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의 미술관 문학동네 시인선 241
류성훈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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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는 있지만 커피가 없고,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그릇은 있는데 김치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곳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류성훈 시인의 '아직'의 일부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본질'이다.

본질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시다. 류성훈 시인의 '아직'에서 포트는 그 자체로 본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쓰임'을 위해 창조된 도구다. 즉 '포트'는 있으나 '커피'가 없다면 그것은 본질을 잃은 사물이 된다. 본질을 잃은 사물이 가진 무의미함.

본질은 뿌리를 찾도록 하는 이정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어디서 왔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그것을 묻는다. 커피 포트의 본질을 따라가면 더 깊은 진리에 닿는다.

커피와 포트가 있다고 해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실 여유가 없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언가의 본질을 끊임없이 따지고 들면 결국은 '사람'. 더 깊게는 그 내면을 만난다.

어떤 생각으로 삶을 채우고 사는 사람인가. 그 본질을 다시 쫒다보면 '철학'을 만나게 된다.

예전 한 명품 의류의 원가가 공개된 적 있다. 원가를 알고 봤더니 꽤 저렴하다. 그것에 상표를 박아놓고 그토록 폭리를 취한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물음에 개인적 공감은 하지 않는다.

오렌지는 오렌지주스가 되는 순간 가격이 수 배로 치솟는다. 상표를 달고 유통 과정 몇번을 거치면 오렌지는 원가의 열배도 넘게 된다. 그렇다면 오렌지 주스는 과연 폭리를 취하고 있는가.

이런 식의 사고는 '시'나 '책'의 가치를 허무하게 만든다. 책의 원가는 허무할 정도로 적다. 책의 가치는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유통과정, 마케팅, 작가의 철학.

원가를 쫒아가는 이들은 '오렌지의 원가'에서 멈춘다.

'농사' 짓는 집에서 자란 '촌놈'의 입장에서 아버지, 어머니는 매번 말씀하셨다.

"'농사꾼'에게 '손해'라는 것은 없다."

농사는 '원가'를 따질 수 없는 '노동'과 '자연'에서 수익을 얻는 사업이다.

하나의 과일을 틔우기 위해 꽤 적절한 '시설'과 '관리'가 들어가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을 길러내는 것은 '사람', '땅'과 '볕', '물' 따위다. 그것의 원가는 무엇인가.

그것을 쫒아 올라간 그 상위의 어떤 것. 그것의 원가는 얼마인가.

태양의 원가는 얼마이고 그 이전에 우주를 이루는 원소들의 원가는 얼마이며, 빅뱅의 순간을 에너지로 환산하면 얼마가 되는가.


우리 인간은 표피로 연약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아주 단단한 과거를 쌓고 미래로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언제나 경험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일 뿐이다. 지나간 혹은 다가 올 현재는 언제나 관념속에서나 존재하는 '상상의 산물'이다. 거기에 '과거'와 '미래'의 이름을 붙인다고 존재가 생겨나는 법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유물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수가 하는 거짓말, 세상이 만들어낸 착각, 누군가의 조작, 그런 것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다. 타인의 정보를 '신뢰'한다는 '관념적이고 사회적인 믿음'이 그것의 '존재'를 연약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즉, 태양이 원반이 아니라 '구'라는 것,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공 모양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한 더 나은 존재들의 입증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본질로 들어가면 결국 '사람'만 남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변한다.


'포트는 있지만 커피가 없고,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그릇은 있는데 김치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곳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 출발하여 사람으로 끝난다. 포트는 커피가 있어야 완성되겠지만 결국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사람이 '커피'를 알아야 하고, 마시고 싶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커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있어야 한다. 커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과거의 현재로 부터 끄집어 내어야 한다. 그 과거의 기억에서 '커피'란 항상 '타인'과 함께하게 된다. '타인'의 '커피'는 어떻게 시작했는가.

류성훈 시인의 '산 위의 미술관' 중 '아직'의 일부에서 쓸모와 본질이 생각났다. 시인이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의 본질이란 시인이 남겨 놓은 흔적의 의미를 찾는다기 보다 시인이 남겨 흔적에서 나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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