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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평점 :
아무 배경지식 없이 '김숨' 작가의 '간단후쿠'를 읽었다. 그것이 이 소설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간단후쿠' 발음 자체가 '일본식'이라 얼핏 일본이 배경이겠거니, 했을 뿐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소설 초반을 시작하면 '간단후쿠'가 무엇이고, 소설의 배경이나 분위기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소설제목'인 '간단후쿠'는 일본군 '위안부' 여자들이 입는 원피스 옷을 말한다. 소설은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완성하듯, 흐릿한 색체부터 서서히 덧칠하며 분위기와 사건, 시간, 성격을 완성해 나간다.
어찌나 그것이 실감이 나는지, '소설가'의 서술방식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듯 당시의 분위기와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그것도 몹시 어린 소녀다. 비슷한 어린 아이들이 역사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이끌려 꽤 비극적인 유년기를 보낸다.
거기에는 지금도 다르지 않은 '양심'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간호사, 군의관, 군인 등.
부끄러움도 잊게 하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는 어린 아이들의 시선은 극적일 정도로 순진하다. 자신들을 비하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스스로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관성을 따라 나아갈 뿐이다. 여기에는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수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참혹함이 녹아져 있다.
'김숨' 작가의 문장은 '이것은 잔혹하다'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질감, 빛의 온도, 공기의 냄새, 분위기, 말투 등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 현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렇다. '외롭다'하는 세단어로 이뤄진 감정보다 빨갛게 익은 단풍잎이 아슬아슬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더 진한 '외로움'을 전달 받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언표'가 만들어내는 '사고의 제한성'을 이 소설은 극히 적게 만들었다. '피'를 묘사하지 않아도 '피비린내'까지 느껴지는 리얼함이, 울음을 그리지 않아도 울음이 들리는 굉장히 매력적인 서술이다. 그 절제된 문체가 '간단후쿠'라는 제목이 가진 아이러니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의 중반부까지 읽게 되면 '소설이 가진 정체성'이 명료해진다. 수채화의 색이 짙어지며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서로 덧칠했던 다양한 색감들이 대략의 선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가볍게 '재미있는 소설'하나 읽어야지, 했던 마음가짐을 자세와 함께 고쳐 잡고 한장씩 읽어 넘겨간다.
이 시점부터는 독자가 '독자'가 아닌 '증언의 청자'로 바뀐다. 소설을 읽어가던 '독자'에서 '목격자' 혹은 개입이 불가능한 '방관자'로써의 자책감과 무기력을 함께 느껴질 수 있다.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는 '이렇다'하는 과정의 묘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보며 사건이나 시간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이었던 '간단후쿠'가 그렇다. 아이들이 입은 훌러덩 훌러덩 입고 벗을 수 있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애착도 담겨져 있지 않은 천 조각.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불편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개입할 수 없는 그 무기력함이 오래 갔다. 소설은 굳어진 작가의 글이기에 그것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간단후쿠'가 묘사하는 '과거' 역시 돌아가 바꿀 수 없는 '개입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지나간 고통스러웠던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든 사진 속으로 들어가 구해주고 싶다는 안타까움만 생겨난다.
소설은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저 보여주고 싶은 바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 관경을 지켜보며 아마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감정'과 '분위기'를 보편적인 독자는 전이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데없이 '간단후쿠'가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 21세기 오늘 서재로 다가왔다. 책은 이처럼 갑작스럽게 '감정', '역사'를 상기시켜 오늘의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특징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시간이 흐르고 몇번은 다시 꺼내 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