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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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눈을 떠보니 영국 총리의 몸으로 바퀴벌레가 깨어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닮은 도입부다. 소설은 '역방향주의'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총리가 된 바퀴벌레는 이 '역방향주의'를 밀어 붙인다.

역방향주의는 이렇다. 돈의 흐름이 반대로 가는 것이다. 종업원들은 일을하면 노동의 댓가로 기업에 돈을 지불한다.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되려 지불한다. 쇼핑을 하면 물건 값을 소매가로 받는다. 현금 비축은 금지가 되고 은행에 돈을 맡기면 높은 마이너스 이자가 붙는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돈을 주기 위해 제품을 끊임 없이 구매해야 한다.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주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인수하고 우주 탐사를 확대한다. 돈의 흐름이 거꾸로 흐른다. 이런 돈의 흐름의 끝에는 '소비활성'과 '완전 고용'이 있다. 이런 허무맹랑한 개념을 읽다가, 문뜩 멈춘다.

'어! 잠깐만. 그럴 수도 있나.'

되도 않는 개념에 살짝 설득 당하고 '피식'한 뒤, 다시 읽는다. 이처럼 경제의 흐름을 뒤집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이웃 국가와의 관계다. 독일, 프랑스 심지어 중국과의 관계다.

이 소설에서 '역방향주의'는 꽤 구미가 당기는 일일지 모른다. 노동을 하면 돈을 주고 쇼핑을 하면 되려 돈을 받는다니. 그럴싸한 '파퓰리즘'이다. 결국 '노동'보다 '소비'가 주가 되는 세상을 이 소설은 비꼰다. 현대 사회는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다. 소비가 경제 부양의 큰 축이 되면서 사회는 '노동'보다 '소비'를 부축인다. 현대 자본주의가 현대인에게 '소비'를 장려하며 진행하다보니 결국은 사람들은 '빚'에 허덕인다. 현존하는 경제 개념을 완전히 뒤집은 이 개념은 허무 맹랑할 것 같지만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다. 때로 일부는 현대 자본주의를 닮기도 했다.

얼핏 '그럴 수도 있나' 했던 건 그 표면적 설득력 때문이다. 돈이 거꾸로 돌면 아무도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현금 비축이 불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을 한다. 결국 정말 소비를 자본주의 축으로 두는 것이다. 이런 역방향주의는 시장에 끊임없이 통화가 공급되며 금방 화폐가치가 떨어지게 할 것이다. 다만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강력한 수출이다. 강력한 수츨을 통해 파운드화를 이웃 국가에 무더기로 보내면 화폐는 다시 안정화된다. 빈곤한 다수의 여론을 이용한 파퓰리즘을 풍자한 이 소설은 2020년 1월 31일 영국이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브레시트(Brexit)를 떠올리게 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나에게도 잊지 못할 사건 중 하나다. 영국에 살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강한 인상이 남았나.

브렉시트 전, 미국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였다. 개인적으로 그 시기까지 세상은 나름의 상식 선에서 움직였다. 세상은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공통의 '선'을 지향하는 듯 보였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가 주류였던 시기다. '브렉시트'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 유럽은 '그렉시트(Grexit)'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노출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유럽에서 내보내자는 이야기였다. 그렉시트에 대한 유럽의 자세는 납득 가능했다. 경제적 득실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2016년 영국의 유로 탈퇴 국민 투표는 달랐다. 유로존을 이탈할 이유가 그리스 만큼 명확한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내부 정치적 이유'로 시행한 국민 투표다. 이전까지 세계는 나름의 상식선에서 흘러갔다.

영국의 '브렉시트' 선언은 그저 해프닝일 뿐이며, 자충수가 될 것이 뻔한 그 정치적 행동을 할 없다고 여겼다. 당시 나는 브렉시트와 전혀 상관 없는 국내 '피혁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었다. 적잖은 비중을 그 안정적인 회사에 투자하고 있던 나에게도 '브렉시트'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불안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내 상식선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여겼다.

어두워진 밤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대한 개표방송을 온라인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끝까지 그럴리 없다는 확신을 했지만 개표방송 마지막에 코스피 상당수의 주식이 하방으로 내리 꽃는 모습을 지켜봤다. 브렉시트와 전혀 연관없는 '피혁회사'의 주식은 그중에서도 아주 무섭게 내리 꽂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고립주의를 영국 국민 다수가 생각한다고?'

황당과 믿을 수 없음이 교차했다. 그러나 브렉시트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이후 비슷한 사건이 몇몇 있었다. 2017년 버락 오바마의 재임 기간이 끝났고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이 진행됐다. 다수의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출마는 해프닝이라고 여겼다.

불법이민자를 추방하고 미국 중심의 고립주의,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과 중국을 향한 무역 전쟁. 당시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지는 공약들을 보고 방송에 전문가로 나온 패널들고 웃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재밌긴 하겠네' 정도 수준으로 넘어갔던 일이 결국 실제로 벌어졌다. 미국은 고립주의를 택했고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미중 무역 전쟁은 실제로 있었다. 세상이 거꾸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말이 '뉴노멀의 시대'다. '기존의 표준'이 사라지고 새로운 '표준'이 자리잡은 시대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이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라 여겼지만 실제로 탈세계화는 현실이 됐다. 누가 득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무역전쟁이 벌어졌다. 비로소 '파퓰리즘'의 시대가 열렸다. 국익에 관련 없이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입맛대로 정치를 했다. 국민 감정에 따라 정책이 움직이는 시대가 열리자, 탈세계화는 더 가속화됐다. 비로소 파퓰리즘에 반하는 '엘리트주의'를 지향하는 부류도 생겼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독재 국가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가졌다. 민주주의가 결국 '파퓰리즘'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러시아와 중국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 굳건하게 했다. 주요국 간의 '전쟁'과 '갈등'이라는 말이 나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다는 사실을 당연한 사실로 알고 지내던 과거는 사라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주요국들은 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카프카의 '변신'을 닮은 소설이지만 그 도입부를 제외하고 내용은 전혀 다른 반식으로 흘러간다. 카프카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오가며 현실 상황에서의 문제를 글로써 나타낸다. 과학기술, 사회문제, 인간 심리적 갈등에 대해 비현실적인 소재와 현실적인 문제를 적당히 섞어 표현하는 것이 이언 매큐언 작가와 '카프카'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1948년 런던에서 태어난 이언 매큐언 작가는 전쟁 직후,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의 세계에서 '브렉시트'를 목격한 지식인이다. 그가 목도한 영국의 정치적 흐름은 역방향주의, 고립주의였다. 바퀴벌레 총리가 만들어낸 역방향주의로 인해 인간의 삶이 어두워지고 고통스러워지면 본래 자신의 본체였던 바퀴벌레는 더욱 번성할 수 있게 된다. 맹목적인 파퓰리즘과 애국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가볍고 얇은 소설을 통해 묵직하게 담았다.

카프카의 소설을 최근에 읽고 비슷한 소재라 구매를 했다. 개인적으로 가볍게 읽기 위해 얇은 책을 구매했는데 의외로 가볍게 읽을 수 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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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국사 1 정치편 - EBS 최태성 선생님 고등 생강 시리즈
최태성 지음 / 스터디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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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효과적인 교육 매체다. 이해하기 쉽고 빠르게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흥미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차트, 그래프, 그림, 애니메이션, 감정, 분위기 등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을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여인이 있다.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개어 있다. 오른쪽 어깨 뒤로 구불 거리는 길이 보인다. 그녀의 이마는 넓은 편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를 그린 그림에는 눈썹이 없다.'

감을 잡았겠지만 '모나리자'다. 이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결국 '모나리자'를 떠올린다. 그림 한 장이면 바로 알 수 있는 걸, 글은 한참 설명해야 한다. 그래도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고로 비효율적이다. 인간의 뇌는 이미지로 기억한다.

언어는 선이다. 문자는 좌에서 우로, 소리는 앞에서 뒤로 정보가 나열된다. 이것을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선을 면으로 바꾸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이런 작업은 수동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능동적으로 이뤄진다. 이미지는 '평면적'이다. 추가 작업 없이, 정보가 바로 바로 들어온다. 빠르고 쉽다. 영상은 더 직관적이다. 공간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재밌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고'라는 것은 '공간적 정보 뿐만 아니라 시간과 감정을 연결하고 냄새, 촉감, 추상적인 것 등을 복합적으로 떠올리는 작업이다. 인간이 물론 시각 정보에 민감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비중이 높다는 것이지 절대적이진 않다.

예를들어보자. A라는 반에 서른 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중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3명이라고 해보자. 반에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지만 여전히 절대 다수는 27명이다. '비교적으로 많다'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은 다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시각 정보만으로 채워지진 않다.

눈을 감으면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잡생각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 올 공간이란 이처럼 친절하게 비워져 있지 않다. 거기에는 잡생각, 감정 등의 부유물들이 불규칙적으로 떠다닌다. 아주 불친절한 공간이다. 이 불친절한 공간에 정보를 집어 넣기 위해서는 불순물 덩어리를 적당히 이용해야 한다. 혼합해야 한다. 과거의 경험과 연결하고 흥미와 연결해야 한다. 다른 곁가지가 달리면 적당한 중량이 생기며 비로소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고로 이것은 받아들이는 양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 공간, 냄새 등 다각적 부유물과 결합하는 '능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영상'은 강압적이자 일방적으로 정보를 때려 넣는 작업이다. 정보를 받아 들이기는 쉬우나, 그것이 다른 부유물과 적당히 섞이지 못한다. 이질적인 외부 정보가 과도하게 들어오면 때로 그것을 불러들이거나 새롭게 해석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고로 학습이라는 것은 '학'이 하나요, '습'이 99인 능동동적 행위다. 한 번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99번을 소화시키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한상 차려놓는 것보다 떠먹고 소화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영상이 잘 자려놓은 밥상이라면 학습이란 그것을 떠먹고 씹고 소화시키는 과정이다. 잘차려진 밥상을 받는 것은 건강 유지 비결이 아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먹고 소화하는 능동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동적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초적이다.

영상 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고로 문해력은 떨어진다. 읽기, 쓰기와 같은 언어 능력에 손상이 온다. 영상은 급하고 빠르게 입력하는 좋은 수단이지만 소화력을 떨어뜨린다. 소화력이 떨어지면 이후에는 영상 학습에서도 능률이 떨어진다. 결국은 영상매체 학습도 글쟁이들의 영역이 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1세대를 공식 행사장에 들고 온 것이 2007년이니까. 2007년생 돼지띠는 태어날 때도 '스마트폰'이 있었다. 영상 환경에 더 많이 노출된 셈이다. 이후 2005년에는 4G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바야흐로 스트리밍, 동영상의 시대가 열렸다. 다수가 영상 매체에 노출되면서 학습 방식도 바뀌었다. 소화력은 떨어졌는데 잘 차려진 밥상이 끊임없이 오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떠먹여 주기 학습 방식이 습관화 되면서 학생들은 글을 읽기 어려워 한다. 이때 가장 적절한 대안은 '만화'다. 만화는 시각적인 요소가 많지만 적잖은 문자가 함께 적혀 있다. 직관적인 평면과 선의 조합으로 문해력을 높이기 충분하다.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인사'를 배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기초이자, 기본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기초적인 어휘를 먼저 공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학습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가장 먼저 쉬운 방식으로 하는게 좋다. 영화를 보거나 간단한 음악으로 흥미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공부는 꼭 책상 위에 정자세로 앉아서 딱딱하고 어려운 학습지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글을 읽기 불편하다면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영상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만화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효과적이다. 영상매체는 접근까지 너무 많은 유혹이 존재한다. 또한 의식하지 못하고 집중력이 흐트려지는 경우도 있다. 시청자의 집중력과 이해력에 연연해 하지 않고 일방 통행하는 영상보다 어쩌면 만화로 최초의 접근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최태성 작가의 '생강 국사'는 앞서 말한 선, 면, 공간을 적절히 배치하여 있다. 독자의 경험을 적절히 상기 시킬 수 있는 유머와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영상 매체의 홍수 속에서 비슷한 강의는 유튜브에서 간단한 검색으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문해력'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다. 흥미와 문해력을 함께 얻기 위해서 꽤 적절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챕터 뒷편에 요약본과 문제도 수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가볍고 흥미롭게 접할 수 있지만 결코 담고 있는 컨텐츠의 무게가 가볍진 않다. 내신과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성인에게도 꽤 즐겁게 읽힐 수 있는 학습지이자, 역사 만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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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조각가들 - 타이레놀부터 코로나19 백신까지 신약을 만드는 현대의 화학자들
백승만 지음 / 해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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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중반 서독에서 '탈리도마이드'라는 항경련제가 시판됐다. 이 경련제는 아이러니 하게도 경련을 멈추는 효과가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쉽게 잠에 드는 것이다. 1957년 10월 이로써 서독에서는 '탈리도마이드'를 '콘테르간(Contergan)'이라는 이름의 수면제로 시판한다. 이 약은 수면 효과가 강력했다. 또한 기존 수면제와 다르게 과다복용하여 자살로 사용되는 일도 없었다. 동물실험에서도 안정성이 검증됐고 쥐를 대상으로한 실험에서도 특별한 부작용이 없었다. '탈리도마이드'는 다른 효과도 있었다. 다른 수면제와 같이 진정 효과도 강력했다. 이후 약은 진정제로도 사용된다. 임산부에게 사용하여 입덧을 완화하는 용도로 쓰였다. 이 약은 독일 의약품 순위에서 아스피린에 이어 2위에 오르는 약으로 성장했다. 이후 이 약은 전세계로 뻗어나가 글로벌한 의약품이 될 예정이었다.

제약 회사들은 천 명분의 약을 시제품 명목으로 나눠주었다. 의사의 대부분은 이에 만족했다. 미국에서는 1957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약을 복용하였고 영국에서는 '독일'에서 쓰인다는 약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추가 심사 없이, 이 약을 승인했다. 이때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신임 심사관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프랜시스 켈리'다. 그녀는 박사 학위를 받고 식약처에서 신약 승인 심사를 담당했다. 이미 독일과 영국 등의 다른 나라에서 승인된 물질을 심사하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선임 심사관들은 '신입'인 그녀에게 조금 더 편한 업무를 주기 위해, 이처럼 이미 검증된 물질의 심사를 맡겼다. 그러나 이 의욕 맣은 46세 신입 심사관은 안전성을 이유로 승인을 보류한다. 당연히 승인될 것으로 여기던 물질이 승인보류되자 의사와 수업 업체는 약을 승인해 달라고 불만을 쏟았다. 켈리의 이런 까다로움에 동료나 선임 심사관들도 한 마디씩 했다. 그러나 그녀는 줄 곧 안정성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탈리로이드는 1년간 여섯 번이나 승인 보류 된다. 켈리의 융통성 없는 심사 조건에 모두가 답답해 하던 찰라 호주에서 논문이 나온다.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과 연관이 있다는 논문이다. 이후 사례를 조사해 보니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는 사산이나 유산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출산된 아이의 경우에도 팔과 다리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 기형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후 1962년 전세계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금지 된다. 이미 40여 개국에서 1만 2천여 명의 기형아가 나온 뒤였다. 그해 켈리는 존.F.케네디 대통령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다. 당시 탈리도마이드 아이의 40%는 1년 내에 다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지금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의약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기를 조금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의약품이 인간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아프리카의 노예를 아메리카 식민지로 데려갔다. 처음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유는 이렇다. '말라리아' 덕분이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 깊이 들어가면 심한 고열에 시달리고 급기야 사망하기도 했다. 다만 1820년 퀴닌이 분리 되면서 인류의 역사가 바뀐다. 퀴닌이 말라리아에 대한 치료효과를 보이면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종단, 횡단하며 식민지를 양산하기 시작한다. 인류의 역사가 제국주의로 흘라가는 시점이다. 그동안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깊은 곳까지 침투하지 못하던 하나의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후 유럽이 아프리카를 종횡하며 만들어낸 국경선 덕분에 지금 현재도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내전과 종교적 갈등으로 사망하고 있다. 의약품이라는 것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정확한 사례다.

타이레놀부터 코로나19 백신까지 이런 의약품들은 이처럼 우리 주변에 쉽게 접할 수 있으면서도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생명을 살리고 기적을 창조하는 분자 단위의 예술은 때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잘못 사용되기도 했다. 그만큼 분자를 다루는 이들의 영향력이 '핵폭탄'만큼 강력하다는 반증이다. 분자를 다루는 것은 단순히 의약품 분야에서만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퀴닌'을 합성하던 젊은 청년인 '퍼킨'은 퀴닌을 합성하다가 우연하게 검은 침전물이 플라스크에 형성되는 것을 발견한다. 플라스크를 깨끗이 씻기 위해 그는 그 불순물에 알코올을 집어 넣고 흔든다. 그러자 그 침전물은 알코과 섞이며 보라색을 띄게 된다. 보라색은 인간의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끝에 있는 색이다. 파장이 짧아 대체로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신경을 차분하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보라색은 예저부터 왕실과 최상위 계층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값비싼 색깔이었는데 이유는 이 보라색을 얻기 위해서 뿔고둥이나 달팽이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색은 자연에서 얻기 쉽지 않았다. 다만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보라색'을 발견한 '퍼킨'은 이후 이 물질을 정제하고 염료회사를 차리기로 한다. 이후 친구와 형을 설득하여 집 앞에 있는 헛간에서 창업을 시도한다. 이후 이 물질에 '모베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베인으로 만든 모직물은 천연염료보다 아름다웠고 값은 더 저렴했다. 이후 '바이엘, 회흐스트, 바스프 등의 회사도 함께 설립되며 지금까지도 꽤 규모 있는 거대 화학회사이자 제약회사로 남아 있다. 현대 화학 기업의 출발의 대부분이 염료회사였던 이유다. 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간의 발견, 특히 신약과 의약품에서의 발견은 '자연'에서 오거나, '우연하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세렌디피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오린 준비 끝에 찾아온 행운'이라는 의미로 의약품과 화학품에 적합한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우연하게 혹은 자연으로부터 모방하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상당수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것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준비가 필요하다. 어쩌면 기적이라는 것이 이처럼 꾸준한 준비 끝에 찾아오는 행운과 같은 것이 아닌지 '분자'의 세계를 보며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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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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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 삶의 생명력을 느껴라.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매순간 온전한 것은 없다. 무엇하나 머무는 것 없도 없다. 모든 것은 흐른다. 감정, 시간, 상황. 흐르는 어떤 것을 가르키며 '무엇'이라 이름 짓고 나면 그것은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다만 그것은 흐른다. 가르키는 바다는 한번도 같은 모양이었던 적 없다. 가르키는 산도 한번도 같은 형태였던 적 없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건 변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한다. 보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들이마신 숨과 내뱉은 숨도 그렇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함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변화 속에서 그것이 유한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일회적이다. 고로 모든 것은 희소하고 소중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인생의 최악은 고통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자각을 잊는 것. 그것이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무감각에서 나온다. 무감각은 무생명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살면서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함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반해도 모자른 시간, 대부분은 무생명을 사랑한다. 다수의 남성은 이성보다 '스포츠카'에 매력을 느끼고, 다수의 여성은 '이성'보다 '명품가방'에 매력을 느낀다. 다수의 부모는 '자녀의 존재'보다 '복종'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소유'할수록 존재감을 확인한다. 세상이 소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는 것은 그것이 '무생명'이기 때문이다. 무생명은 기본적으로 복종한다. 돌은 던지면 날아가고 종이는 접으면 접힌다. 생명은 이에 반한다. 생명은 발로차면 꿈틀거리고 던지면 다시 돌아온다. 무생명과 생명의 차이점이라면 '자율의지'다. 자율의지는 고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든다.

'너를 사랑하지마라. 너 자신이 되지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다.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종하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마라'

'이기심'은 현대 윤리에서 '죄악' 시 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타심'을 강조한다. '남을 돕고 살아라. 규범과 규칙을 지켜라. 양보하고 공유하라'. 다만 이처럼 '이기심'을 죄악 시 하는 것은 자칫,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을 근본으로 한다. 이기심은 지속을 가능케 한다. '이타심'은 듣기 좋지만 결국, 내면보다 외부에 중요도를 둔다. 스스로 외부의 상황에 기민하고 자신이 되기보다 다른 이와 관계 설정을 우선 시 한다.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이런 공동체, 집단 생존에 중점을 두는 사회문화가 형성됐다. 이처럼 중요도를 외부로 두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부정된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 WHO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4위, 일본의 자살률은 세계 10위를 기록한다.

칼뱅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 칼뱅(Jean Calvin)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개신교 분파다. 신의 은혜와 축복이 오로지 선발된 사람에게만 내려진다고 봤다. 신이 택한 자들이 근면하고 절약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북미 등에서 퍼져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서구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서 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태도는 경제적으로 이용되면 현대 자본주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된다. 칼뱅주의에 따르면 개인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적 번영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상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는 '이기심'과 거리가 멀다. 신에게 부여받은 어떤 것을 소중이 하는 것으로, 그것은 '생명중시'와 가깝다.

레코드 음악을 플레이하면 음악이 재생된다. 이것은 이미 녹음된 음악이 재생되는 것이지 레코드가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레코드와 같이 입력장치가 있다. "잘 지냈어?"라고 물으면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다수의 사람은 "잘지냈어"하고 답한다. 이는 녹음된 음악을 재생하는 역할일 뿐, 음악을 연주한다고 볼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의 경이로움은 '자율의지' 즉, 주체성에 있다. 입력된 정보를 단순히 입으로 읊어 대는 수준의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말에 주체성을 담는 것이다. 사람은 오롯하게 깨어 있다고 착각하지만 대부분 x값에 y이 대응되는 함수 원리를 따를 뿐이다. A라고 물으면 B라고 답하고, C라는 상황이 주어지면 D라고 자동으로 답하는 기계 수준의 삶을 산다. 고로 '수동적'이고 '이타적'인 사고방식은 '복종'이라는 심리 현상을 만들어 낸다. 외부의 권력이나 타인의 명령, 상황과 현상이 주는 문제에 정해진 값을 그대로 내뱉으며 기계 같은 삶을 산다. 이처럼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간 다수에 속하는데 그 광기가 역사에서 이용되면 파시즘으로 발현된다. 신의 권위를 이용하거나, 법과 국가의 권위를 이용하여 타인을 조종하는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독특한 종교에 심취하거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자율의지를 상실하고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는 경우다. 현대인은 어떻게 자신의 삶에 멀어지는가.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 그것 때문이 않을까 싶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때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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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겁지겁 먹고 말았습니다
린 로시 지음, 서윤정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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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는 '자율주행' 기능이 달려 있다. 자율 주행은 꽤 똑똑하다. 저절로 앞차와 간격을 맞추고 차선을 지킨다. 때로는 주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율주행'이라는 기능은 꽤 편리한 기능이지만 믿고 맏기기 힘들다. 그 믿음의 담보가 목숨이기 때문이다. 무척 편리한 이 기능은 말 그대로 '보조'로 밖에 사용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자율주행을 보여 주겠노라' 말하면 손과 발을 떼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수초 혹은 수분 정도 지켜본다. 그것이 '자율주행'에게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다. 사람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한번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아주 약간만 느껴보고 죽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는 '자율주행' 기능이 있다. 이 자율주행은 '무의식'이 담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이 관장하는 자율 주행에 몸을 맡기고 '의식'은 다른 곳으로 떠난다. 언젠가 때가 되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을 반복한다.

물을 한 잔 들이키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을 입에 문다던지, 어떤 이들은 본인도 모르게 잠자리에서 SNS를 확인한다. 누군가는 눈을 뜨지마자, 허겁지겁 상황이 주어진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이들은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있을까.

버릇이 되다시피 깊게 배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인(印)이 박혔다.'라고 한다. 인(印)은 도장을 뜻하는 말로 하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것이 '뇌'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겨울, 혹한기 훈련을 했던 적 있다. 혹한기 훈련 중에는 군용 텐드를 설치하고 그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선 긋어준다. 물줄기는 처음에는 아주 앏게 그 자국을 따라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길'이 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물은 그 자리를 반복하여 지나가고 결국 그것은 '인(印)'으로 남는다. 뇌도 비슷하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하나의 실선이 긋어지면 아주 얇게 자국을 따라간다. 그 몇 번이 반복되면 그것은 '길'이 되고 결국 인(印)으로 남는다. 한 번 물길이 크게 트이고 나면 물길을 다시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길을 내는 것은 거의 초인적인 힘을 주어야 한다. '시간'이 무념무상히 만들어낸 현상을 인간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숲길에는 사람 다닌 자국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길'이 됐다. 처음에는 한 명, 다음에는 두 명이겠지만 점차 그 길은 두터워진다. 언젠가 날을 잡고 한 사람이 최소한의 시간으로 같은 길을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사람은 다님길로만 다닌다. 그것을 '습'이라 한다. '습'은 '인'으로 박힌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그저 박혀진 '인'데로 '습'을 행하며 산다. 다님길은 점차 넓어지고 커진다. 고로 더 쉽고 빨라진다. 무의식은 그렇게 작동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살부터 새겨 온 수많은 행동 중의 반복을 '인'으로 박아두고 산다. 고로 스스로 생각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물줄기대로 흘려가며 산다. 삶의 축복은 주체성에서 나온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축복이다. 다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치 반쯤 죽어 있는 좀비처럼 '본능'과 '무의식'에 이끌려 살 뿐이다. 머리를 감을 때, 머리 감는 손가락 끝은 머리감는 일에 충실하고 있나. 양치질을 할 때는 칫솔모가 치아 사이 사이에 잘 닦아내고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스마트폰에 눈을 붙이고 있거나 귀를 붙이고 있다. 지나간 어제를 생각하고 다가 올 내일을 걱정하며 이를 멀티태스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멀티태스킹에 능숙하다고 착각한다. 다만 그것은 착각이다. 애초에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의식을 가지고 해야하는 일에는 확실히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의식은 시계바늘과 같다. 딱 하나의 지점만 가르킬 수 있다. 2시를 가르키며 동시에 4시를 가르키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의식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에, 인간의 뇌는 그 중요도에 따라 일부 업무를 '무의식'에 전담시킨다. 바로 '자율주행'이다. 자율주행은 '의식'이 아니다. 즉, '사람'이 아니다. 쉽게 말해 과거 데이터를 통해 학습된 반복을 이행할 뿐이다. 삶은 어느 정도 과거의 데이터가 유용하게 사용된다. 다만 그것이 곧 미래도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우리는 미래와 현재를 모두 자율주행에 맞춘다. 주사위 굴리기에서 지난 3번의 독립시행이 4번 째 시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밥을 먹을 때, 밥알의 식감은 어떤가. 혹은 목 넘김은 어떤가. 그 향은 어떻고 미세하게 올라오는 짜고 달고 신 맛들은 모두 온전하게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식사를 무의식에 맡겨두고 TV나 책을 보고 있진 않은가. 멀티 태스킹은 온전해야 할 의식은 '식사'에 0.5 정도를 사용하고 다른 무언가에 0.5 정도를 사용한다. 비워진 각각의 0.5는 무의식이 채운다. 반 좀비 상태로 식사하고 말하고 살아간다. 앉아 있다면 바닥에 닿아 있는 엉덩이의 촉감은 어떤가. 서 있다면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각은 어떤가. 누워 있다면 등에 닿는 내 몸의 무게감은 어떤가. 숨을 쉴 때, 들숨과 날숨은 완전히 들어오고 나가는가. 콧속을 지난 공기가 가슴을 들어 올리게 하고 다시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가. 내 얼굴 근육, 어깨 근유그 다리와 팔 근육에는 의식없이 힘이 들어간 부분은 있지 않은가. 의사가 '식후복용'이라고 적힌 약봉지를 건내주는 것은 그것이 '식사'와 연관되서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세 번을 나눠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깨닫는 것은 하루 세번 정해진 시간에 깨닫는게 좋다. 그것이 '식사 시간' 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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