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발검무적 지음 / 파람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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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어떤 사람일까.

해외에서 10년 간 농도 깊은 생활을 했다. 농도 깊은 생활이란 꽤 현지 깊숙한 곳에서 생활했다는 의미다. 내가 살던 곳은 한국인은 고사하고 동양인 자체를 본 적 없는 백인들의 동네였다. 나 또한 길을 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동양인을 보면 신기한 눈으로 보게 될 정도였으니, 농도 깊은 해외생활이라는 것이 과장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한국인들은 '아시아인의 스테레오 타입'의 전형인 '내향성'과 '외향성'을 둘다 갖고 있다. 특히 '한국인'을 친구로 두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아는 한국어가 있다며 다가와서 하는 첫 말은 대부분 '욕'이다.

'어디서 배웠느냐' 물으면 한국인 친구가 알려줬단다. 한국어를 알려 달라는 외국 친구들에게 '나는 바보입니다'를 비롯해 다양한 비속어와 욕을 알려주는 한국인들의 예외없음에 가끔 웃음이 날 정도다.

'한국인'하면 또 떠오르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한국인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말이 '빨리빨리'다. 극강의 효율을 자랑한다. 이런 효율성은 식문화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식가위'는 전혀 어색한 도구가 아니다. 고기를 굽고 잘라 먹는 모습은 '효율성'의 극강이다.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두루마리 휴지도 그렇다. 가위는 보통 재봉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휴지는 식탁이 아니라 변기 위에 비치되는 물품이다. 이런 것들이 극강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한국이 아니라면 흔치 않다.

초고효율을 위한 삶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다. 최근 이슈가 되는 7세 고시가 그렇다. 고등 입학 전, '수능 영어'를 마스터하는 고효율을 택하면, 차후 국어와 수학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런 대입 전략이 한국에서 유행하는 것도 어찌보면 그럴싸하다. 다만 삶에 효율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결국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나, 하는 회의감에 빠진다. '삶'의 초고효율은 '죽음'이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인의 '자살률' 또한 최고에 이른다.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삶을 위해 달려가다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에 닿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은 허무주의와 연결된다. 사실 우리 사회 전체가 '최고효율'을 향해 달라가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전체가 우울하고 낭만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유튜브 쇼츠를 보다보니, 만화가 김풍 작가의 말이 나왔다.

"낭만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만화가 '김풍'은 답했다.

"낭만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효율적인 것과 가장 거리가 먼..."

'당췌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 무슨 돈이 되는데..'하는데 그냥 하는 것. 그것을 '낭만'이라고 볼 수 있단다. 그럴싸하다.

그 말을 듣고, 난 뉴질랜드에서 보았던 어느 일요일 오후가 떠올랐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무 목적도 없이 두어 시간 햇빛이나 쬐고 돌아왔다. 거기에 나와 있는 다수의 사람들도 그러했다. 한국이었다면? 아마 그 시간에 단어를 외우거나, 자기계발서를 읽거나 했을 듯하다. 어쩌면 '뭐라도 유익한 콘텐츠'를 보며 시간을 '활용'했을지 모른다. 그 곳에서는 누구도 '시간 아깝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햇살이 좋으니 앉아 있는 것이고, 바람이 좋으니 아무 말 없이 있을 뿐이었다. 삶을 그 자체로 사는 것도 괜찮았다.

실제로 효율과 전혀 무관한 삶 그것이 '낭만'인 듯하다. '한국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인은 효율성과 경쟁, 성취 지향성이 몸에 배어 있다. 이게 교육과 노동, 인간관계 전반에까지 확장된다. 폭탄주를 만들어 최대한 빨리 취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며, 가장 많이 노는...

어쩌면 유치원에서 시작된 경쟁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어쩌면 죽는 순간, '그래 이겼다.' 혹은 '그래, 졌다'라는 의미 없는 승패를 나눌지 모른다. 그 부질 없는 효율에 대해 장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한국인의 특성은 치열한 근대화, 짧은 시간 내 압축 성장으로 이어졌다. 다만 모두가 '경쟁자'가 되고 '낙오되면 죽는다'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결국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 역시 10년 넘게 해외에서 살고 돌아왔다. 다만 여전이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한국인은 스스로는 고통 속에 있지만 겉으로 완전한 존재들이다. 이런 '외부'에 대한 인정을 위한 최우선 시 하는 문화가 한류의 뿌리가 됐을 지도 모른 것이다.

어떻게 5,100만의 사람들을 일반화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분명 외부 혹은 내부에서 말하는 일반화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숙제의 시작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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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고정욱 지음 / 샘터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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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누구나 소수가 되고 다수가 된다.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누구나 장애인이 되고 비장애인이 된다.

왼손잡이, 근시, 색맹, 난독증, 난임, 주의력 결핍...

20세기 초, 왼손잡이는 '악마의 손'으로 여겨졌다. 이는 교정의 대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근시들 또한 '전투수행 불능자'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징집 불가자들이였다. 난임 또한 오랜 세월동안 '장애'로 여겼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모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출산하지 못하는 아내는 7년 후에 폐출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지금 생각해보건데, 무엇이 장애고, 무엇이 아닌가.

과거 '장애'로 구분하던 것들의 상당수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흔한 증상들이다.

왼손잡이는 때로 '좌뇌'와 연결되어 권장하는 부모가 있을 정도다. 근시 또한 시력교정을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이들에게 '똑똑할 것 같다'는 이미지를 가져다 씌우기도 한다. 난임 또한 고통에 있어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하고자 한다.

'장애'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주관적인 언어다.

과거에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던 것, 지금은 그렇고, 과거에는 아니던 것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언어가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

나의 경우, '글씨체'에 대한 매우 큰 컴플렉스가 있다. 사회 생활 초기에 직장 상사로부터 글씨체 지적을 받았을 정도다. 이런 컴플렉스는 실제로 사회생활 중 일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다시말해서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명확하게 장애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장애는 명확히 눈에 보인다. 손이 없거나, 팔이 없는 경우도 있고, 다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다만 어떤 장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가 오랜시간 쌓아 왔던 다양한 데이터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증상'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증상'이 더 다루기 어렵다.

'고정욱' 작가의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이라는 수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굴뚝에 들어간 두 아이 중 한 명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다면 누가 먼저 얼굴을 씻을까."

상대방의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본 아이가 씻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미 깨끗한 쪽은 본인을 닦고, 검댕이 묻은 쪽은 상대를 보고 안심할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상대를 보고 자신을 파악한다. 본인이 완전하다는 착각에서 기인한 '장애'라는 표현은 그 단어 자체가 그다지 완전한 표현은 아닌 셈이다.

고정욱 작가는 포클레인이 땅을 팔 때 엔진만큼 중요한 것이 묵직하고 거대한 돌이라고 했다. 자신을 지상으로 잡아 줄 무게중심이 없다면 외부의 무게에 흔들리는 것은 본인이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내부에는 묵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둘 거대항 돌덩이 하나씩이 가슴에 얹혀 있다. 그 무게추는 본질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중심이 된다.

유전학자 크레이그 벤터는 '모든 인간은 유전적으로 변이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서로 다르고 다르다는 것은 사실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50년대 미국 공군은 비행기 조종석을 설계하기 위해서 조종사들의 평균 체형을 바탕으로 좌석을 설계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조종사들의 실수와 사고율이 크게 줄지 않았다. 이후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단 한명의 조종사도 그 '평균값'과 딱 맞는 사람이 없었다.

평균이 주는 착각이 그렇다. 기준선이라는 것은 참으로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시력 2.0을 기준으로 두면 1.0도 장애다. 신장 180cm를 기준으로 두면 180cm도 장애라고 볼 수 있다. 다수가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소수는 외면 당한다. 그러나 기준점이라는 것은 워낙 다양하게 찍을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 우리 모두는 다수인 동시에 소수가 된다.

고정욱 작가이 말처럼, 우리 안에 있는 돌덩이는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해주는 중심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과 결핍, 컴플렉스와 트라우마, 그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토대가 된다.

결국 인간은 완전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때때로 가장 큰 변화는 그 불완전함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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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의 초등생활 상담소 - 좌절내구력 강한 아이로 키우는
조선미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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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서적을 읽는데 이처럼 단호한 문장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시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조선미의 초등생활 상담소'를 읽다가 보게 된 문장이다. 이처럼 현실적인 말이 있을까. 특히 최근 모든 것을 아이에게 설득시키고 설명하라는 '착한 부모(?)'가 유행하는 시기에 '조선미 교수'는 말한다.

'설득하려고 하지말고 지시하라'

아이를 기름에 있어 '설명과 설득'보다 빠른 판단이 더 중요해진다. 부모의 단호함이 아이를 더 보호할 때가 있다는 의미다.

차도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지금 덤프트럭이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안전한 쪽으로 오는 게 어떻겠어?'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설득, 설명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의 옆구리를 걷어 차는 바가 더 아이를 보호하는 바일 수도 있다.

'지금 그만해'라고 말할 때, 수십 가지 이유는 필요 없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고로 '지시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아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아이가 하면 안되는 일을 할 때, 거기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해야하는 일은 그냥 하는 것이고 하면 안되는 일은 그냥 하면 안되는 것이다. 잘못한 일에 '왜 그랬어?'라는 이유도 필요없다. 잘못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알려주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

'친구를 때리면 안돼'

'왜 안되는데?'

부모가 설득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그 행동을 고치지 못한다. 혹은 부모의 설명이 완전하지 못하면 그 역시 아이는 다른 이유로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로 아닌 건 아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아니다. 부모가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을 만들어주고 아이에게 기준이 생기면 그 뒤에 설득과 설명이 필요하다.

'조던 피터슨'의 '인생의 12가지 법칙'에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

바로 다섯 번째 법칙이다.

다섯 번째 법칙,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아이가 반복해서 선을 넘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모의 단호함이 반드시 필요하다. 피터슨 또한 이 법칙을 통해 강하게 말했다. '훈육은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이다.

'아이에게 제한을 주지 않으면 결국 세상은 그 아이를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당장 아이가 받을 상처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 관계 속에서, 아이는 끊임없이 경계를 요구 받는다.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으려면 집에서부터 경계를 배워야 한다.

부모가 '설득과 설명'으로 아이의 잘못을 고쳐 줄 수는 있다. 다만 냉정히 말해서 사회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과거 스탈린은 이런 말을 했다. '한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다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서 '회사 인사과'에서 일하다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지 않을 때가 있다. 들어온 이력서를 '엑셀'로 불러오기 오기하고, '나이 순 정렬' 그리고 특정 나이대를 제외하고는 그자리에서 삭제 해 버린다. 성별, 학력으로 정렬 후 몇 번을 삭제하고 난 뒤, 남는 인원만 '면접'으로 불러도 며칠 간 면접을 진행해야 할 정도다.

그 삭제된 수십, 수백 건의 이력서에 '자소서'라던지, '자격증' 따위는 솔직히 말해 '면접진행자'들에게 관심없다. 사회는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 또한 타인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는가.

학교만 가더라도 교사는 아이 하나 하나에 초점을 두고 관리할 수 없다. 본래 '인사'라고 하는 것은 일대일이 아니라 일대다수다. 고로 냉정하지만 그렇게 진행할 수 밖에 없다. 때로 우리 아이는 이런 냉정함에 노출되어야 한다. 온실속 화초는 크게 성장할 수는 있지만 온실 밖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 알수는 없다.

조선미 교수의 말도 비슷하다. 아이가 친구를 밀쳤을 때, 엄마가 '왜 그러했어? 엄마는 속이 상해'라고 말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오히려 단호하고 조용하게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들은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 없다. 고로 훈육은 설명이 아니라 '경계'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경계는 부모가 기준이다.

'기준이 너무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 아닌가요?' 그렇다.

본래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것은 '법'과 다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 맞다.

몇살부터 아저씨고, 몇살부터 삼촌인가. 그런 건 없다. 그저 각자의 기준이 있고 아이는 그 기준을 부모로 부터 배워야 한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자인 제롬 케이건은 '규칙이 없는 아이는 불안하다'라고 했다. 아이는 자유를 원하지만 동시에 적당한 '규제'도 필요하다. 실제로 2013년 미국 심리학회지인 APA에 따르면 일정한 규칙과 처벌이 일관되게 적용될 경우, 아이의 자기 통제력과 충동 조절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샹된다는 내용이 있다.

반면 부모가 지나치게 아이의 감정을 배려하거나 훈육을 피하게 되면 아이는 상황판단보다 '자신'의 '기분'에 의존하게 된다. 훈육은 사랑의 다른 형태다. 그 방식이 꽤 사랑과 멀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때로는 달콤함 보다는 씁쓸함이 더 건강하게 하는 법이다. 설명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이는 훈육의 보완제이지 본질이 아니다.

왜 골고루 먹어야 하지?

왜 양보해야 하지?

왜 공부해야 하지?

왜 열심히 해야하지?

왜 노인을 공경해야 하지?

왜 친구를 도와야 하지?

왜 약속을 작 지켜야 하지?

왜 살아야 하지?

그런 건 없다. 거기에 이유가 부여되는 순간, 이유는 반대의 명분이 된다. 이후 비극만이 남는다.

본래 삶의 대부분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를 찾지말고 그냥 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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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이어령의 말 1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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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뛰어든다.'

이어령 선생의 말이다.

'말'은 어떻게나 할 수 있다. 그렇게 꾸며 낼 수 있고 없던 일도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창세기'의 시작이 '말'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있어라'하면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고, '없어라'하면 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소설가의 '말'인 '글'은 없는 인물과 세계를 만들어내고 정치가의 '말'은 '정의'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것은 '말' 속에서 '존재'가 증명될 뿐이다.

'손'에 뜨거운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뜨겁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때에 따라서 그것을 '차갑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말을 믿거나 직접 만져 보는 수 밖에 없다. 진리라는 것은 그렇게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다. 말을 의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말'을 넘어서는 '진리'가 보여질 때가 있다. '쥐고 있는 뜨거운 것'을 화들짝 놀라며 떨어뜨리는 행위가 그렇다. 보통의 진실은 그렇게 '말'이 아니라 '행위'에서 나온다.

누구나 운동도 하고 건강한 것도 먹으며 규칙적인 삶을 살고 싶다. 정신 건강에 좋은 책도 많이 읽고 건강한 인관관계를 쌓으며 살기를 원한다. 그런 바람에 항상 따라 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데, 행동이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은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책도 읽고 싶은데...'하면서 정작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정작 하고 싶은 것은 '독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만 정작 속지 못한다.

사람의 진심을 보기 위해서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말'이란 '정직'의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 상대의 말에 '정직'이라는 '재료'가 쓰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실'을 증명해내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사용하고 살아간다.

행동, 즉 삶은 그 증명이 너무나 어렵다. 혹은 너무 오래 걸린다. 고로 쉽게 창조해 낼 수 있는 '말'이야 말로 '진실'을 은폐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고로 사람의 말이 진실을 담았었는지는 '행동'과 '삶'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어떤가.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식이 아니라 지혜로, 시대를 건넜던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말이 진실을 담았다는 증거가 됐다. 그는 많은 말과 글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많은 '침묵'과 '행동'을 남겼다.

그의 인생은 문장처럼 가지런하지 않고 단어처럼 명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흐르고 흔들리며 때로는 부서지곤 했다. 그 증거가 말에 힘을 싣는다. 스는 말의 사람이었지만 말에 속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글의 장인이었지만 글을 의심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항상 경계했다. 자신이 말이 그럴듯한 허구가 되지 않도록 그냥 그 강물로 들어간 사람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과 글이 모두 거짓으로 의심받지 않기 위해 꾸준하게 행동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가 보여준 것은 단 하나다. 진실은 말보다 늦다는 것. 그리고 진실은 늘 삶의 모양을 하고 온다는 것. 아무리 유려해도 그 문장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말이란 결국 삶을 부를 수 있는 단초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령이라는 이름은 그 말이 어떻세 삶으로 번역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오랫도록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이제 우리에게도 비슷한 숙제가 주어졌다. 그처럼 '말'의 시대에 살면서, '말'에 속지 않는일, '말'로 속이지 않는일.

'강물을 사랑한다면, 말로 형용할 것이 아니라 바로 뛰어드는 일'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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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소통 명상수업 - 마음근력 향상을 위한 명상 가이드
김주환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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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아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 입니까?"

"남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ㅇㅇㅇ 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한국사람입니다."

"국적을 바꾸면 당신도 바뀝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제가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의 결정체 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름을 지우고, 직업을 지우고, 관계를 지우고, 기억가지 지워도 남는, 그 끝에 남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명상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출발한다. 만약 당신이 화가 난다면 '당신'이 화가 났는가. 아니다. 당신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다. '당신'이 기쁘다면 정말 '당신'이 기쁜가. 아니다. 당신은 '기쁘다'라는 사실을 깨다는 이다.

우리는 '관찰자'다. 감정을 인식하는 자다. 생각 자체가 아니다. 그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는 자다. 명상이란 이 사실을 훈련하는 것이다. 김주환 작가는 '내면소통 명상수업'에서 반복한다. '그 감정은 당신입니까' 우리는 쉽게 감정에 휘둘린다. 불안하면 내가 불안이고, 화가나면 내가 분노 그 자체가 된다. 다만 관찰자는 다르다.

'감정'이라는 것의 '생물학적 원리'를 쫓다보면 그 핵심에는 '편도체'가 있다. '편도체'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경고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과거 우리를 생존하도록 진화해온 뇌의 경보장치다.

인류의 역사를 100이라고 잡을 때, 우리가 농사를 짓고, 도시를 세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봐야 5 정도 된다. 넉넉히 봐도 10이다. 나머지 90에서 95정도는 산과 강을 옮겨 다니며 짐승에게 쫓기고 쫓던 수렵 채집의 시대였다. 인류 역사 100 중에 약 90~95는 수렵 채집 시절이다. '현대인'을 기준하면 더 짧아진다. 지금의 우리가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 명백하다. 현대 사회는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무엇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는가. '뇌'는 생존을 위해 진화됐다. '포식자'의 위협에 반응하도록 설계됐다. 재빨리 위기를 파악하고 이를 '신체'로 '반응'했다. 소리를 듣자마자 뛰고, 그림자를 보자마자 도망치고, 낯선 소리와 냄새를 맡으면 긴장했다. 이 모든 것이 '생존가능성'을 높였다. 여기에는 '판단'이 아니라 '반사'가 필요해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움츠려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과거 우리의 생존력을 높였던 '편도체'의 역할 덕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느릿한 진화와 반대로 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현대사회에 사자는 없다. 창 밖에 맹수도 없다. 다만 회의실 문을 열면 진땀이 나고, 시험지를 받으면 고통스럽다.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의 눈빛에 온몸이 굳기도 한다.

위협없는 현대 사회에서도 편도체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이게 우리가 매일 감정에 휘둘리는 이유다. 어떤 환경은 뇌의 깊은 곳에서 '위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논리'가 아니라 '반응'이다. 그것이 감정이다. 문제는 그 '위험'이 '실체'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뇌는 '상상'만으로도 반응한다. 기억만으로도 편도체는 활성화된다. 사자가 눈 앞에 있던, 진상 고객이 눈 앞에 있던 뇌는 똑같이 위협으로 여긴다.

이 즈음에서 'Why Zebras Don't Get Ulcers'라는 책의 이야기가 나온다. Ulcers는 '위궤양'이라는 뜻으로. 왜 얼룩말은 인간과 다르게 스트레스에 노출되어도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로버트 사폴스키는 말했다. 얼룩말은 '사자'가 눈앞에 있을 때만 도망간다. 즉 위협이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얼룩말이 처한 상황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얼룩말은 사자의 위협에서 먹히거나 살아 남는다. 그리고 위협이 살아지면 다시 편하게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즉 지속 가능하지 않은 스트레스라는 의미다. 단 인간은 사자가 없어도 사자를 만들어낸다. 불안을 되새기고 후회를 곱씹고, 상상의 위협을 끝까지 키운다. 편도체는 실재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고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지만 인간은 위궤양에 걸린다. 사라지지 않는 감정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김주환 작가는 감정을 없애려고 하지말고,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말고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내면소통'이다. 즉 우리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 된다.

이렇게 우리가 감정을 인식하는 주체가 되면 실제로 뇌는 변화가 일어난다. UCLA의 리버맨 박사는 감정 라벨링 실험을 통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반응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이런 습관은 전전두엽을 활성화 시킨다. 단지 '화가 났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한 것만으로도 뇌는 차분해진다. 그러니 명상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훈련이자 생리학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훈련의 최적 시간대가 있다. 바로 잠들기 전이다. 신경가소성이라는 말이 있다. 뇌의 변형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의미다. 뇌는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낸다. 이 작용은 깨어 있을 때보다는 자고 있는 동안 더 활발하게 일어난다. 하루 동안의 감정과 기억, 경험이 재정리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그 직전에 연결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 적전 상태'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잠에 드는지는 뇌의 설계를 바꾼다.

김주환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잠들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좋은 말을 건내라'고 말한다. 어쩌면 마법과 같은 결과가 꽤 뇌과학적인 이유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도 잘 견뎠다'

'실수했지만 괜찮다'

'나는 충분히 나아지고 있다'

뇌는 그 말을 기덕한다. 그 기억은 새로운 회로가 된다. 또한 그것이 반복되면 습관이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며, 성격은 삶의 형태가 된다. 그것이 '운명'을 결정한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성격이 아니다. 당신이 살아온 흔적도 아니다. 기질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존재. 그 흐름을 지켜보는 존재이다. 그것이 진짜 자아다.

'내면소통 명상수업'은 이 자아를 되찾는 훈련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 정체성. 그것이 '진짜, 참나'이다.

'모든 이름을 다 지웠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는 그것.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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