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 생의 마지막 순간, 영혼에 새겨진 가장 찬란한 사랑 이야기 서사원 일본 소설 1
하세가와 카오리 지음, 김진환 옮김 / 서사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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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이라는 거죠. 출생지나 시대, 재해처럼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지배당한다는 건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 입니다. 분노나 증오에만 집중하다 보면 직면하는 현실마다 본인만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하세가와 카오리의 연작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중, 이와 같은 대사가 있다. '부모'를 탓하는 이에게 하는 조언이다. '발상의 전환'. 어떤 생각을 해내는 일을 '발상'이라고 한다. 생각은 저절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스스로 해내기도 한다.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과 스스로 해내는 생각은 분명 다르다. 영어에서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는 'look'과 'see'가 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look은 '감각동사'고 see는 '지각동사'다. 영어에서 '감각동사'는 자동사다. '지각동사'는 타동사다. 즉, 둘 다 '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look은 보는 '나'가 '주체성'을 띄고 있다. see는 '목적'을 보고 깨닫는 행위다. 다르다. 뿌옇게 쌓여 있는 먼지 밑 책을 보면, '책'을 'look'하는 동안에, 먼지는 'see'하게 된다. 둘 다 보는 것이지만, 하나는 보고자 하여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여지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그렇다. 눈 앞에 무언가를 보고자하면, 그것에 촛점이 맞춰지고 나머지는 흐려진다. 사진에서 이처럼 '피사체'를 선택하고 나머지 배경을 흐리는 것을 '아웃포커싱'이라고 한다. 포커스가 나가 있는 배경도 그러나 보여진다. 보고 있지 않아도 보여진다. 촛점을 옮겨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옮겨진 촛점을 제외하고 다시 나머지가 흐려진다. 즉 본다는 것은 여러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다양한 것들은 '보여진다'. 책 테두리, 페이지를 잡고 있는 손, 손 등 위에 모공 하나 하나까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보지 않고 '글자'를 본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글자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본다. 발상의 전환은 없는 내용을 있다고 망상하여 믿으라는 거짓 긍정주의가 아니다. 실재하는 것들 중에 다른 것에 포커스를 두고 나머지를 흐리라는 것이다. 쓰레기장에서도 피어 있는 꽃송이에 포커스를 맞추고, 전쟁통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인간미에 포커스를 두라는 것이다. 그것은 숨어 있지 않다. 그저 다른 것에 맞춰진 포커스 통에 흐려졌을 뿐이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자신이 불행해야만 하는 창의적인 생각들을 없애라. 슬픈 일을 겪거나, 실패한 이들을 보면 오롯하게 세상 모든 것에 포커스를 흐리고 '불평', '우울', '어둠'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날 그냥 가만 놔두시라고 해. 그게 나한테 가장 고마운 일이니까!"

부모님과 화해할 생각이 없는 이는 발악한다. 이에 '발상의 전환'은 소설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음악과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죽은 사람의 '혼'을 데리러 오는 '신부름꾼을 '사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을 우리는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동양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위치가 있다. 소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에는 죽은 이의 혼을 데리러 가는 '사신'이 등장한다. 서양인의 외모를 하고 있는 '사신'이라는 소재를 통해 쉽게 '죽는 이들'로부터 주목 받는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쉽게 읽히는 라이트 소설이다.

오래 전에 개봉한 영화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봤다. 꽤 예전에 개봉 했으나, 이제야 봤다.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 싸우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영화는 '살인자' 없는 '살인'을 보여준다. 시각적으로 꽤 폭력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 한 작품이다. 다만 예로부터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문화도 있다. 내세관을 가지거나 윤회관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도 했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이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음'이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다. 누구나 겪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전무한 정보 덕분에 '죽음'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죽음' 뒤에 남아 있는 세계가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이를 사신은 마중한다. 살면서 그럴 때가 있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나 자책 말이다. 흐려진 배경에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나. 마음이 정하는 포커스는 언제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라도 그 위치를 옮겨, 위를 향할 수도 있고 아래를 향할 수도 있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살면서는 뭐든 수정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나, 죽음 뒤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소설은 가볍에 읽을 수 있는 라이트 소설이었으나, '휘리릭'하고 넘겨 읽는 가벼움 속에 삶의 철학이 묻은 한 구절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그날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 그 말은 사실 우리 모두가 하게 될 말이자, 생각이다. 죽음은 대게 예고없이 다가온다. 그 대상은 '나' 혹은 '가족'이 될지, 그 시기가 당장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대하고, 오늘 하루를 '시한부 선고 받은 이'처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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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한자력 - 1일 1페이지, 삶의 무기가 되는 인생 한자
신동욱 지음 / 포르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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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론으로 이와 같은 한 줄을 적었다. 예전 같으면, 유야무야 넘어 갔을 테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평론은 '논란의 중심'이 됐다. 원래 글이란 읽힘이 쓰임이다. 고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워야 하는게 글의 핵심이라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실제로 '명징'과 '직조'라는 말은 쓸 일도 없고 써 본 적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편한 마음을 보이는 독자들이 더러있었다. 만약 가까운 친구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해보자.

"Kāore te kumara e kōrero mō tōna ake reka."

아마 상대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오리족 언어로 겸손하라는 의미의 속담이다.

"고구마는 자신이 얼마나 달콤한지 말하지 않는다."

말을 듣는 상대가 '마오리족'이라면 의미를 바로 받아 드릴 것이다. 문화적 혹은 언어적 이질감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언어를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한자로 구성된 어려운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난 척'하거나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일까.

한자가 한반도로 전래된 것은 고조선 후기 쯤으로 한민족 건국 초기부터 공문서로 보편적이게 사용됐다. 현대 대한민국 국민의 90% 이상이 한자 이름과 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명 뿐만 아니라 법학, 경제학, 인문학 등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 한자가 사용된다. 한자를 소통수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이질감이 없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 중에 이해하지 못 해야 할 한자어들이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그렇다. 사면초가는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라는 의미다. 굳이 영어로 번역해 보자면 이렇다.

'The song of Cho Dynasty coming from all four directions.'

이 말은 언제 사용하는고 하면,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고립된 상태일 때 쓴다. 'The song'으로 시작하는 영문 뜻을 보면 도통 이 말을 사용할 일이 없어보인다. 다만 '사면초가'라는 말은 중학교 수준의 교육수준만 받으면 너무나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사면초가'가 본래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와 상관없이, 문맥상 주는 어감이라는 것이 있다. '명징'과 '직조'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다고 해도, 대략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문맥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꼭 '명징'과 '직조'가 아니더라도 정확히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말들은 수없이 많다. 기독교인의 71%는 '아멘'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한다. 대부분의 불자 또한 '나무아미타불'의 의미를 모른다. 10대 대부분이 사용하는 용어인 '썸네일', '어그로', '손절', '오타쿠' 등도 모두 정확한 뜻 모르고 문맥에 맞춰 쓴다. 정확한 어원이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역시 많지 않다. 그러나 사용한다.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문자를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 문자가 닮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실질문맹률'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문맹률은 1% 미만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실질문맹률'은 75%나 된다. 문장을 읽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인간은 의사소통에서 사용하는 '어휘' 수준이 크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문맥상 파악하고 이해한다.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은 묻는다.

"무슨 뜻인지 알고 읽으시는 건가요?"

굳이 말하자면, 책에 있는 단어의 뜻을 모두 알고 읽는 것은 아니다. 문맥상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다정한 물리학'이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없는 '명사'들이 나온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하나씩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고 읽을 수는 없다. 앞과 뒤의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를 유추하는 것이다. 한 때, 나에게 영어 회화 과외를 받던 학생이 물었다.

"'Take a rest, take a picture, take over, take out' 도대체, take를 뭐라고 해석해야 하나요?"

그건 알 수 없다. 그냥 문맥상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문맥상 이해를 위해서는 많이 읽는 수 밖에 없다.

"배가 아프다."

이 말은 신체의 한 부분이 아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전까지, 타이타닉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었다면 '배'는 운송 수단이 된다. 그것은 '단어'의 역할이 아니라 앞에 걸려 있는 수많은 문장들의 역할이다.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에 제시된 명사를 기준으로 한자어는 우리말의 81%를 차지한다. '한자'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자는 '함축하여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굉장히 효과적인 글자다.' 그것을 공부하는 것은 '중국'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한자의 음과 대략의 뜻만 아는 것으로 효과적인 문맥상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한자가 구성된 원리를 뜯어 살펴보면 '역사'는 물론 '철학'과 '인문학'을 배울 수 있다. 문자를 만들어낸 창작자의 해석뿐만 아니라, '사용자'만의 해석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 '여름 하(昰)'로도 사용하는 이 한자는 왜 여름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해석하기에는 '해(日)가 바르게(正) 서있는 모양'이라고 해석한다. 실제 그 글이 만들어진 원리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그 의미와 철학을 넣어 볼 수 있다. 과거 한자 선생님은 女(계집 녀)가 들어간 한자는 몽땅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女(계집 녀)자는 '계집'이라는 단어 대신에 '여자'라는 단어로 바꿔 사용했고 실제로 '女(여자 녀)'가 들어간 한자가 모두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철학대로 학습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이 많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나, 그만큼 주체적인 해석의 여지가 많은 글자라는 장점도 있다.

우리의 한자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글자 하나당 하나의 음을 갖는 것이 기본적이 원칙이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에는 '一日'라고 쓰고 '이치니치'라고 읽어야 할지, '스이타치'라고 읽어야 할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같은 한 일(一)자가 들어가도 '一人'는 '히토리'라고 읽는다. 일본 소설을 읽다보면 일본인들은 '명함'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라고 묻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일본의 한자가 하나의 음으로 소리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어찌됐건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쓸'일은 많지 않다. 그저 음과 뜻을 대략 치환할 수 있는 정도의 문해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대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흔히 'MZ세대의 어휘력'에 대한 내용이 자주 미디어를 통해서 보도가 되곤 한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사실 가격이라는 것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다수의 사람들의 문해력과 어휘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자력'이 값어치가 더 올라간다는 의미를 뜻한다. 한자는 앞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문자'가 아니라, 경쟁력이자 미래 리더에게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신동욱 작가의 '어른의 한자력'은 한자 교재라기보다 '신동욱 작가'가 한자를 보며 집필한 '에세이'다. 거기에는 자기관리에 관한 철학과 자신의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현대인들이 직장과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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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실 천국 같은
오가와 이토 지음, 이지수 옮김 / 더블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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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오가와 이토'의 책은 처음 접했다. 그녀는 '츠바키 문구점'이나 '달팽이 식당' 등으로 이미 꽤 명성을 얻은 일본 작가다. 그녀의 소설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특유의 책 표지 분위기와 제목만으로도 문체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소설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지만 에세이에 사용된 문체로 생각해보면 '아기자기'하고, 둥글둥글한 글을 쓰지 않을까 예상한다. 일본 서점을 가 본 적은 없다. 다만, 가지고 있는 일본 책들은 대게 '핸드북' 사이즈가 많다. 한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서 '원서'를 소장하고 싶어서 구매하면 대부분 핸드북 사이즈가 와서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 알고 지낸 일본 친구가 보내 준 책도 핸드북 사이즈였다. 친구에게 묻자. 일본의 책은 사이즈가 작고 가벼운 편이라고 한다. 일본 뿐만 아니라, 오세아니아나 유럽의 책들도 가볍고 크기가 작은 책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책이 유난히 화려하고 무겁다. 책이 무겁기 때문에 쉽게 들고 다니기 어렵다. 가볍게 들고 다니면서 보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독자에게 선택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두 국가 모두 독서량은 많지 않으나, 한국은 놀랄만큼 적다.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가는 인도로 일주일에 10시간 42분을 책 읽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반면, 일본과 한국은 각각 4시간, 3시간만 책을 읽는다. 주당 1시간이라면 별차이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1년이면 52시간, 10년이면 520시간이 넘는 시간이다. 결코 그 시간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 책을 많이 읽는 이유는 아마도 '만화'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가볍게 종이책을 다루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책'에 대해 친근함을 갖고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오가와 이토'의 '두둥실 천국같은'은 1월 8일로 시작해 12월 29일로 끝나는 작가의 일기장이다. 유럽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며 겪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 나 역시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만나며 언어를 공부했다. '어학연수'는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어학연수' 시간에는 '언어'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문화를 배운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도구를 이용해서 다양한 소통을 하기 마련이다. 대부분,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질문이 이어진다. 이성이라면 또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공부다. 어학연수 기간에 '한국인'들은 대게 어학원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각종 문법책과 영어 단어책, 독해 문제집을 사서 오랜 시간을 앉아 있다가 왔다. '연수'라는 말 자체가 '갈고 닦다'라는 의미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다르게 사용해보고 부딪치기를 반복해야 한다. '파티'를 하고 '여행'을 하는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배운 언어를 많이 써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보다는 '어학연수' 쪽이 더 문화적으로 배우는 부분이 많기도 하다. 실제로 현지 어학원을 가게 되면, 현지인이라고는 선생님 한 분 있는 강의실에 각각의 여러 나라 학생들이 모여 앉아 떠든다. '요르단, 브라질, 스페인, 일본, 중국, 아르헨티나, 인도'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과 한참을 떠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제3국을 공부한다. 아마 이런 행위는 글짓는 '작가'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소재가 될 것이다.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를 소개로 책은 시작된다. 얻어 맞는 입장에서도 글은 어둡지 않다. '그냥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라는 느낌으로 넘어간다. 역시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 생각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그런 것은 없다. 가볍게 쓰여진 글 때문에 '가장폭력'의 상처가 무겁지 않게 왔다 지나갔다. 책에는 참 재밌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반달가슴곰'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녹화해 두었던 반달가슴곰에 대한 프로그램을 봤다. 이 역시 일기로 기록했다. 암컷 반달가슴곰은 굴에서 겨울잠을 자면서 새끼를 낳는데, 초봄이 되면 새끼와 어미곰이 굴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어미곰은 새끼곰과 함께 놀아주고 젖도 먹인다. 어미곰이 새끼곰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암컷은 발정하지 않는다. 고로 수컷 반달곰은 암컷과 교미하기 위해 '새끼곰'을 죽여버린단다. 그녀가 본 방송에서 암컷 곰은 2년 연속으로 새끼곰을 잃었다. 숫컷 반달가슴곰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며 그녀는 '인간 사회'와 내용을 연결한다. 사실 반달곰의 습성이 어떠한지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발정난 수컷의 성욕이 아이를 살해할 만큼 위협적인가.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보건데, 당연히 이는 '인간 세계'와 다르다. 그러나 어쨌건 인간 사회에서도 이처럼 야만적인 사건은 종종 일어나곤 한다. 형태야 어찌됐건, '성체'의 부모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식을 버리는 행위는 종종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조선 후기에 '영조'라는 왕도 자신의 자식을 죽이지 않았던가. 글을 짓는 사람들은 분명하게 어떤 인풋이라도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것 같다. 어쨌거나 책은 특별할 것 없는, 일과를 아기자기하고 잔잔하게 기록한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두둥실 가벼운 문체가 일관적이다. 읽는 동안도 가벼운 문체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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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기록 생활 - 삶의 무게와 불안을 덜어주는 스프레드시트 정리법
신미경 지음 / 뜻밖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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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린더 쪼개기'라고 있다. '네이버 캘린더'나 '구글 캘린더'를 보면, 좌측에 '내 캘린더'라고 표기된 부분이 있다. 이것을 여러개로 쪼개는 것이다. 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 대게 하나의 캘린더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다. 나의 경우에는 총 10개의 캘린더로 쪼갠다. 캘린더 하단에 '+' 모양의 버튼을 누르고 캘린더를 하나씩 추가하면 된다. 캘린더는 색깔별로 나눠져 있다. 색깔별로 '개인일정', '자기계발', '육아&가족', '집필&강연', '농원', '학원' 등 여러개로 나눠 쓴다. 각자의 달력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다. 가령, '파란색'은 '집필&강연', '노란색'은 '육아&가족' 등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색깔을 부여함으로써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캘린더에서 부여된 색깔은 오프라인에서도 사용한다. 수기 다이어리를 쓰거나, 서류를 정리할 때, 파일철 색깔이나 스티커 색깔, 펜의 색깔로 일정의 성격을 분류한다. 일정은 동사를 먼저 쓴다. '시청에서 강연하기'라고 기록하지 않고 '[강연] 시청'처럼 쓴다. 취해야 할 행동과 동작을 먼저 씀으로써, 내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주로 '주간캘린더'를 자주본다. 일정은 크게 '주간' 단위로 기록하는데, 일단 그 주에 해야 할 모든 업무를 대충 요일마다 넣어둔다. 날짜와 상관없는 없는 업무들은 모두 '월요일'에 몰아둔다. 이렇게 주간 일정을 모두 몰아 넣으면 대략 '한가한 날'과 '바쁜 날'이 보인다. 이때, 월요일에 몰려진 업무를 마우스로 '드래그'하여 하나씩 평평하게 배분한다. 배분된 일정은 적절한 시간에 기록한다. 여기서 캘린더를 저장할 때, 쪼개진 캘린더 중 어느 부분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설정해야 한다. 배분하다보면 '주간' 혹은 '월간' 혹은 '연간' 반복하는 일정이 자동 설정되는데, 특별하게 '자동설정'된 일정이라면 그 중요한 일정에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간에는 '유동적으로 날짜를 변경할 수 있으나 결코 다음 주로 할일을 넘기지 않는 것'이다.

일주일을 살다보면 일정에 넣지 않은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라도 모두 기록한다. 이 기록은 쉽게 검색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캐줄 관리는 '수기'로 하진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검색'이 힘들다. 가령 작년에 세금신고한 내력을 살펴보고 싶다면, 온라인으로는 쉽게 검색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수기로 기록하게 되면, 하나씩 찾아봐야 한다. 온라인 검색은 매년 얼마 정도의 세금을 냈는지, 언제 냈는지 등을 한 눈에 살필 수도 있고 그것을 데이터화 해서 그래프로 활용할 수 도 있다. 캘린더에 저장한 내용은 태블릿와 스마트폰, 스마트 워치에 자동 연동 된다. 설정에 따라, 10분이나 30분 혹은 전날에 알람이 뜬다. 알람이 뜨면, 상사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충실하게 '동작'만 취하면 된다. 고로 '최초 스캐줄 기입'은 가장 이성적인 시간에 모두 끝내 놓는다. 가장 이성적인 시간에 최선의 선택을 하두면, 나머지 한주는 '선택'에 대한 부담없이 동작만 취하면 그만이다. 빈번하진 않지만, 극단적인 경우에는 '예약문자기능'도 동시에 사용한다. 가령 보내야만 하는 문자를 미리 예약문자로 설정해 두고 발송해 두면, 필수적으로 상대에게 원하는 시간에 문자가 발송된다. 특히, '육아'에 관한 내용이 그렇다. 업무 중에는 업무에 집중해야 하기에, '유치원 선생님께 보낼 문자'의 경우에 미리 설정한 시간에 보내놓고 업무에 충실한다. 이런 업무를 미리 해 놓으면, 상대 쪽에서 답장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온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지출과 수입에 대해서도 스캐줄에 기록한다. 자동 이체 형식으로 어차피 빠져 나갈 지출을 '스캐줄'에 기록함으로써, '저도 모르게 나가는 지출'에 대해 적당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것은 '스캐줄'에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자기관리법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신명기 28장 7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들이 한길로 너를 치기 위해 들어왔으나, 일곱길로 도망가리라."

이것은 '집중'과 '분산'에 대해 알게 해준다. 한길로 들어오고 일곱길로 나간다는 것은 '줄줄 세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일곱길로 들어왔다가 한길로 나간다는 것은 '집중'과 '힘'을 이야기 한다. 수입은 일곱 길로 열어두고 지출은 한길로 내어 놓는다. 이것은 병목현상을 만들어낸다. 나는 수입은 다변화하고 지출은 '롯데그룹' 내에서만 한다는 철칙을 갖는다. 받는 쪽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노예'가 된다. 한명에게 급여를 받는다면, 그에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높아진 의존도 많큼 주체성을 빼앗긴다. 1000만원을 주는 한사람에게 충성할 것이 아니라 10만원을 주는 100명을 소유하는 편이 좋다. 그래야 상대에 대한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1000명에거 1만원씩 구매하는 고객이 되는 것 보다, 한명에게 1000만원을 구매하는 큰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로 부터 주도권을 가져 올 수 있다. 오랜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기록을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출 내역을 살피고 수익 내역을 살피다보면 자신이 보지 못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기 시작하면 정리가 가능하다. 정리가 가능하면 그것을 토대로 주도권 경쟁을 해 볼 여지가 생긴다. 시간 관리 뿐만 아니라, 건강관리, 마음관리 등을 적당히 가시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조절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것은 몹시 큰 힘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저자 신미경 작가의 관리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모든 것을 스프레드시트로 관리하진 못한다. 다만, 신미경 작가가 노하우를 보면 혀가 내둘러진다. 자기계발서의 좋은 점은 남의 노하우를 배워다가, 내 삶에 녹여 놓는 것이다. 그녀의 여러 노하우를 내 것으로 잘 녹여, 나의 노하우와 잘 버무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느슨해진 관리에 대한 다짐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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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력 시대 - 재야생화되는 지구에서 생존을 다시 상상하다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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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 중년의 여교수는 말했다. 해외에서 경제학을 들을 때 이야기다. 경제는 커다란 사이클을 반복한다고 했다. 호황, 후퇴, 침체, 회복이 번갈아 간다고 했다. 다만 회복 단계에 급격하게 압축 성장하는 시기가 온다고 했다.그것을 경제학 용어로 '퀀텀점프'라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 확대는 '성장'을 전제로 한다. 즉 사이클을 돌지만,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길 전제로 한다고 했다. 그것이 일종에 '수레바퀴'를 닮았다. 수레바퀴는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같은 곳을 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경제'를 벗어나 '철학'으로 갔을 때, 수레바퀴는 '윤회'를 닮았다. '경제'가 '철학'을 닮은 것은 둘 다 자연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을 닮은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산과 골은 번가르지만 확장한다. 우주 어디를 봐도 비슷하다. '탄생'과 '소멸' 사이에 호황, 후퇴, 침체, 회복이 있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윤회'하지만, 그 턱에 걸려 넘어지면 '소멸'한다. 작은 사이클은 거기서 끝난다. 더 큰 사이클은 다시 '탄생'으로 이어진다. 2차원 그래프로 경제 그래프를 보면 재밌다. x축과 y축에 시간과 규모가 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해 왔다. 시공간을 기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해결하지 못한 숙제였다. 3, 4차원의 시공간을 평면에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천장 위에 붙어 있는 '파리'의 위치 계산하는 걸로, 인간은 시공간을 평면 위에 기록할 수 있게 됐다. 좌표평면이라는 개념이 들어선 것이다. 경제 사이클은 좌표 평면 위에서 위 아래를 그리며 나아간다. 다만, 그 관념은 16세기 수학자의 아이디어로 시작했을 뿐, 경제의 본질은 그것과 닮지 않았다. 경제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다. 마치 수축과 팽창을 하며 성장하는 것이 '심장'을 닮았고 '별'을 닮았다. 굳이 말하자면 위 아래로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부피'가 커져 간다.

조형의 기본 요소는 '점, 선, 면, 형'으로 이뤄졌다. 굳이 따지자면 경제는 '선'으로 표현된다. 다만 실제 그것은 '형'을 닮았다. 수축과 팽창을 번가르며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호흡을 닮았다. 종이 위에 죽은 어떤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닮았다. 지나온 흔적이 기록되는 것을 보면 나이테를 닮았다. 그 또한 생명을 닮았지만 여름과 겨울의 순환처럼 자연을 닮기도 했고, '보름달'과 '삭'이 번가르는 것 처럼 천문학을 닮았다. 경제 뿐만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대중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파벌과 이익집단의 경쟁을 일으킨다고 봤다. 대중정치가 쉽게 폭민정치로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뭐든 탄생을 했다면, 성장하고 후퇴를 했다가 침체하기 마련이다. 와중 회복의 단계를 슬기롭게 넘기면 그것은 '퀀텀점프'한다. '소멸'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회복' 단계의 역할은 어느 주제에서나 필연적이다. 폭민정치가 소수의 침묵과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 정치는 선출을 통해 국정을 운영을 한다. 선거인단 혹은 권리장전과 같은 안정장치도 심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 독립선언문이나, 권리장전,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키워드가 언급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그 어디에도 '민주주의'는 언급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로 이어지듯, 민주주의 또한 영원 불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도 '민주주의'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것은 '저주' 처럼 들릴지만, 사실 모든 것은 그렇다. 영원한 일방향 성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지난 1세기 우리를 성장시켜 왔던 주요 키워드 하나를 손꼽아 보면 '테일러주의'다. '테일러주의'는 철강회사에서 노동자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관리법이다. 노동자의 작업 범위와 동선, 움직임 등을 표준화하여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로써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 테일러주의의 성공으로 미국은 '철강', '석유', '자동차' 산업을 기반으로 폭발적은 공급력을 갖게 됐다. 그것이 현대 우리 자본주의의 기반이다. 공급력을 해소시키기 위해 자본은 '광고'와 '마케팅'을 지독하게 성장시켰다. 턱 끝까지 차 있는 음식을 목구멍 깊숙히 더 밀어 넣고 이미 풍족한 옷을 마음에 들지 않게 했다. 불만족하게 하는 방법의 연구는 20세기 활발해 졌다. 포화된 육체를 넘어서 현대는 '영상'과 '정보'를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채워 넣는다. 육체가 포화에 이르자, 마케팅과 광고는 '정신'을 공략했다.

광고와 마케팅은 언제나 대중을 '불만스러운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이 더 불만족하고 더 탐욕스러우며, 더 혼란스러워야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새롭고 좋은 것을 구매했다. 소량품종 대량생산의 대명사인 포드가 자동차 업계 1인자로 있던 시기, 2인자 였던 '제너럴 모터스(GM)'은 새 광고 전략을 통해 업계 1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어떤 고객이든 자신이 원하는 색상의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습니다."라고 선전했다. 고객의 불만을 갈망으로 바꾼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산업은 이처럼 '표준화'하고 '획일화'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나아갔다. 인간은 더 비인간적이며 '욕망'과 '번뇌'에 쉽게 휩쌓이는 피로도를 쌓았다. '산업' 또한 자연을 닮았다. 무한대 확장은 불가능하다. 극도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시기는 언젠가 저문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지금이야말로 '육체'와 '정신'이 모두 포화상태까지 와있다고 봤다. 경기 순환곡선처럼 이제 중요한 것은 '회복력 시대'를 어떻게 넘어서냐는 것이다. 탄생 후, 호황, 후퇴, 침체의 사이클을 넘고 '회복'의 단계에서 '퀀텀점프'를 하지 못하면 만물은 '소멸'로 이어진다. 그것은 '경제학'이 아니라, '우주적 규칙'이다. 에너지 낭비, 극단적인 효율성 강조, 지나친 표준화가 경제, 정치 뿐만 아니라, 적게는 개인의 자아, 크게는 자연까지 위협한다. 이제 올바른 회복력 시대를 분기점으로 우리가 새로운 도약을 할지 혹은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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