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바뀌면 좋은 운이 온다
김승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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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도착 첫날, 굉장히 독특한 광경을 봤다. 흐릿한 날씨에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를 피하거나, 가리지 않고 그저 맞고 걸어가는 것이다. 누구도 뛰거나 우산을 쓰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가는 경우는 외국인이 다수였다.

과연 왜 그랬을까.

당시 유학생 시선에서 그 행위가 '선진국'의 여유로움이라 여겼다. 얼마 뒤, 그러나 나 또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해양성 기후인 뉴질랜드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날씨가 바뀐다. 몇초 비가 내리다가 화창한 날씨가 된다. 고로 비를 피하거나 우산을 쓰기보다 그냥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

인생에서 '불행'은 '소나기'와 같다. 갑작스러움과 막연함이 나를 젖게 만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리는 소나기는 그냥 맞아야 한다. 맞아도 금방 맑은 날이 왔다. 인생이 날씨는 해양성 국가의 날씨 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영원히 내릴 것 같은 비는 사실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빨리 깨닫게 되면 감정의 출렁거림은 점차 사그라든다.

인생 전체와 비교했을 때, 불행은 터무니 없이 짧게 스치고 간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는 보행자의 잘못이 아니다. 일기예보를 살피거나 준비성을 운운하기에는 '그저 일어나는 일'이 불과하다. 고로 담담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불행을 소나기와 비교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모든 인생은 모두 뉴질랜드의 날씨와 같지 않다고 말이다. 어떤 인생은 비가 많이 내리고도 하고 어떤 인생은 비가 덜 내리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일부는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원래 인생은 불공평하다. 그것은 빨리 인정해야 한다. 인생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자연은 불공평하다. 자연에는 빛이 있고 어둠이 있다. 음과 양이 있고, 위와 아래가 있으며, 좌와 우가 있다. 이런 차이로 지구에는 '지역별'로 '기후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면 다시 물을 수 있다. 만약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당연하다.

평소에 '우산들고 다니기'를 생활화하면 된다. 그도 아니면, 내리는 비가 내리는 일을 이용하면 된다. 얼마 전, '두바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두바이에서는 도시 곳곳에 미관상 심어놓은 잔디 때문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한단다. 두바이 전체 예산 중 40% 가까이가 인프라 관련 예산이고 이중 34억 달러 정도가 물과 전기 수요에 사용됐다. 이는 전체 예산의 18%다. 즉, 일부 국가에서는 공짜로 물을 내려주는데, 어떤 국가에서는 '비'가 해결해주는 문제에 엄청난 예산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은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삶은 '대응'에 있다. 두바이에 살면 그에 맞는 삶을 살고, 뉴질랜드에 살면 그에 맞는 삶을 살면 된다. 더 쉽게 말해서 소나기가 자주 온다면, '소나기'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에 맞는 스탠스를 어떻게 취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베트남과 같은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 살면서 우산도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두바이와 같은 가문 지역에 살면서 스프링클러를 준비하지 않는 삶을 살면, 그만큼 '불운'이 찾아 올 빈도가 높다.

고로 불운이 온다는 것은

첫째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이 짧게 지나갈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불운이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과 같이 잦게 찾아온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모든 것은 '환경'과 '사용'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 환경은 그에 맞는 모습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습은 적합하게 사용된다. 즉, 북극곰은 추운 기후 때문에 두꺼운 지방층과 털을 갖게 됐고, 두꺼운 지방층과 털은 추위를 막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우리는 동물종 마다 각각 진화적 이유를 '환경'에 설명하며 '자연선택설'을 믿으며, '인종'과 '국가', '개개인'에게는 그 이유를 적용하기 망설인다. 이런 시도는 근대에 '골상학'이나 '우생학'에서 사용됐다가 인권문제로 현재는 거의 금기시 된다. 그러나 '우생학'의 아버지인, 프랜시스 골턴의 사촌이 '찰스 다윈'이라는 것은 그 둘의 관계만큼이나 연관성이 있다.

생물의 다양성만큼이나 인간의 종류는 다양한다. 그들중 어떤 이는 어떤 환경에 더 번창하고, 어떤 환경에 쇠퇴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눈이 큰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청각이 발달한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피부가 더 고운 이들이 생존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각각 생김새에 따라 그에 맞는 자리가 있는 시대가 됐다.

마이클 조던이 12세기에 태어나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빌게이츠가 기원전에 태어났다면 마찬가지로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 수가 있다. 또한 이들 모두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분명 그 능력발휘는 10분의 1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말은 우리는 현재 꽤 적합한 시대에, 적합한 장소에 있어 우리에게 맞은 능력발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로 우리는 두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다. 환경과 자신을 알고 그 둘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혹, 두꺼운 피부층을 가진 북극곰이 아프리카에 있진 않은지, 아프리카에 있는 기린이 북극에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제 3의 눈으로 볼 때, 북극에 있는 기린과, 아프리카에 있는 북극곰은 서로 맞지 않음이 명확하게 보이고, 이 둘이 서로 불행한 이유는 환경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맞지 않아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쁜 상황이란 없다. 다만 맞지 않는 상황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알고 환경을 알면 고로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수학에는 '큰수의 법칙'이 있다. 시행횟수를 무한대로 높이면 수학적 확률에 수렴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동전을 던지면 앞이 나올 확률과 뒤가 나올 확률이 50%다. 10번을 던지면 어떤 경우에는 앞이 8번, 뒤가 2번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행횟수를 무한대로 올리면 결국 앞이 나올 확률은 수학적 확률인 50%에 수렴한다. 즉, 인생이라는 전체의 게임판에서 '행복'으로 수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행복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찾고, 간혹 나오는 '불행'을 덤덤하게 맞이하며 그 시행횟수를 무한대로 높이는 것이다.

그것은 '관상'에서도, '수학'에서도, '자연'에서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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