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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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났다. 음악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문학보다 음악에 더 큰 열정을 가졌다. 이후 이십대 중반이 되면서부터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다. 그의 고향은 체코지만 공산 정부가 그의 책을 금지하면서 결국 그는 프랑스로 망명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로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는다. 책은 '사랑, 자유, 삶의 이유'에 대한 사유가 들어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진지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꾸준하게 던지며 '실존, 정체성, 자유' 등의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그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삶의 무게'와 '가벼움' 운명과 우연', '기억과 망각'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다뤘다. 특히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하나에도 깊은 사유를 담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언어의 정밀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번역에 대해서도 예민했다.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읽을 때, 깔끔하게 떨어지는 번역을 말하는 것일까.

"좋은 번역이라면 번역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되려 자연스러운 번역이 오히려 작가의 목소리를 지우는 일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의미를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일에까지 아주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그의 글이야 말로 '장인'이 한땀한땀 했던 바느질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쓰기는 그가 남긴 89개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이야기를 짜내는 일이 아니다. 언어의 결을 맞춰 사유를 짜 맞추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까지도 의미 있는 여백으로 남겨야 하는 아주 디테일한 표현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이후 다시 고향 체코와 도시 프라하로 향한다. 그에게 프라하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프하하는 문학과 시의 숨결이 살아 있는 도시였다. 다만 전쟁과 정치, 이념의 충돌 속에서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사랑한 도시가 점차 시로서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가 보기에 프라하는 더 이상 '시'를 말하지 않는 도시가 되어 버렸다. 거리에는 기억대신에 망각이 쌓이고 사람들의 말에는 감성이 아닌 이념이 먼저 자리를 잡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프라하가 사유의 깊이, 언어의 품위, 문화의 고유함 같은 것들을 잃어가는 모습에 그는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그는 프라하가 더이상 '문학의 도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물론 도시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그 속에 있던 시가 살아졌다는 말을 통해 상실감을 토로 한다.

그는 프라하를 아틀란티스로 비유했다. 사라졌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했으며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틀란티스는 한 때 풍요롭고 이상적인 도시였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전설속의 아틀란티스는 지금은 바닷속에 잠겨 사라졌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과 상상속에서 존재한다. 쿤데라가 본 프라하도 마치 그와 같다고 봤다.


프라하는 카프카, 하셰크, 차페크와 같은 거장들이 활동하던 문학과 시의 도시이자 상징이었다. 도시의 골목마다 철학과 예술이 숨겨져 있고 거장들의 흔적이 녹아져 있으며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는 깊이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전쟁과 독재, 정치 선전으로 모든 것을 상실한 프라하는 과거의 프라하와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는 말과 도시 그리고 인간의 기억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단어 하나가 잊혀지거나 도시 하나가 변화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려운 이념이라던지 역사를 말하지 않아도 '문학'이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의 삶과 문학을 압축한 개인 사전을 통해 말을 지키는 일로 정신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단어가 가진 색과 냄새, 뉘앙스가 사라지지 않게 마지막 유고작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89개의 말, 프라하, 사라져가는 시'다. 이 책은 밀란 쿤데라가 생전에 썼던 산문들과 사전을 담고 있다. 그거 직접 선택한 89개의 단어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사랑했던 프라하가 더이상 시를 품지 않는 도시가 됐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한 기록을 담았다.

그에게 단어는 정체성에 가깝다. 사람들이 더이상 쓰지 않는 말, 사라져가는 단어들을 죽기전까지 붙잡고자 글을 썼다.

단어는 그에게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정체성이었으며, 기억이고, 사유의 흔적이었다. 89개의 말은 사라져가는 단어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도시와 사라져가는 인간의 정신을 필사의 노력으로 붙잡고자한 기록이다. 시를 잃은 도시와 말을 잃은 시대에서 그는 자신이 아끼는 단어 몇가지를 끝까지 붙잡고 저항하고자 했다. 그 흔적들은 짧게나마 느낄 수 있다.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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