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재일동포사건이나 일본 관련 사건에는 증거의 왕 자백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간첩 조작의 만능열쇠가 하나 더 있다. 서울시 공무원간첩 조작 사건에서 논란이 된 ‘영사 증명‘이 바로 그것이다. 영사 증명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이재승 교수가 지적한것처럼 영사 증명은 증명되어야 할 사실을 증명된 것처럼 꾸민 ‘찌라시‘일 뿐이다. 간첩 사건에 제출된 영사 증명은 영사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는, 아니 원천적으로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 행위는 접수국의 주권 또는 관할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사가 본국 수사기관의 요청으로 "형사소송의 보조자로, 수사권의 주체로 나서 접수국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영사 증명서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본국 법정에 제출하는 행위는 자신이 국제법상 불법행위를저질렀다고 자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91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마리‘의 간첩이 나오기위해서는 수많은 자들의 팀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단 중앙정보부, 안기부만이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받쳐주고, 검찰이 법률적으로 포장해주고, 판사가 고문당했다는 호소에도 바짓가랑이 들어보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조작의 한 부분을 맡아 팀플레이를 해가며 간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간첩들 중에서 현재의 국가 기밀 개념을 적용한다면 간첩죄로 유죄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첩은 처음에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모르는 놈을 "저 자식 간첩 아냐"라고 손가락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첩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간첩보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 P93
대형 내란 사건이나 공안 사건이 발생할 때의 상황을 보면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을 늘 발견하게된다. 왜 하필 이런 때면 꼭 내란이 일어나거나 공안 사건이터지는 것일까?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에는빨갱이 선동이 필요했고, 1967년 6월 8일에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동백림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공개 등 정치 개입에 대한 반발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때맞춰 터져준 것처럼 내란의유령이 잠에서 깨어날 때는 스멀스멀 나쁜 기운이 한국 사회를 감싸기 마련이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초대형 공안 사건을 터뜨려 각종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다행히 그때만 해도 극우 보수 세력 중에서도 가장 극우라 할수 있는 공안 검사들의 양심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맞춤법도 안 맞는 시나리오에 따라 관련자들을 기소하는대신 사표를 던졌다. - P116
유신은 그렇게 왔다. 유신이야말로 형법전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내란이었다. 수많은 함량 미달의 내란 사범을 양산한 박정희가 내란이란 이런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란죄의 구성요건에서 가장 중요한 국헌문란에 대해 형법 9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박정희가 자기 마음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분리해놓은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로 집중시킨 것이야말로 똑 떨어진 국헌문란 행위였다. 탱크와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으니 이것이 87조 내란죄에서의 ‘국헌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5.16 군사반란 무렵의 군형법을 보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자" 중에서 "수괴는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무기징역도 없는 사형인 것이다. 유신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내란이었다. 이 내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많은 내란 사범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 P124
1979년의 10•26 사건은 김재규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자행한 유신이라는 내란을 종식시킨 민주혁명이었을까. 아니면 전두한 측의 주장대로 정권을 찬탈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망상을 가진 김재규가 저지른 내란이었을까? 12•12와 5•17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행위를 자연인 박정희에 대한 단순 살인이 아닌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규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강압적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장 이영석은 입이 돌아가는 마음고생을 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쫓겨나는 자리에서 이영석은 회한과 오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퇴임사를 쓰면서 사법부의 한자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부(府)가 아닌 법무부 같은 행정부의 한 부서를 의미하는 부(部)로 표기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5·16군사반란과 유신친위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뿐이다. 5.17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이바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란음모죄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전 단계인 모의를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 있다. 즉 내란음모죄로는 사형이 불가능한 것이다.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받은 것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유신 직후 일본에 망명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민주인사들을 모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1977년 법원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의간첩 조작 사건에서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판시했고, 이판례를 인용하여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반국가단체의 수괴로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민통에 대한 반국가 단체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한 사람이 박근혜 정권 출범직후까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 P130
김대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내란음모에서 주요 임무 종사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등의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향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바로 김정사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증인으로 활약했던 윤효동이란 자였다. 윤효동이 법정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북 말투로 김대중 등이 얼마나 불온한 자들이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있는지 열변을 토할 때 순발력 좋은 김상현 의원이 이 법정이어느 나라 법정이냐고 크게 외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간첩이 북한식 말투로 민주 인사들을 모함하는 발언을 증언이랍시고 듣는 법정이 대한민국 법정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정인가를 따져 물은 것이다. 쇼맨십 풍부한 문익환 목사는 벌떡 일어나 "내란이다!"라고 소리쳤고, 다른 피고인들도 따라 일어나 윤효동을 향해 "내란이다!" 하고 소리쳤다. 겁먹은 윤효동은 검사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쪽문으로 쫓겨나갔다고 한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슬픈 코미디였다. - P131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항, 그 존재만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이익분배 균점권 조항이 들어간 것일까? 혹시 제헌헌법을 좌파들이 모여 만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좌파는 5 • 10 선거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파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이익분배 균점권을 제헌헌법에 집어넣을 것을 주장한 세력은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대한노총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전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좌파 노동운동 세력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노동 단체의 간판을내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승흠에 따르면 노동자의 이익균점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을 한 정치 지도자는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자본과 노동이 평균 이익을 누리게 하자는 주장"을 "제헌국회의 헌법심의 중에서. 그것도 이익 균점권 논의에서" 한 것이다. 아무리 이승만이라 한들 국민생활의 균등한 보장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없었던 것이다. - P141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87조의 중요 산업 국영 · 공영 원칙에 대해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 조항은 소련이나 전시 중화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정으로 "우리나라 헌법의 진보성을 표현한 규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규정만으로 볼 때에는 우리나라는 국가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채용하였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P144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지주의 토지를 비록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토지가 가장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던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수백 년간 지배층으로 군림해온 지주층에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사 연구가 처음 시작된 1980년대에는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된 이북의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농지만을 대상으로한 남쪽의 농지개혁이 제한된 의미만 갖는다고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또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엄청난 교육열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구나 한국 전쟁의 향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농지개혁의 의미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 P147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 세력의 결집체인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교주와교수로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유진오는 헌법 조항을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 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인물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두 신문의 사주 일가가 김성수나 방응모가 보여주었던 아량과 금도를 반의반만 보여줬어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칭 ‘애국 보수‘들은 자기 조상의 역사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같은 인간 백정에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이회영 등 6형제, 김성수,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P149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 측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있다. 첫번째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김일성만 독점적·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과연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 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 더 중요한 문제는 검찰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만이 쓴것처럼 규정하면서 종북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을 종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된 것으로몰고 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우리 헌법의 역사성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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