간접경험과 비슷한 형태로 기억이 저장된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표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시각이 퇴화한 동물이 후각에서 뛰어난 감각을 나타내거나, 그마저 퇴화한 동물이 청각에서 뛰어난 것 처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더 많이 보게 한다. 그녀는 남들이 보는 것을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부분부터의 본질을 살핀다. 그녀는 머그컵에 담긴 물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애를 먹었다. '머그컵'은 물을 담는 그릇이고 '물'은 그 안에 담겼다. 설리반 선생이 머그컵의 물을 '물'이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가르킨 것이 '머그컵'인지 물인지 몰랐다. 그녀는 그것을 머그컵이라고 이해했다. 이 둘은 이것으로 고군분투한다. 가르킨 것이 '물'인지 '머그컵'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와 '설리번'은 얼마나 '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했을까.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출애굽기 19장에는 '아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요, 빛이요, 비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아는 것은 사랑이고 빛이고 비전이다.

이렇게 본질을 탐구한 그녀에게서 '삶'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아 어둡고, 들리지 않아 적막하고, 말하지 못해 답답한 그녀에게 '삶'은 밝고, 경쾌하며 넓게 펼쳐진 것이었다. 주어진 것에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생긴 새로운 것에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녀는 최고의 '낙천주의자' 였다. 삶은 오르막길 뒤에 내리막길 같은 것이며, 내리막길 뒤에 오르막길 같은 것이 었다. 모두가 그녀의 삶이 내리막길이라고 정의할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오르막길이라고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왕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노예가 있을 수 있고, 노예의 조상들 가운데 한 명 쯤은 왕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연 '우리'인가. 혹은 어쩌면 우리가 우리를 정의하기에 앞서, 혹은 그 훨씬 뒤에도 우리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으며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낙천주의'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것이 삶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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