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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늙은 어부와 아내는 가윗돈을 얻을 요량으로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영도라는 어촌에서 나고 자랐다. 항구도시 부산 끄트머리에 있는 폭 8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혼인하여 사는 세월동안 어부의 아내는 아들 셋을 낳았지만 몸이 가장 약한 큰아들 훈이만 살아남았다. 훈이는 윗입술이 세로로 갈라지고 한쪽 발이 뒤틀린 채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어깨가 떡 벌어졌고 몸집이 다부졌으며 혈색이 좋았다. 어릴 적 온화하고 사려 깊던 성격은 청년이 돼서도 그대로였다. 훈이가 낯선 사람들 앞에서 습관적으로 갈라진 윗입술을 양손으로 가릴 때면 웃음을 띤 커다란 눈이 잘생긴 아버지와 꼭 닮아 보였다. 이마가 훤하고 눈썹이 먹처럼 진하며, 바깥일을 하는지라 늘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다. 훈이는 과묵한 부모와 마찬가지로 말솜씨가 좋지는 않았는데, 느릿한 말투 때문에 어디가 좀 모자란 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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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 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60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네." - P235

할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온 그 남자를 마주친 건 1993년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가 그중 한 사람이 사십사 년 전 신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왔던 정치보위부의 간부라는사실을 알게 됐다. 그 몇 년 전 할아버지는 신문에서 그가 1961년 박정희를 만나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며 남파됐다가 이 년 뒤 체포되어 비전향장기수로 복역한 후 출소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름만 보고 할아버지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지만 남한에서 그를, 그것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사람은 바르바라가 수도원 앞에서 발길을 돌려 떠난 뒤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여동생이 수녀원에 있느냐고 물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자, 게으르고 쓸모없는 수녀들이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유일한 길은 수도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하는일이라고 조롱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는 도 정치보위부장이다. 너희 반국가 행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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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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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성별을 고르는 것은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왜 본질적으로 인기가 없는 것일까? 이것은 공유지의 비극이다. 개인들의 자신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추구가 전체적인 해로움을 가져온다. 아들만을 낳으려는 사람 하나는 다른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두 이같이 행동한다면 모두가 고생할 것이다. 강간, 무법, 그리고 일반적인 개척 시대정신부터 권력과 영향력 있는 자리의 남성 독점의 증가에까지 다양하고 무서운 예측이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성적 불만 상태에 놓일 것이다.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며 전체적인 이익을 강요하는 법률이 통과되고 있는데, 이는 무법자 유전자를 무력화하기 위해 교차가 개발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성별의 선택이 간단하다면, 유전자의 의회가 공평한 감수분열을 강요하듯, 의회는 사람에게 50대 50의 성비를 요구할 것이다. - P197

 1972년 로버트 트리버스는 동물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러한 불균형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의 법칙에 어긋나는 예외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이 법칙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배 속에 태아를 아홉 달이나 담고 다니는 등 자식 키우기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암컷은 또 다른 짝짓기에서 얻을 이익이 거의 없다. 투자를 더 적게 하는 수컷은 다른 암컷을 찾을 여가가 생긴다. 따라서 폭넓게 이야기하자면, 수컷은 자식 양육에 덜 투자하며 많은 암컷을 찾게 되고, 반면에 암컷은 자식 양육에 더 많이 투자하며 수컷의 질을 따지게 된다?
그 결과 수컷들은 암컷의 주목을 받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수컷은 암컷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기회가 있지만, 동시에 자식을 하나도 남기지 못할 위험 또한 더 크다. 수컷은 유전자를 거르는 역할을 한다. 최상의 수컷만이 자손을 남길 수 있으며, 나쁜 수컷의 생식적 멸종은 집단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끊임없이 솎아내는과정이다. 때때로 이 이론은 남성의 ‘목적‘을 설명해주는 듯했지만, 그럴 경우 진화가 모든 생물종에게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 P203

 이에 관해서 우리는 찰스 다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윈은 처음 이 주제를 종의 기원에서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이에 관해 통째로 한 권을 저술하였다. 그 책의 제목은 『인간의 계보와 성에 관한 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이다.
다윈의 목적은 인종이 서로 다른 이유가 수세대를 거쳐오면서 각 종족의 여자들이 피부가 검게 보이거나, 하얗게 보이는 특별한 어떤종류의 남자들과 성교하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제안하려는것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윈은 하얀 피부나 검은 피부의 유익함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흑인 여자는 흑인 남자를 더 좋아하고 백인 여자는 백인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결과라기보다는 원인이라고 단정하였다. 마치 비둘기 애호가가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비둘기만 번식시킴으로써 그 품종을 개발해내는 것처럼, 동물들은 선택적인 짝 고르기를 통해 똑같은 방법으로 품종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종족 이론 Racial theory은 사람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선택적인 배우자 고르기에 대한 다윈의 생각은 그렇지 못했다. 다윈은 암컷이 수컷의 ‘품종‘을 고르기 때문에, 새나 다른 동물의 수컷들이 현란하고 화려한 몸치장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화려한 몸치장은 생존에 도움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적의 눈에 더욱잘 띄게 된다는 점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라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무지갯빛의 영롱한 눈처럼 치장한 긴 꼬리를 지닌 공작새의 수컷을 예로 들면서, 다윈은 수컷 공작새의 꼬리가 긴 것은 암컷 공작새가 꼬리가 긴 수컷하고만 짝짓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사실 공작새의 긴 꼬리는 꼬리가 아니고 꼬리 부분을 감싸고 있는 길게 늘어진 엉덩이 깃털이다). 어쨌거나 다윈은 수컷 공작새가 암컷에게 구애할 때 꼬리를 이용한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 이후로 공작새 수컷은 성선택의 문장이자 마스코트로, 그리고 그 상징과 원천이 되었다. - P205

그러나 수공작새의 펼친 꼬리를 보면, 그 꼬리가 암공작새를 유혹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다윈도 이렇게 해서 맨 처음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다윈은 수컷 새의 현란한 깃털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암컷에게 구애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마리 수공작새가 서로 싸울 때나 포식 동물로부터 도망칠 때 수공작새의 꼬리는 조심스럽게 접혀 들어가 있다. - P208

수컷의 몸치장에 대한 암컷의 선호는 수컷에게는 생존의 위협이된다. 주홍색 깃털을 지닌 태양새는 현란한 녹색을 띤 새로, 케냐 산높은 기슭에서 꽃의 꿀이나 날개를 쳐서 잡은 곤충을 먹고 산다. 수컷은 두 개의 긴 꼬리깃을 가지고 있는데, 암컷은 가장 긴 꼬리깃을가진 수컷을 좋아한다. 그래서 첫 번째 수컷은 꼬리깃을 길게 해주고, 두 번째 수컷은 꼬리깃을 짧게 해주며, 세 번째 수컷에게는 꼬리깃에 무게를 더해주고, 네번째 새에게는 비슷한 무게의 고리를 다리에 맨 후 실험해본 결과, 두 과학자는 암컷이 선호하는 꼬리깃이 수컷에게는 짐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꼬리깃을 길게해준 수컷이나 꼬리깃에 무게를 더해준 수컷은 벌레를 잡아먹는 데 서툴렀으며, 꼬리깃이 짧아진 수컷은 벌레를 훨씬 더 잘 잡아먹었고, 다리에 고리를 매단 새는 정상의 새와 다름이 없었다.
암컷이 짝짓기 상대를 선택하고, 암컷의 선택 성향은 유전되며, 암컷이 과장된 몸치장을 선호하고, 과장된 몸치장은 수컷에게 짐이된다는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다윈은 옳았다. - P211

 암공작새는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단지 유혹을 받았을뿐이다. 암공작새는 무슨 생각을 한 뒤가 아니라 최강의 수컷이 보여주는 외모에 반해 유혹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 암공작새가 보여준 행동을 ‘선택選擇‘이라고 해두자. 사람들은 선택이 의식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반복적으로 저지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암컷들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짝을 선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경우에 비유해서 생각해보자. 동굴에 벽화를 그렸던 두 원시인이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우다가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아내를 어깨에 걸쳐메고 갔다는 것이 한쪽 끝의 예라면, 사랑하는 여인을 능숙한 글솜씨로 유혹하려 한 코주부 시라노 (프랑스 극작가 로스탕의 동명 운문 희곡의 주인공으로, 코가 크고 못생긴 호걸의 대명사-옮긴이)의 이야기는 다른 쪽 끝의 예가 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수천 가지의 경우가 있다. 남자가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남자와 경쟁하거나, 여자에게 사랑을 호소하거나 혹은 두 가지 방법을 다 쓸 수 있다.
사랑을 호소하거나 싸워 이기는 이 두 가지 방법은 똑같이 ‘가장 훌륭한‘ 수컷을 골라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처음 방법은 멋쟁이를 골라내겠지만, 두 번째 방법은 싸움꾼을 골라낸다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코쟁이바다표범이나 엘크사슴의 수컷은 덩치가 크고위협적으로 생겼으며, 공작새나 나이팅게일은 미모를 뽐내며 잘난체한다. - P209

공작새는 레크 lek를 통해서 유혹하는 기술을 마음껏 발휘하는 몇안 되는 새 종류들 가운데 하나이다. 레크는 스웨덴어로 놀이를 뜻한다. 몇 종류의 뇌조, 풍조와 마나킨 새, 그리고 많은 수의 영양, 사슴, 박쥐, 물고기, 나방, 나비와 다른 곤충들도 레크를 한다. 레크는 특정 장소를 말하는데, 짝짓기 시기가 되면 수컷들은 그곳에 모여 각각 자그마한 영역을 정해놓고 그곳을 찾는 암컷들에게 자신의 상품을 선보인다. 레크의 특성은 대개 그 중심에 있는 한두 마리의 수컷이 짝짓기를 대부분 독차지한다는 것이다. 짝짓기에 성공적인 수컷이 레크의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것이, 결과에서 보는 것처럼 성공의이유는 아니다. 다른 수컷들이 바로 그 주변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레크를 하는 새들 가운데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새는 미국서부에 사는 뇌조이다. 동트기 전에 와이오밍 주의 한가운데로 차를몰아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광활한 평원에서서 춤추는 뇌조를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뇌조들은 자신의 자리를 안다. 늘 그렇듯이 뇌조는 가슴속 허파에 공기를 가득 채우고 도도히 걸어나가며, 폴리 베르제르 (파리에 있는 뮤직홀-옮긴이)에 등장한 무용수처럼 깃털을 펄럭이며 몸을 튕겨올린다. 암컷은 짝짓기 시장을 둘러보고 다니며, 며칠 동안 상품을 찬찬히 살펴보고 난 뒤에 그중 한 마리의 수컷과 짝짓기를 한다. 암컷이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암컷이 수컷 앞에서 땅에 엎드린 후에야 수컷은 암컷에 올라탄다. 교미가끝나고 나면 암컷의 길고도 외로운 새끼 돌보기가 시작된다. 암컷이 수컷에게 받은 것은 유전자뿐이다. 암컷은 마치 차지할 수 있는 최상의 유전자를 차지하려고 애써온 것처럼 보인다. - P215

그러나 선택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물에게도 가장 큰 선택의 문제는 다시 나타난다. 한 마리의 수컷 뇌조가 한 번의 레크 안에서 일어나는 짝짓기의 반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두머리 수컷이 하루 아침에만 30번 이상 교미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 다. 그 결과, 제1세대에서는 집단이 지닌 유전자의 정수가 마치 우유에서 크림이 뽑히듯이 빠져나가게 된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정수의 정수가 빠져나가며, 제3세대에서는 정수의 정수의 정수가 빠져나간다. 낙농을 하는 농부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런 방법은 아주 빨리 빈털터리가 되는 방법이다. 즉, 우유에는 두껍게 걷어낼만큼 충분한 양의 크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뇌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수컷의 10퍼센트만이 다음 세대의 아버지가 될 수있다면 얼마 가지 않아 모든 수컷과 암컷들은 유전적으로 서로 같게될 것이고, 모든 수컷이 서로 같으므로 다른 수컷과 비교해서 어느한 수컷을 선택한다는 일은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이런 현상을 ‘레크 역설 Lek paradox‘ 이라고 하는데, 바로 성선택에 관한 현대의 모든 이론들이 뛰어넘어야 할 장애이다.  - P217

피셔 이론(‘성적 매력이 있는 아들 이론‘, ‘좋은 취향 이론)의 지지자들은 암공작새들이 잘생긴 수공작새를 선호하는 이유는 암컷들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바로 전수될 아름다움 자체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아들들 역시 암컷들을 잘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유전자 이론(‘건강한 자손 이론‘, ‘좋은 감각 이론‘)의 지지자들은 암공작새들이 아름다운 수공작새를 선호하는 이유가 아름다움이 곧 좋은 유전적 자질, 즉 질병에 대한 저항성, 정력, 강인함의 상징이므로, 자식들에게 이러한 자질들을 남겨주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 P218

우아한 장식이나 긴 꼬리를 나타나게 한 유전자들에 무작위적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치장이 더 우아할수록 그 몸치장을 덜 우아하게 할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커진다. 더욱더 우아하게 만드는 돌연변이는 일어나기가 어렵다. 왜그러한가? 돌연변이는 유전적 작업에 던져진 스패너와 같다. 양동이와 같은 간단한 도구에 스패너를 던진다 해도 양동이의 쓰임새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와 같이 좀 더 복잡한 기계에 스패너를 던지면 자전거는 거의 확실히 망가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전자에 생기는 어떤 변화도 몸치장을 작게, 균형이 덜 잡혀게 덜 화려하게 만들려는 경향을 나타낼 것이다. 수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돌연변이적 편향‘은 암컷으로 하여금 몸치장이 화려한 수컷을 선택할 가치가 있도록 해주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몸치장에 나타나는 결함이 아들에게 유전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장 우아한 몸치장을 한 수컷을 선택함으로써 암컷은 가장 적은 돌연변이를 지닌 수컷을 고르는 것이다. 아마도 돌연변이적 편향은 예전에 세워놓은 이론에 의한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를 충분히 풀어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 세대마다 유전적 크림 중의 최상의 크림을 거둬내면, 크림에는 더 이상 거둬낼 좋은 크림이 남지 않게 될까 걱정했다. 돌연변이적 편향은 이러한 크림의 일부를 다시 우유로 바꾸어놓는 일을 쉬지 않고 해낸다.  - P221

화려한 몸색깔이나 수공작새의 꼬리도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생생물과 숙주가 서로 이기기 위해서 계속 유전적 특성을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세대에서 특정 성질을 지닌 숙주의 개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음 세대에서는 이들의 방어 메커니즘을 무력화할 수 있는 기생생물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의 반대현상도 역시 성립한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기생생물에 대해 내성이 가장 강한 숙주들이 다음 세대에서 가장 수가 많은 숙주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병에 대한 내성이 가장 강한 수컷이 앞 세대에서 가장 내성이 약한 개체의 후손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로써 레크의 역설은 단번에 해결된다. 각 세대에서 가장 건강한 수컷을 선택함으로써, 암컷들은 매번 색다른 유전자의 조합을 선택하게 되고, 선택해야 하는 유전자들의 다양성은 결코 감소하지 않게 된다. - P231

테스토스테론의 면역 효과가 여성보다 남성이 감염성 질병에 쉽게 걸리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동물계 전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시들은 다른 남성들보다 장수하며, 수컷은 일반적으로 치사율이 높고 긴장도많이 느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작은 동물인 유대류 쥐는 모든 수컷이 광적인 교미 시기에 치명적인 병에 감염되어 죽는다. 이것은 마치 수컷들이 정해진 양의 에너지만 지녀서 이를 테스토스테론이나병에 대한 면역 중 하나에만 쓸 수 있을 뿐 동시에 두 가지 모두에 사용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성선택은 거짓말이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상태에 비해 성호르몬의 농도가 너무 높으면 장식용 기관의 크기는 커지겠지만 기생충에 더 쉽게 감염되며, 이것은 장식용 기관의 상태에 반영된다. 그 반대도 성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면역체계는 테스토스테론의 생산을 억누른다. 주크의 말을 인용하면 "따라서 수컷은 수컷으로서의 몸치장을 획득하면서 병균에 더 쉽게 노출되는 것이다" " - P240

 한 예로, 레크를 하는 동물들은 암컷이 모든 수컷을 한곳에서볼 수 있으므로 피셔 효과의 감소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질들은 사라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형질이 소유자가 건강하다는것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수컷이 기생생물에 감염되면 그런 형질은 수컷의 몸색깔을 바꾼다. 그렇기 때문에 암컷들은 최고의 수컷을 고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암컷은 계속해서 가장 멋있는 수컷을 고르는데 (아니면 가장 멋있는 수컷에게 유혹당하거나),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질병에 대해 면역성을 지닌 자손을 낳을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상태를 반영하는 형질은 과장된 몸치장을 하게 하는 형질일 뿐 아니라 가장 오래 유지되는 형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레크를 하는 동물들에게도 피셔 효과로 부각된 형질이 유지되는데, 이는 선택에 따른 희생이나 대가가 아주 작기 때문이다. 가장 문란하게 짝을 짓는 동물들은 여러 장애, 장식, 그리고 화려한 반점들이 혼합된 모습을 지니게 된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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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붉은 여왕식 설명의 역사는 한 문제에 대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종합하는 과학의 방법에 관한 아주 좋은 예이다. 해밀턴과 다른 사람들의 기생생물과 성에 대한 생각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독립된 세 연구의 수혜자들이다. 첫째는 기생생물들이 개체군을 조절하고 개체군의 주기를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알프레드 로트Alfred Lotka 와 비토 볼테라 Vito Volterra가 제시하였고, 1970년대에 런던에서 로버트 메이 Robert May와 로이 앤더슨 RoyAnderson이 다시 언급하였다. 둘째는 1940년대에 홀데인 등에 의한 풍부한 다형 현상의 발견이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유전자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한 형태가 다른 형태를 제거하지 못하게 작용한다는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셋째는 월터 보드머 Walter Bodmer와 다른 의학자들이 발견한 기생생물에 대한 방어 방식이었다. 그것은 방어 유전자가 자물쇠 열쇠 체계 같은 것을 제공해준다는 생각이었다. 해밀턴은 이 세 가지 물음을 합쳐, 기생생물은 저항 유전자를 계속 바꿔나가는 숙주와 꾸준히 싸우는데, 이때 유전자의 형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 P139

성과 질병은 깊은 연관이 있다. 기생생물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성이 필요하다. 기생생물보다 자신들의 유전자가 한 걸음 앞서가게 하기 위해 생명체에게는 성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수컷은 쓸모없는 잉여가 아니다. 그들은 독감이나 홍역 등으로 자손이 몰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암컷의 보험 증서이다(이것으로 위안이 된다면), 암컷은 자신의 난자에 정자를 추가시키는데, 만약 이런 행위를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 생기는 자손들은 그들의 유전적 자물쇠를열려고 오는 첫 기생생물의 공격에 모두 똑같이 취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성들이 자신들의 새 역할을 축복하기 전에,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북을 치며 병원체에 대한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들 존재의 목적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겠다. 곰팡이를 고려해보도록 하자. 많은 곰팡이들이 유성이지만 웅성을 띠고있지는 않다. 곰팡이들은 수만 개의 다른 성을 지니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동일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번식할 수는 있지만 자가교배는못한다. 심지어는 동물 가운데에도 지렁이같이 자웅동체인 동물들이 많다. 유성이 다양한 성별의 필요성, 단 두 성별의 필요성 또는그 두 성별이 암수처럼 동떨어져 있을 필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로 처음 본 순간에 가장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 양성 체계이다. 만나는 사람 중 족히 50퍼센트는 배우자로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웅동체라면 모든 사람이 배우자의 가능성을 지닐 것이다. 우리가 수천 종류의 성별을 갖는다면, 보통 독버섯처럼 만나는 사람의 99퍼센트가 배우자의 가능성을 지닌다. 만약 세 종류의 성별을 갖는다면 3분의 2가 가능성을 가진 배우자가 된다. 왜 사람들이 성을갖는가에 대한 붉은 여왕의 풀이는 단지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임이 밝혀지고 있다. - P143

 유전자는 의식이 없고, 서로 협동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화학적 신호에 의해 켜지거나 꺼지는 생명력이없는 분자이다. 그들을 올바른 순서로 작동하게 해서 인간의 육체를만들도록 하는 것은 신비스러운 생화학적 계획이지 민주주의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수년간 윌리엄스, 해밀턴 등에 의해 시작된 혁명으로 점점 더 많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활발하고 약삭빠른 개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유전자가 의식이 있거나어떤 목적을 향해 작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진지한 생물학자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뚜렷한 목적론적인 사실은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자연선택은 자신의 생존 능력을 높여주는 유전자의 강화된 생존이라는 것이다. 즉,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잘 전달되는 유전자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적론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생존을 향상시키는 작용을 수행하는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협동하여 촌락을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인 사회 전략이듯이, 유전자에게는 협동하여 신체를 만드는 것이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모두 협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쟁적인 자유기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 P148

수십억 년 전에 생명체가 원시 대양에서 나온 이후 다른 분자를 사용하여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의 수는 증가했다. 그러다 그 몇몇분자들은 협동과 분화의 이점을 알게 되었고, 염색체라는 그룹을 만들었으며 세포라는 기계를 작동하여 효과적으로 염색체를 복제할수 있었다. 마치 작은 농부 집단이 목수와 대장장이를 만나 촌락이라는 작은 협동 조직을 형성하듯이. 그리고 촌락 부족을 이룬 것처럼, 염색체는 몇몇 세포를 합쳐서 초세포Super cell를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세포는 이렇게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가 모여서 형성되었다. 부족에서 국가로, 그리고 제국이 되어가듯이, 세포들은 뭉쳐서 유전자 집합체의 거대한 집합체인 동식물과 균류를 만들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과정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앞서 사회적 이익을 강요하는 법이 시행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전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후세들이 유전자를 평가하는데는 한 가지 기준만이 있다. 바로 다른 유전자들의 조상이 되는가이다. 대체로 다른 유전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부를 축적할 때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타인을 설득해 그의 부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전자가 독립하면 그때는 다른 모든 유전자는 적이 되어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게 된다.
만약 유전자가 연합체의 일부라면 경쟁 연합을 패배시키는 데 똑같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마치 보잉사의 직원들이 에어버스사의 희생속에서 성공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 P150

개개의 유전자 차원에서 보면, 유전자는 성을 통해 수직적으로뿐아니라 수평적으로도 퍼져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자신이 거주하는 전달체에 성을 갖도록 했다면, 설령 개체에게 불이익이 가더라도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가능하다면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쪽으로). 광견병 바이러스가 다른 개로 퍼지기 위해 개를 조종하여 무엇이든 물게 하듯이, 유전자는 다른 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숙주가 성교하도록 만든다. - P152

히키와 로즈는 특히 한 염색체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다른 염색체로 옮겨가는 전이인자 transposon 혹은 도약 유전자라는 유전자에 홍미를 느꼈다. 1980년 같은 시기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전이인자가 다른 유전자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복제만을 퍼뜨리는 ‘이기적인‘ 기생 DNA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과거의 과학자들처럼 전이인자가 개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전이인자가 개체에게는 나쁘지만 전이인자 자신에게는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강도와 무법자는 사회에 이익을 주기보다는 손해를 끼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아마도 전이인자는 ‘무법자 유전자‘ 이리라. 또한 히키는 전이인자가 근친교배나 무성교배하는 생물보다는 이계교배하는 유성생식 생물에서 더 흔하게 발견되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수학적 모델을 이용하여 기생적인 유전자가 숙주에 악영향을 주더라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히키는 유성생식 중에서는 빠르게 퍼지지만 무성생식 종에서는 느리게 퍼지는 효모의 기생성 유전자를 찾았다. 그러한 유전자는 ‘플라스미드plasmid‘ 혹은독립된 작은 DNA 고리에 위치하며, 박테리아에서는 이런 플라스미드가 유전자들이 퍼지는 수단인 접합을 유도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하는 광견병 바이러스와 같다. 나쁜유전자와 전염성 바이러스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 P153

 여성이 임신하면 배아는 어머니가 지닌 유전자의 반만을 받는다. 이 유전자들은 운이 좋은 것이다. 운이 없는 다른 반쪽은 다음기회를 기다린다. 요점을 말하자면 사람은 23쌍의 유전자를 지니는데, 23개는 어머니의 것이고 23개는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난자나 정자를 만들 때 각 쌍으로부터 하나씩 채택해서 최종적으로 23개의 염색체를 갖게 된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만을 그대로주거나 아버지의 것만을 주거나, 아니면 두 가지가 혼합된 상태로줄 수 있다. 이때 확률을 조작해서 배아에 들어갈 확률을 50퍼센트이상으로 증가시킨 이기적인 유전자는 훨씬 유리해질 것이다. 이 유전자가 단순히 배아의 다른 쪽 조부모에서 온 유전자를 제거한다고가정해보자.
실제로 그런 유전자가 있다. 어떤 초파리의 2번 염색체에는 ‘분리교란자 segregation distorter‘ 라는 유전자가 존재한다. 이 유전자는 단순히 다른 2번 염색체를 지닌 모든 정자만을 제거한다. 그래서 이 초파리는 정상 개체의 절반 분량의 정자만을 생산한다. 그렇지만 모든 정자는 분리 교란자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초파리의후손에 대해 독점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유전자를 카인이라고 하자. 그런데 카인은 아벨의 일란성쌍둥이이므로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그의 형제를 죽일 수 없다. 아벨에게 사용할 무기가 세포 내로 방출되는 파괴 효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학 무기와 같다. 이때 카인의 방어책은 자신을 보호해주는방독면 같은 기구에 의존하는 것뿐이다(이것은 파괴 효소를 물리치는유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카인의 방독면‘은 카인이 아벨에게 사용하는 가스로부터 카인 자신을 보호해준다. 카인은 인류의 조상이 되고아벨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형제 살인을 행하는 유전자는 살인자가 대지를 상속하듯 자손을 퍼뜨릴 것이다. 분리 교란자와 형제를 죽이는 유전자들을 속칭해서 ‘감수분열 추진자meiotic drive‘ 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들이 동반관계가 깨지는 감수분열 과정에서 편협한 결과가 나오도록 추진하기 때문이다. - P155

생쥐와 초파리의 경우, 카인 유전자는 자신의 방독면을 꼭 껴안음로써 교차가 일어날 때 떨어지지 않아 살아남는다. 그렇지만 특별히 카인 유전자의 침입을 많이 받는 염색체 한 쌍이 있는데, 이는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 ‘성염색체‘ 이다. 사람을 비롯해 다른 많은 동물에서 성별은 유전자 추첨으로 결정된다. 부모로부터 한 쌍의 X염색체를 물려받으면 여성이 되고, 하나의 X와 하나의 Y를 받으면 남성이 된다(새, 나비, 또는 거미의 경우에는 반대이다), Y염색체에는남성의 특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으므로, Y는 X와 양립하지 않고 서로 교차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X염색체의 카인 유전자는 자살의 위험 부담 없이 Y염색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 이 유전자는다음 세대에서 성비性比를 여성 쪽으로 기울게 하여 전체 인구가 대가를 치르도록 유도하지만, 후손을 독점하는 이익은 자신이 얻는다. 마치 불로소득자가 공유지의 비극을 유발하는 경우와 같다. - P157

옥스퍼드대학의 로렌스 허스트는 이 논점을 이용하여 성별은 융합성교fusion sex의 결과라고 예측했다. 즉, 클라미도모나스와 대부분의 동식물에서처럼 성교가 두 세포의 융합 형태로 일어나는 경우에 두 종류의 성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세포 사이에 관이 형성되어 핵 유전자가 이것을 통해 전달되는 접합의 형태에서는 세포의 융합이 없고 그래서 분쟁이 없으므로 살인자와 피해자의 성별은 필요 없다. 섬모성 원생동물과 버섯같이 접합성교 conjugation sex를 하는 종들에게는 수십 종류의 성별이 있다. 융합성교를 하는 종들에게는 대체로 두 종류의 성별이 나타난다. 특히 두 방식 모두로 성교를 하는 ‘하모‘섬모충은 좋은 예이다. 하모류가 융합성교를 할 때에는 두 종류의 성별이 보이고, 접합성교를 할 때에는 많은 성별이 나타난다. - P161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끝장을 보는 것이 기생생물에게 이롭다면, 숙주로서는 두 형질의 기생생물들에 의한 교차감염을 방지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성교보다 교차 감염의 위험률이 높은 것은 없다. 난자와 융합하는 정자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안고 들어올 위험이 있다. 이것들이 침입하게 되면 난자 내의 기생생물들을깨워 난자를 병들게 하거나 죽일 수 있는 쟁취의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자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묻혀올 수 있는 물질을 난자 안으로 가져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오로지 핵만을 난자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바로 안전한 성교가 아닌가?
이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느다란 관으로 여분의 핵을 전달하는 접합생식을 하는 짚신벌레는 이 이론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이 과정은 관을 통해 핵만 이동한다는점에서 위생적이다. 두 마리의 짚신벌레는 이렇게 2분 정도만 붙어있는데, 이 시간이 넘으면 관을 통해 세포질이 이동한다. 이 관은 너무 좁아서 핵도 간신히 비집고 통과한다. 따라서 짚신벌레와 유사종들만이 그렇게 작은 핵을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작은핵은 유전자를 저장하고 있어서 ‘암호 저장고‘ 라고 불리며 작은 핵에서 일상생활에 쓰이는 큰 핵이 만들어진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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