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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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 shouldst not have been old till thou hadst been wise."

(당신은 현명해지기 전에, 늙지 말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도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당신은 현명해지기 전에 늙지 말았어야 했다."

'광대'가 말한다.

'리어왕'은 권력을 가졌으나 노쇠했고, 나이가 많으나 어리석었다. 늙은이들은 많은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회는 늙은이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대우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반드시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고로 현명해지기 전에는 늙지 말아야 하고 지혜로워 지기 전에는 권력을 갖지 말아야 한다.

무능이 어떻게 비극을 만들어 내는지 '리어왕'은 여실히 보여준다. '권력'은 사용자가 누군지에 따라 극명히 달라진다. 그러나 이 권력자는 '노쇠'했고 나이 들었으며 '우매'했다. 극 초반에 우매한 왕의 무능은 비현실적일 정도다. 모든 것이 큰 그림을 위한 계책이라 믿고 싶을 정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에 서 있을 때, 누구는 숨은 역량을 보이기도 한다. 반대로 애초에 자리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인물도 있다. 모든 인물이 자리에 맞는 지혜로움을 갖는 것은 아니며, 자리가 주어졌어도 여전히 우매한 이들도 존재한다.

이들의 결정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심지어 국가의 모든 이들을 파괴하고도 남는다. 셰익스피어는 권력과 책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리어왕'을 통해 던진다.

리어왕은 '자신의 딸들'이 자신을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선언하라 요구한다. 그 철없는 시기와 질투가 표면적 충성과 사랑을 유도한다. 국왕은 '충신'에 귀 닫고 힘을 약화한다. 이 오류는 개인의 실수로 그치지 않고 확장된 파괴적 결말을 낳는다.

고립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글로스터 백작은 극에서 물리적 눈을 잃는다. '보는 것'은 물리적 시각 정보를 인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본다'라는 표현은 그보다 더 확장성 있게 사용된다. 눈이 사라진 백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은 통찰을 얻는다. 물리적 시력이 상실돼도 정신적인 시야가 확장되는 것이다. 명확해 보이는 것이 가짜인 경우는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너무 흔한 일이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당연히 '보는 것'은 '눈'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갔을 때, 그 정보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다.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산다.

'물이 반밖에 없는 사람'과 '물이 반이나 있는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객관적인 세계는 의미를 상실한다. 모든 사물이 해석에 의해 달라지기에 우리는 '객관적 진실'보다 어떻게 세상을 해석해야 하는지, 그 주관적 진실에 눈을 떠야한다. 아무리 물리적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거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더 확장된다.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노출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에는 '장소'였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공간을 초월한 정보'가 무수하게 편파적으로 보여진다. 요즘은 '알고리즘'이 편향된 시각을 강화시키는 시대다. '필터버블'에 의해 편향을 확신하는 확증편향을 갖는다.

리어왕의 '눈'이 그렇지 않은가. 전지적인 시점에서 '리어왕'의 선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알고리즘이 점차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시대에서 우리 개인은 과연 '리어왕'과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고 누군가는 '정치적', 누군가는 이념적, 누군가는 세상 전체에 대한 확증 편형을 갖는다. 그들에게 세상은 오롯이 자신의 신념을 강화시켜 주는 정보만 주어진다.

과거에 '간신'에게 속는 어리석은 왕을 욕하면서 스스로는 온라인이 만들어내는 확증편향의 버블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간혹 자신의 믿고 있는 신념에 힘을 실어주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때로 반대편의 이야기에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 정치나 문화는 반대의 이야기를 완전히 배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알고리즘이 취향을 저격하여 골라주는 덕분에 남성은 남성들의 알고리즘 속으로, 여성은 여성의 알고리즘 속으로, 10대는 10대의 필터 속으로, 30대는 30대의 알고리즘 속으로 속아 들어간다.

각자 자신의 필터 속에 집을 짓고 그 필터가 전체를 대변하는 일부라고 믿는다. 과연 우리는 과거의 우둔한 왕을 욕할 자격이 있으며, 우물 안 개구리를 동정할 수 있는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의 선택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나이를 더 들기 전에, 더 많은 힘이나 권력을 갖기 전에 조금이라도 낮고 젊을 때 더 많이 공부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분란만 만들어내는 노인네가 되어 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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