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 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60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네." - P235

할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온 그 남자를 마주친 건 1993년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새마을호 기차 안에서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가 그중 한 사람이 사십사 년 전 신부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왔던 정치보위부의 간부라는사실을 알게 됐다. 그 몇 년 전 할아버지는 신문에서 그가 1961년 박정희를 만나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며 남파됐다가 이 년 뒤 체포되어 비전향장기수로 복역한 후 출소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름만 보고 할아버지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지만 남한에서 그를, 그것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사람은 바르바라가 수도원 앞에서 발길을 돌려 떠난 뒤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여동생이 수녀원에 있느냐고 물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렇다고 하자, 게으르고 쓸모없는 수녀들이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유일한 길은 수도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혼인하는일이라고 조롱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총을 꺼내들고 "나는 도 정치보위부장이다. 너희 반국가 행위자들을 모두 체포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 목소리를, 그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 사이의 통로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바르바라와 바르바라와… 그리고 또다른 바르바라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객차 안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온 신경은 그 남자에게 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있는 곳에 그 남자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미래의 우리를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렇게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렸고, 할아버지는 대구에서 내렸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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