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멘쉬 -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 의지대로 살겠다는 선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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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남긴 말이다.

심연은 '공'하다. 무의미하고 방향이나 정답도 없다. 우리 내부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알기 위해 골똘하게 되면 결국 '허무주의' 만난다. 사실 깊은 것에는 어둡다. 그곳을 깊이 살피다보면 처음엔 진리를 찾기 위해 눈을 크게 뜨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어둠에 눈이 익는다. 진리를 알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무뎌지고 '결국' 길을 잃은 스스로만 남는다.

심연의 본질은 본래 '없음'이다. 형태도 없고, 이름이나 방향도 없다. 그 '없음'에 고개를 쳐집어 넣고 헤매고 있으니, 그 상실감은 스스로를 집어 삼켜 결국 스스로를 상실하고 만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면 '포레스트 검프'다. 일자무식하고 단순한 '바보'가 평범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어떻게 넘어서는지 절실하게 보여준다. 따지고보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발에 걸려 넘어진다. 삶은 아주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가끔 INTJ이건 INFJ이건 생각이 많고 골똘해지는 나의 성격 유형상 '포레스트 검프'는 정기적으로 봐주어야 하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영화다.

'배트만 다크나이트'가 워낙 명작이라기에, 봤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해당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조커'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했던 대사다.

'Why so serious?'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와 다르게 해당 대사가 마음에 콱 들어와 박혔다.

가만 보면 나이를 들면서 꽤 진지해진다. 생각하고 또 생가한다. 행동이나 말이 무게가 실려야해서 그럴까. '나이'라는 숫자가 말하는 '세월'이 삶을 하는 와중, 그 세월 중의 모든 '나'를 대표하는 '나'가 최정점에서 삶을 증명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아무 죄 없는 10대와 20대의 나를 욕먹인다. 나이를 쌓아가면 내가 욕먹이는 나의 범위는 더 늘어난다. '집에서도 세고, 밖에서도 세고, 10대, 20대, 30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대표하는 '이력서'를 '현재'의 내가 매순간 말과 행동으로, 성과로, 능력으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수많은 타인이자 스스로인 자신을 대표하기에 어떤 행동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삶을 꽤 대충 살아도 되는 나이는 태어남과 동시에 점차 멀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따지고보자면 누군가에게 증명 받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지 않는가. 고로 모든 일에는 크게 진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선택을 할까'

그런 생각을 주는 사람이 되더라도 괜찮다.

어디서 보건데,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라는 가치증명의 욕구만 내려 놓아도 삶은 매우 편해진단다.

아이러니하게도 니체는 스스로 심연을 너무 들여다 본듯하다. 그 시선이 어쩌면 그의 자아를 무너뜨렸을지 모른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889년 니체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됐다. '초인'을 지향하던 그의 말로는 11년 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로 두었고 어머니나 여동생도 알아보지 못했다.

니체는 말로 삶을 가르쳤지만, 나는 그의 삶 전반으로 배웠다. 니체의 철학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나에게는 차라리 '포레스트 검프'의 '바보 철학'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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