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인생 불변의 지혜 - 공자·맹자·순자·묵자·노자·장자·한비자
옥현주 지음 / 유노책주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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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란 중국 춘추전국시대 동안 나온 다양한 학파의 사상가들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 이를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천재들이 고민했고 이후 그들은 인류의 스승격으로 지금까지 가르침을 준다.

대표적으로 학파와 사상가를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가, 유가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와 인을 강조했다. 대체로 '질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즉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소임에 최선을 다하면 세상은 저절로 질서를 잡고 아름답게 운영된다는 의미다.

이후 맹자와 순자가 이 유가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 시킨다. 개인적으로 성선설의 맹자와 성악설의 순자를 보면 '붓다'와 '애덤 스미스'가 떠오른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대체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역시나 모든 철학은 곧 하나로 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커다란 흐름을 이제 말하게 될 '도가'의 사상과 연결해 볼 수 있다.

도가, 도가는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다. '아이에게 평생 딱 한 권의 책을 읽힌다면 무슨 책을 읽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노자'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도가는 '무위자연' 즉 모든 것에는 순리가 있고 모든 것은 순리대로 움직인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이 꽤 수동적인 태도처럼 느껴질수도 있으나 원래 인위적인 것은 항상 힘을 잃고 순리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면 인생에 대한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인 인정이 공존하도록 한다. 참고로 비틀즈의 'Let it be'를 보면 도가의 철학과 닮은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법가, 법가는 한비자의 사상을 대표한다. 한비자는 엄격한 법률과 통치를 통해 국가의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이기에 상과 벌을 통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자백가 사상 중에 가장 늦게 출현했으며 현대인들이 생각하기에 '합리성'과 맥을 같이 한다.

묵가, 묵가는 묵자를 중심으로 사랑과 평등을 강조한다. 묵자는 동양의 예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사랑'을 강조했는데 그가 '묵'이라는 글자가 말하듯, 그는 출신 신분과 관련 없이 만인에 대한 사랑을 말했다.

제자백가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사상적인 틀은 우리 삶과 사회 구조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들의 탄생 배경에는 '혼란스러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태평성대 시대에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던 것들을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고민하게 된다. 인간은 보통 '상처'를 입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 이후에는 항상 커다란 번성이 있었고, 혼란 이후에는 이처럼 철학적 성장도 있었다.

제자백가는 단순히 중국에서만 중요한 철학은 아니다. 이는 같은 문화를 공유하던 일본과 한국 등에 영을 끼쳤다. 특히 유가의 덕치는 동아시아에서 오랜 세월 지배적인 통치 이념이었다. 또한 법가는 중앙집권 체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진나라와 한나라 법 제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런 학파들은 현대의 동아시아 문화에서도 교육, 정치 시스템, 윤리 기준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데, 현재 동아시아의 문화적 혹은 경제적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그들의 영향력이 현대 '사피엔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자백가는 단지 오래된 사상이 아니다. 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혈관을 타고 직렬로 연결된 우리 조상들의 살았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었고 그것은 우리에에 전달되어 아이들에게 넘겨주는 중요한 철학적 유산이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수백년 혹은 천년도 훌쩍 넘은 오랜 선인에게 맡기고 우리는 지금의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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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게 참 어렵더라
송인창 지음 / 온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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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을 하나 만들었는데 하루 두 번을 헬스장을 가는 것이다. 가서 대단한 것을 하진 않는다. 그냥 트레드밀 한 시간 씩 걷고 오는 것이 전부다.

한번도 가져 보지 않은 루틴을 가지며 느낀 점이라면, 생각보다 이미 그러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일과를 마치면 캔맥주를 따서 마시는 일상은 모두가 공유하는 삶이라 여겼다. 그것이 일반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은 환경이 바뀌며 알게 됐다.

그렇다.

이미 그것이 루틴인 사람은 차고 넘쳤다. 건강한 루틴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비슷한 곳에 모여 있었다. 나의 루틴 중 그들을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삶이 그러지 않은 사람들과 환경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랬다.

아침 일찍, 저녁 늦게 두 번을 운동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사람들은 과연 직업이 뭘까.’

대부분 무엇하는지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벌써 알게 된 일부는 강사나 의사, 치과의사, 사업가 등이었다. 어쨌건 대부분 꽤 넉넉한 소득을 갖고 있을 법한 직업군들을 알게 됐다.

몇 명을 그렇게 알게 된 뒤에 옆에 운동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저 사람도 자기관리라면 꽤 하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일까.'

그러며 스스로를 보았다.

나의 경우에는 의지가 약한 탓에 거창한 '자기관리'를 목표로 운동을 시작하진 않았다. 그저 하루 시작과 끝에 샤워하러 가는 분위기로 루틴을 잡았다. 어차피 샤워는 해야 하고, 그냥 씻기는 뭣하니, 운동이나 좀 하다가 씻자는 꽤 엉터리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저 사람들이 나를 볼 때도 비슷하게 생각할까.'

송인창 시인의 ‘평범한게 참 어렵더라’를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공간, 공기, 환경이 같아도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오직 본인만의 관점이고

나의 색깔인 것이다.

파란색이어도 좋고,

빨간색이어도 좋다.

색이 섞여도 좋고,

단색이어도 좋으니

나를 나타내는 색깔로

살아갔으면 한다.

어떤 색깔이든

조화를 이룰수 있는 색깔이기에.

다른이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트레드밀만 60분씩 두 번 타고 집으로 가는 ’나’ 라는 사람의 존재는 어떻게 비칠까.

어느 집단에 속해 있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겠다. 기본적으로 '나'의 속성은 '촌스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단한 환경에 있어도 '나'는 꽤 촌스러운 사람이다. 남들처럼 거창한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실행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꽤나 촌스러운 이유로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소주보다는 콜라를 좋아하고 고급진 뷔페나 레스토랑보다는 죠리퐁에 우유를 말아 먹는 편을 '맛있다'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본질이 그렇다보니 나이가 먹을수록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평범함'과 거리가 멀어지는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방대한 지식인과는 거리가 멀고 10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과 취업을 했지만 TV에서 보이는 잘난 '유학파'들과도 거리가 멀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어도 항상 '이색적'인 것이 '고전적 의미'의 어떤 것과 괴리가 있다.

사람마다 색깔이 달라서 이런 사람도 분명 있겠으나 거시적으로 나와 닮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시기가 되면 '콜라'보다 '술'이 좋아야하고, '사이다'보다 '커피'를 좋아해야하고, '나이키'보다 '루이비통'을 선호해야 하겠으나, 나에게 술, 커피, 루이비통은 제 나이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위장하는 주변 아이템들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바쁘게 남들이 말하는 '보통'에 다가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삶을 낭비해 내고 있는 듯 했다. '나이값'하기 위해, '평범'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스스로를 보고 가끔은 안타깝게 여길 때가 있다. 송인창 시인은 '태권도'라는 진로에서 다른 진로로 삶의 배경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 다양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나오며 했던 삶과 오버랩 된다.

생각해보면 너무 '스스로'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도 참 주책 맞을 때가 있고, 그렇다고 '평범'하고자 목숨거는 것도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냥 그 중간 적정선에서 걸쳐져서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촌스러움을 가지고 겉으로 얌전 빼는 '인지부조화'의 삶이 '숙명'인 것 같다.

애초에 '평범'이라는 것은 워낙 쏜살같이 움직이는 과녁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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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장 수학의 힘 - 지방대 나온 엄마가 두 아이 서울대 보낸 방법
진미숙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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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에는 '명시적 앎'과 '암묵적 앎'이 있다.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들어보자.

명시적 앎이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1. 자전거에 올라탄다.

2. 오른발과 왼발로 패달을 밟는다.

반대로, 암묵적 앎은 이런 것을 의미한다.

0.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나 자전거를 탈 줄 안다.

그렇다.

'명시적 앎'이란 표면적 지식이다. 그 또한 아는 것이다. 그러나 '명시적 앎'만 가지고 자전거를 잘 탈 수는 없다. '암묵적 앎'으로 '앎'의 형태가 변화하기까지 '명시적 앎'의 도움을 받을 지언정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즉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에게 '한국어를 할 줄 아나요?'라고 묻는다면 '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한국어를 잘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그 순간부터 엄청난 사족이 달리기 시작한다.

'매일 꾸준히 해라' 혹은 '드라마를 봐라', '일기를 써라' 등등

암묵적 앎은 '무의식'에 내재된 앎을 말한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언어화'할 수 없다.

고로 '암묵적 앎'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어화'해야 한다. 이때 '암묵적 앎'은 '명시적 앎'의 형태로 변환된다. 그러나 '명시적 앎'은 '암묵적 앎'의 형태로 변환되어 저장되지 않는다.

'명시적 앎'은 그저 표면일 뿐이다.

2024년 올 여름은 꽤나 무더운 편이다. 자, 이 무더위를 언어를 언어를 통해서 '단 한번도 더위를 겪어보지 못한 '알레스카의 어린이'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온갖 수식에, 예시에, 설명들이 덧붙겠지만 상대는 스스로 경험했던 '암묵적 앎'을 다시 '명시적 형태'로 만들어 '상'을 지을 것이다.

고로 '안다'라고 하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다.

'학습'이라고 하는 것은 '배울 학', '익힐 습'의 한자를 사용한다.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학'은 명시적 앎을 아는 것이고, '습'은 암묵적 앎을 아는 것이다.

명시적 지식은 원래 일회만 얻어도 얻을 수 있다. 물론 '망각'에 의해 서서히 잊혀지겠지만 그래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언제나 책을 펴거나 인터넷을 열면 존재한다. 그러나 '암묵적 지식'은 쉽게 망각하지 않지만, 쉽게 얻지도 못한다.

해외로 여행을 가서 한달 간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는 몸에 익은 '암묵적 앎'의 형태로 '한국어'가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원이나 학원은 '명시적 앎'을 얻는 장소다. 이곳에는 당연히 분야의 전문가가 존재한다. 이들은 '암묵적 앎'이 충만한 인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이 '암묵적 앎'을 명시적 앎의 형태로 바꾸어 전달하면, 학생들은 명시적 앎의 형태로 정보를 받아들인다. 고로 이것은 스승만큼이나 제대로 된 정보로 자리 잡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것이 암묵적 형태로 저장이 되는가.

바로 익히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학습'에서 학은 배운다는 의미이고 습은 익한다는 의미다. '학'은 즉각적이고 일회적이고 쉽고 빠르고 언어적이다. 반면 '습'은 지연적이고 지속적이고 느리고 경험적이다.

고로 모든 학습에서 '학'이 1이고 '습'이 99다. 그것은 경험적으로만 쌓이고 지속해야하고 느리고 경과는 지연적으로 나타난다.

'익힌다'라는 말은 '익다'를 기본형으로 갖는다. '익다'는 것은 '소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변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치가 익거나 과일이 익거나 삶은 고구마가 익는 것 모두 딱딱하거나 덜 성장한 어떤 것이 '성숙'의 단계로 시간과 과정에 의해 '소화가능 수준'으로 물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익히는 것'이다.

김치가 익고, 고구마가 익고, 과일이 익는 것처럼 어떤 것이 익혀지는데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학습도 마찬가지다.

학습에서 '학'은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학습에서 '습'은 가져 온 재료를 익히는 과정이다.

소화할 수 없는 재료만 잔뜩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 몸에 쌓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몸에 쌓이기 위해 그것은 반드시 특정한 시간을 가지고 익어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경험에 의해 축적된다.

'고로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해 쌓여야 한다.

누구의 말처럼 실패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패를 해보는 것이고, 실패는 거듭할수록 성공의 확률이 높아진다.

주사위를 던져서 6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주어진 6분의 1의 확률에서 하나를 사용했다는 의미이고, 그 다음의 도전 확률은 3분의 1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고로 '방법'을 논하는 모든 자기계발서는 '작가'의 '진짜 진심'이 담겨진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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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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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오디오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평소 미루던 '청소', '빨래', '설거지', '운동'을 한다. '윌라오디오북'을 구독하면 가장 달라지는 것이 바로 주변이 깨끗해진다는 점과 조금더 건강해진다는 점이다. 성격성 멍청히 앉아서 오디오북을 듣질 못한다. 그렇다고 '잠들기 전'에 듣느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잠들기 전에 오디오북을 듣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분명 오디오북은 숙면을 돕는다. 잠이 어려웠던 시기, 오디오북을 시도했었다. 오디오북은 잠을 유도했으나 나중에 어디까지 들었는지, 찾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보면 대체로 책의 초반부만 듣고 넘어가게 된다. 그 뒤로 잠들 때를 제외하고 잡무나 운동처럼 스스로 아깝다고 느껴지는 시간에 오디오북을 듣게 된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면서 '윌라'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를 '윌라'를 통해 들었다. 소설이 재밌는 것도 분명 있겠지만 '해당 도서'는 '윌라'에서 재공하는 '오디오북'을 꼭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우 분들의 연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입체적인 인물들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디오북'으로 '인문학'이나 '역사', '철학'을 들을 수는 없다. 몇번의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밑줄'을 치고 싶은 구절이 나오면 서점으로 달려가 종이책을 사버리곤 했다. 그렇게 '윌라'의 사용법을 '소설류'로 한정했다.

이후 '소설' 중 '김호연 작가'의 '고스트라이터즈'를 찾게 됐다. 배경 지식 없이 듣기 시작했다. '김호연 작가' 글의 특징이라면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상을 이야기하듯, 가볍게 '툭'던지는 글 속에 적잖은 메시지들이 있다.

그의 글은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는 '일일드라마'와 같다. 잔잔하고 일상적이면서도 항상 다음이 궁금한 그런 글.

그러나 '고스트 라이터즈'라는 참신한 소재라니 궁금하여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재는 여느 웹소설에서 볼 수 있을 꽤 진부한 소재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 소설의 중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은 재미보다 궁금한 것이 우선이다.'

그렇다. 글이 재미로 승부를 보려고 하면 '영화', '드라마', '만화', '유튜브'와 같이 더 자극적인 플랫폼과 경쟁해야 한다. 그 도파민 덩어리와 경쟁하기에 '글'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때로는 심심하기도 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더라도 TV에서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소리가 들리면 주의력은 바로 그쪽으로 달라진다. 고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

인간은 재미보다 '호기심'에 자극한다. 그 말에 적극 공감했다. 재미있는 것에 인간히 매혹한다면 '공포나 스릴러, 추리 소설'은 그에 반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에 더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궁금'해서 인 것 같다.

소설은 고스트 라이터즈가 쓴 글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았다. 꽤 진부한 소재이지만 펼쳐지는 서사가 궁금해서 끝까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툭툭' 던져지는 이야기 속에 뼈 있는 철학과 유머도 생각해 볼 무언가가 많았다.

그의 소설의 후반부에는 '나쁜 것'은 '나뿐인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 그것이 어원인가, 싶어 찾아 봤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

곰곰히 생각하고 곱씹다가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반대로 '멋있는 사람'은 '무엇'이 있는 사람이란다. 그 사람에게 '무언가'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즉, 역시 앞선 맥락과 같이 '호기심'이 매력이라는 의미다.

가만히 듣다가 몇번을 멈추고 메모장을 열게 한다. 역시 재미있다기보다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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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그리는 여인
새파란 지음 / 하움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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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고통과 치유', '사랑과 상실'.

'바람을 그리는 여인'은 '새파란' 작가가 느끼고 탐구한 여섯 가지를 엮은 소설이다. 작품은 여섯가지 단편으로 만들어졌으나, 각 단편이 하나의 장편을 완성하는 옴니버스 구조다.

각 단편은 각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들이 겪는 사건들은 교묘하게 얽히며 하나의 서사를 가진다. 서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소설 전체는 그렇게 완성된다.

소설의 '핵심 메타포'는 '바람'이다. 바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한다.

가수 '나얼'의 노래는 '바람'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한다. '바람기억'이나 '바람이 되어' 혹은 'My Story'에서도 어김없이 '바람'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추억에 가수 '나얼'이 있다. 예전 함께 일하던 동료는 수년 간 나얼의 노래만 듣곤 했다. 스치듯 그 음악을 들을 때면, 과거, 같은 노래를 듣던 순간이 기억난다. 음악이 스치고 간 자리에 '과거'의 향수가 남는다. 지나간 것이 '존재'했다는 착각이 들만큼 선명해진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는가. '과거'라는 이름이 지어지면, 그것은 비록 '추상적인 명사'라고 하더라도, 인격을 부여하고 싶어진다.

야속한 '과거' 같으니라고...

'과거'라는 현상에 인격을 부여하고 서운함을 읊고나면 과거는 사라지고 간 뒤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My Story'의 가사에는 이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바람을 볼 순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마음을 볼 순 없지만 누구나 알 수가 있어, 무엇을 원하는지'

바람은 보이지 않는 '무존재'다. '존재'라기보다 '현상'이다. '바람'은 '현상'을 '명명'한 명사다. 그러나 그것을 명명하고 나면, 우리는 그것에 '존재'의 '상'을 짓는다. 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은 삶속에 종종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아, 이러려고 그랬구나' 그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각 인물들은 외부에서 느껴지는 '바람'인지, 내부에서 느껴지는 '바람'인지를 완성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그 완성할 수 없는 그림은 '이상'이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 잡고자 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들...

소설의 매력은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이다. 바람이라는 불확실성과 한계가 명확해지는 경계점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갈망. 각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가 독자에게 여운의 바람을 남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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