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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손이나 눈에 있지 않다.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고도 운전을잘 할 수 있고 전화를 쥐고서도 도로로 시선을 향할 수 있다. 사실 전화기를 손에 쥐는 행동이나 운전대를 조종하는 행동에는 인지능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과정은 대부분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좌회전할 때 혹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어야 할 때 팔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운전 행위에 따르는 한계가 아니라 주의력 자원과 인지가 갖는 한계다. 사실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는 점에서 손에 드는 전화기나 핸즈프리 전화기는 거의 차이가 없다. 같은 방식, 같은 정도로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아주 능숙하고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 것 같아도 운전과 통화는 둘 다 한정된 용량의 주의력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다. 그리고 운전과 통화라는 다중작업을 하게 되면, 비록 전화로 무슨 말을 듣든,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던 간에 운전이나 통화를 따로 할 때보다 더 많은 주의력 자원이 요구된다. - P46

고릴라 실험을 다시 한 번 진행하면서 나는 실험 참가자의 과제인 패스 횟수 세기의 난이도를 높여 주의력의 한계를 실험했다. 흰 셔츠를입은 사람들의 패스를 모두 세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흰 셔츠를 입은 사람들에 집중하되 공중에서 넘기는 패스와 바닥에 튕겨서 넘기는 패스, 두 종류로 나누어 세라고 한 것이다. 내 예상대로 갑자기 등장한 고릴라를 못 본 사람의 수는 20퍼센트 증가했다. 횟수 세기 과제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실험 참가자들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그결과 고릴라를 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은 줄어들었다. 주의력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면 그만큼 예상치 못한 일을 알아차리게 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전화기를 손으로 드는 게문제가 아니라 한정된 인지 자원을 소비하는 게 진짜 문제다. 무엇보다중요한 사실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 실험 참가자들에게서 볼 수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인지의 한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P47

 이런 실패나 주의력 착각이 시각이라는 감각에만 국한되는 것은아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주의 난청無主意 難聽 inattentional deafiness 을 경험할수도 있다.  - P50

진이 설정한 상황에서 출근 중인 사람들은 회사에 빨리 가야 한다는생각에 빠져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저 그런 거리의 악사들과 조슈아 벨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연주에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조슈아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누구도 조슈아의 수준 높은 음악에 귀 기울이지 못한 이유는 진이선택한 시간과 장소였다. 진은 우려를 표명했다. "만약 우리가 지상 최고의 음악가 중 한 사람이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곡들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출 시간조차 없다면, 현대인들이 삶의 물결에 휩쓸려 그런 소중함을 느낄 수 없게 귀가 멀고 눈이 먼다면, 그때는 또 무엇을 놓치게 되는가?" 분명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겠지만, 이 거리 공연은 현대인의 삶에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할 기회가 부족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다. 이치에 맞게 설명하자면, 출근할 때처럼 하나의 일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나타나도, 설령 그것이 출근길에서 연주하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라 할지라도, 그 존재를 몰라볼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3

주의력 착각이 곳곳에 배어 있다면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아 이런 사실을 연구하고 있을까? 어째서 우리 조상은 예기치 않은 포식자들에게모두 잡아먹히지 않은 것일까? 무주의 맹시와 그에 따른 주의력 착각은 현대 사회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도 무언가를 인식하는 데 현재의 우리와 비슷한 한계를 지녔음에 틀림없지만 세상이 단순했던 만큼 인식해야 하는 대상 역시 적었을 것이다. 즉각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물체나 상황도 지금보다 드물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기기들에 엄청난 주의를 더 많이, 더 자주, 더빨리 기울여야만 한다. 시각과 주의력을 담당하는 우리 신경계는 자동차 속도가 아니라 보행자 속도에 맞춰져 있다. 걸을 때는 예상외의 물체를 발견하기까지 지체되는 몇 초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운전할 때는 다르다. 예상외의 상황을 알아차리는데 1초의 10분의 1이라도 지체하면 당신 혹은 다른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알아차리기가 지체되는현상은 가장 빠른 속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무주의 효과는 빠른 속도에서 증폭된다. - P64

문제는 우리의 주의력이 부족할 때 이를 알려줄 증거가 부족하다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력을 착각하는 근본원인이다. 우리는 미리 알았을 때만 예외상황을 인식할 뿐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은 인식할 수없다.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미리 알아챌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지 깨닫게 해주는 경험, 즉 가슴을 두드리는 고릴라를 못 본 것처럼 타인에게 핑계를 전가할 수 없는 (그리고 변명해봤자 소용없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 P65

기억력 착각이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한계를 착각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기억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기억력 착각은 자신이 한 일을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강조되어 발생하는 착각이다.  - P79

무엇을 인지할 때 사람은 모든 정보를 상세하고 완전하게 조합하기보다는 본 것(들은 것, 냄새 등)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추출하려 한다. 인간이 입수되는 모든 자극을 똑같이 충직하게 간직하도록 뇌를 진화시켜 왔다면 보유 에너지와 자원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억은 우리의 인지내용을 모두 저장하는 대신, 보고 들었던 사실을 가지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연관성을만든다. 이런 연관 작업은 우리가 본 것에서 중요한 사실을 포착하고세세한 내용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억을 더 잘 저장하고 꺼낼수 있도록 ‘회상의 실마리retrieval cues‘ 를 제공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회상의 실마리는 유용하지만 기억의 정확성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사람은 원본의 기억과 연관 작업 및 지식에 기초해 재구성된 기억을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 P80

앞뒤 방면 사이에 명백히 보이는 변화를 포착하지못하는 놀라운 현상을 변화 맹시Change bindiness 라고 한다. 현재 상황과 이전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변화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논의했던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indness와 관련 있지만 동일한 현상은 아니다. 무주의 맹시 현상은 목격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던 어떤 대상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 대상은 마치 고릴라처럼 우리 바로 앞에 내내 있으면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게 뚜렷하다. 변화 맹시로 인해 줄리아 로버츠가 크루아상을 먹고 있던 장면을 기억하지 못하면 팬케이크를 먹고 있는 현재 장면에서 변화를 전혀 포착할 수 없다. 변화 맹시는 현재 모습과 이전 모습 사이의 변화를 비교하여 포착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사물이 갑자기 다른 사물로 바뀌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러니 변화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 매순간 눈에 보이는 대상을 꼼꼼히 점검한다면 뇌의 능력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일일 것이다.
변화 맹시보다 큰 문제는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이러한 오해에 대니엘 레빈은 깜찍하게도 ‘변화 맹시에 대한 맹시change blindness blindnes‘ 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은 본인의 변화 맹시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 P90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 기억은놀랄 만큼 불완전하다. 대개 우리가 재생하는 기억은 개략적일 뿐이고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워지며 다른 영향에 좌우된다. 즉 기계로 녹음한음악이라기보다 즉흥적인 반복 연주에 가깝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정확하다고 믿는 실수를 종종 저지르며,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기억과 나중에 덧붙여진 기억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이것이 켄의 사례를설명해준다. 켄은 그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유형의 왜곡은 ‘기억출처의 오류 記億出處誤謬failure of source memory‘ 라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켄은 그 기억의 원출처를 잊어버렸다.
기억출처의 오류는 고의적이지 않은 여러 표절 사례의 원인이 된다. - P100

1899년 프레더릭 컬그로브Frederick Colgrove는 클락Clark 대학 박사과정으로 주요 사건에 대한 상세 기억‘을 체계적으로 처음 연구한 사람이다. 컬그로브는 179명의 중·노년에게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디 있었는지 질문했다. 30년도 넘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도록 요청했는데도 70퍼센트가 그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냈다. 게다가 몇 명은 이례적으로 대단히 자세하게 기억했다.
80년이 흐른 뒤 사회심리학자 로저 브라운과 제임스 컬릭은 충격적이거나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선명하고 상세한 기억의 특성을 기술하기위해 ‘섬광기억 閃光記憶 flashbulb memories‘ 이라는 표현을 만들었다. 사진 촬영과 비슷하게 들리는 이 용어에는 충격적이고 감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둘러싼 상세한 일들은 사건이 발생되는 순간 기억에 각인된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사건은 어떤 장면이 필름에 찍히듯 뇌에 각인된다. 브라운과 컬릭에 따르면 섬광기억은 ‘플래시가 터질 때 현장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보존하는 사진‘과 매우 흡사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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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가가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갔다더냐? 남한산성이라 하더냐?
- 모르옵니다. 묻지 않았소이다.
미숫가루 냄새를 맡고 개들이 다가와 댓돌 아래 엎드렸다.
사공이 돌을 던져 개들을 쫓았다.
-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향해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음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현은 허리에 찬 환도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김상헌은 울음 대신 물었다.
-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느냐?
-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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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일상의 착각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세상에는 아주 단단한 것이 세 가지 있다.
강철, 다이아몬드,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약 12년 전, 우리 (크리스와 댄)는 우리가 가르치는 하버드대학 심리학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 실험은 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실험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려 심리학을 가르치는 입문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었다. <뉴스위크>와<뉴요커> 같은 유명 잡지에도 실렸고 ‘NBC 데이트라인‘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과학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도 전시되었다. 그 실험이 이와 같은 커다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못 보고 있는지를 재미있는 방법으로 밝혀냈기 때문이다. - P5

놀랍게도 연구에 참가한 실험대상자 중 약 절반이 고릴라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조건에서 다양한 실험대상자를 대상으로, 여러 나라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실험이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약 50퍼센트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고릴라가 바로 카메라앞까지 걸어와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가슴을 친 다음 멀어져 가는것을 사람들이 왜 못 보는 걸까? 고릴라가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인식의 오류는 기대하지 못한 사물에 대한 주의력 부족의 결과이며 과학적으로는 ‘무주의 맹시無注意 盲示 inattentional blindness‘ 라 부른다. 이 용어는 시각 체계의 손상으로 인한 맹시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이실험에서 사람들이 고릴라를 보지 못한 이유가 눈에 어떤 문제가 있기때문은 아니라는 의미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특정 부분의 모습이나 움직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 사물이 두드러지는데다 중요성을 띄고 있고 시선을 두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날 때조차 그렇다.  - P21

빛이 반사되는 옷을 입은 오토바이 운전자는 눈에 더 잘 띄지만, 이 역시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진 않는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위 실험의 십자가와도 같다.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못 보는 이유는 다른 교통수단들에 비해 작아서도 아니고 덜 독특해서도 아니다. 그 이유는 오토바이가 너무 다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운전자를 더 독특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운전자들이 오토바이 운전자를 잘 알아보게 하기위해 두루 쓸 만한 방법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오토바이를 눈에 더 잘 띄게 하는 효과를 보려면 오토바이를 자동차와 비슷하게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두 개의 헤드라이트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오토바이에 장착하면 오토바이를 감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 P37

왜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자동차 운전자가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를 칠 가능성이 낮을까? 운전자가 보행자와 자전거를 자주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운전자가 차 주변으로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자주 보는 런던 도로를 건너는 게 안전할까. 아니면 운전자가 경고도 없이 자기 차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들을거의 보지 못하는 로스앤젤리스 교외의 넓은 대로가 더 안전할까? 제이콥슨이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보행자가 두 배 많은 마을로 이주한다면 걷는 동안 차에 치일 확률을 3분의 1가량 줄일 수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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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재일동포사건이나 일본 관련 사건에는 증거의 왕 자백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간첩 조작의 만능열쇠가 하나 더 있다. 서울시 공무원간첩 조작 사건에서 논란이 된 ‘영사 증명‘이 바로 그것이다.
영사 증명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이재승 교수가 지적한것처럼 영사 증명은 증명되어야 할 사실을 증명된 것처럼 꾸민 ‘찌라시‘일 뿐이다. 간첩 사건에 제출된 영사 증명은 영사의 업무에 포함되지 않는, 아니 원천적으로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 행위는 접수국의 주권 또는 관할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사가 본국 수사기관의 요청으로 "형사소송의 보조자로, 수사권의 주체로 나서 접수국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영사 증명서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본국 법정에 제출하는 행위는 자신이 국제법상 불법행위를저질렀다고 자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91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마리‘의 간첩이 나오기위해서는 수많은 자들의 팀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단 중앙정보부, 안기부만이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받쳐주고, 검찰이 법률적으로 포장해주고, 판사가 고문당했다는 호소에도 바짓가랑이 들어보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조작의 한 부분을 맡아 팀플레이를 해가며 간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간첩들 중에서 현재의 국가 기밀 개념을 적용한다면 간첩죄로 유죄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첩은 처음에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모르는 놈을 "저 자식 간첩 아냐"라고 손가락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첩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간첩보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 P93

대형 내란 사건이나 공안 사건이 발생할 때의 상황을 보면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을 늘 발견하게된다. 왜 하필 이런 때면 꼭 내란이 일어나거나 공안 사건이터지는 것일까?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에는빨갱이 선동이 필요했고, 1967년 6월 8일에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동백림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공개 등 정치 개입에 대한 반발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때맞춰 터져준 것처럼 내란의유령이 잠에서 깨어날 때는 스멀스멀 나쁜 기운이 한국 사회를 감싸기 마련이었다.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초대형 공안 사건을 터뜨려 각종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다행히 그때만 해도 극우 보수 세력 중에서도 가장 극우라 할수 있는 공안 검사들의 양심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의 맞춤법도 안 맞는 시나리오에 따라 관련자들을 기소하는대신 사표를 던졌다. - P116

유신은 그렇게 왔다. 유신이야말로 형법전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내란이었다. 수많은 함량 미달의 내란 사범을 양산한 박정희가 내란이란 이런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내란죄의 구성요건에서 가장 중요한 국헌문란에 대해 형법 9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박정희가 자기 마음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분리해놓은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로 집중시킨 것이야말로 똑 떨어진 국헌문란 행위였다. 탱크와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 기능을 정지시켰으니 이것이 87조 내란죄에서의 ‘국헌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5.16 군사반란 무렵의 군형법을 보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자" 중에서 "수괴는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무기징역도 없는 사형인 것이다. 유신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내란이었다. 이 내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많은 내란 사범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 P124

1979년의 10•26 사건은 김재규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자행한 유신이라는 내란을 종식시킨 민주혁명이었을까. 아니면 전두한 측의 주장대로 정권을 찬탈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망상을 가진 김재규가 저지른 내란이었을까? 12•12와 5•17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행위를 자연인 박정희에 대한 단순 살인이 아닌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규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강압적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장 이영석은 입이 돌아가는 마음고생을 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쫓겨나는 자리에서 이영석은 회한과 오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퇴임사를 쓰면서 사법부의 한자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부(府)가 아닌 법무부 같은 행정부의 한 부서를 의미하는 부(部)로 표기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5·16군사반란과 유신친위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뿐이다. 5.17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이바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란음모죄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의 전 단계인 모의를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 있다. 즉 내란음모죄로는 사형이 불가능한 것이다.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받은 것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유신 직후 일본에 망명하면서 일본과 미국의 민주인사들을 모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1977년 법원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의간첩 조작 사건에서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판시했고, 이판례를 인용하여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반국가단체의 수괴로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민통에 대한 반국가 단체 판결을 내린 재판부의 한 사람이 박근혜 정권 출범직후까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 P130

김대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내란음모에서 주요 임무 종사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등의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향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바로 김정사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증인으로 활약했던 윤효동이란 자였다. 윤효동이 법정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북 말투로 김대중 등이 얼마나 불온한 자들이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있는지 열변을 토할 때 순발력 좋은 김상현 의원이 이 법정이어느 나라 법정이냐고 크게 외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간첩이 북한식 말투로 민주 인사들을 모함하는 발언을 증언이랍시고 듣는 법정이 대한민국 법정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정인가를 따져 물은 것이다. 쇼맨십 풍부한 문익환 목사는 벌떡 일어나 "내란이다!"라고 소리쳤고, 다른 피고인들도 따라 일어나 윤효동을 향해 "내란이다!" 하고 소리쳤다. 겁먹은 윤효동은 검사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쪽문으로 쫓겨나갔다고 한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슬픈 코미디였다. - P131

도대체 제헌헌법을 누가 만들었기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항, 그 존재만으로 "사회주의 국가에 가까운 성격을 갖게" 하는 이익분배 균점권 조항이 들어간 것일까? 혹시 제헌헌법을 좌파들이 모여 만들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좌파는 5 • 10 선거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고, 중간파도 백범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들었다. 이익분배 균점권을 제헌헌법에 집어넣을 것을 주장한 세력은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대한노총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전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좌파 노동운동 세력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노동 단체의 간판을내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승흠에 따르면 노동자의 이익균점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을 한 정치 지도자는바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자본과 노동이 평균 이익을 누리게 하자는 주장"을 "제헌국회의 헌법심의 중에서. 그것도 이익 균점권 논의에서" 한 것이다. 아무리 이승만이라 한들 국민생활의 균등한 보장을 추구하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없었던 것이다. - P141

제헌헌법 85조는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87조의 중요 산업 국영 · 공영 원칙에 대해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 조항은 소련이나 전시 중화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 헌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정으로 "우리나라 헌법의 진보성을 표현한 규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규정만으로 볼 때에는 우리나라는 국가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채용하였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P144

제헌헌법 86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지주의 토지를 비록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토지가 가장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던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수백 년간 지배층으로 군림해온 지주층에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사 연구가 처음 시작된 1980년대에는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된 이북의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농지만을 대상으로한 남쪽의 농지개혁이 제한된 의미만 갖는다고 저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의 지주가 완전히 소멸했다. 또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엄청난 교육열은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더구나 한국 전쟁의 향배와 관련하여 본다면 농지개혁의 의미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 P147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주 세력의 결집체인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김성수는 그 자신이 당시 조선팔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땅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교주와교수로서 김성수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유진오는 헌법 조항을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를 만나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고 설득했고, 김성수는 유진오의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며 결국 농지개혁에 찬성했다. 알토란 같은 농지를 다 내주어야 한다니 김성수 입장에서 무척이나 속이 쓰렸겠지만, 그는 오늘날의 자칭 ‘애국 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인물이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조선일보>의 방응모가 친일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해방 후 어느 독립투사도 일제가 폐간시켜버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복간되어서는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보험료‘라고 깎아내릴 수도 있겠지만, 만해 한용운 같은 많은 독립지사들이풍족하지는 않아도 끼니를 때울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두 신문의 사주 일가가 김성수나 방응모가 보여주었던 아량과 금도를 반의반만 보여줬어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그렇게 지탄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칭 ‘애국 보수‘들은 자기 조상의 역사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 같은 인간 백정에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이회영 등 6형제, 김성수,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P149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 측 견해에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있다. 첫번째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김일성만 독점적·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과연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 노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 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
더 중요한 문제는 검찰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만이 쓴것처럼 규정하면서 종북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을 종북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된 것으로몰고 가는 행위는 그야말로 우리 헌법의 역사성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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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높았다. - P9

- 청천강을 물었다. 청천강을 내주었는가?
- 아마도 그러할 것이옵니다. 서북의 군사를 안주로 모아깊은 산성에 의지해 있는데, 적병들은 산성을 멀리 비켜서 대로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하옵니다.
- 안주는 금성철벽金城鐵壁에다가 서북의 중진重陣이라더니.......
안주는 북쪽으로 청천강의 사나운 물줄기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험준한 산세가 잇닿은 천험이었다. 서북의 군병들은 안주를 본진으로 삼아 도로와 음성을 비워 놓고 깊은 산성에 둔屯을 치고 기다렸다. 영의정 김류가 진지전의 전략을 냈고,
도원수 김자점이 군사를 배치했다. 그러나 적들이 안주성을멀리 돌아 빠른 기병을 앞세워 들길을 따라 달려온다면, 산성에 들어앉은 군사들은 화살 한 번 쏘지 못하고 이미 휩쓸고지나간 적들이 일으킨 먼지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안주에서 평양까지는 보병 걸음으로 이틀 거리였고, 평양에서 개성까지는 큰길 가까이 배치한 군사가 없었다. 청천강을 내주고서 대동강을 지킬 도리는 없었다.
임금이 물었다. 길을 묻는 과객의 어조였다.
- 청천강 다음이 대동강이지?
김류가 대답했다.
- 전하, 적이 다시 대동강을 건넌다면 도원수와 평양과 황해의 감사, 병마사 들의 목을 베고 그 처자식들도 군율로 연좌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
천장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임금은 말했다.
-그렇겠구나.
- ••••••.
- 그렇겠어. 그러하되 적병이 이미 도성을 에워싸서 왕명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서북 산성에 군율이 닿겠느냐. - P12

김상헌의 형 김상용은 일흔다섯 살이었다. 우의정 벼슬을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때 임금은 붙잡지 못했다. 적이 다가오고 대궐이 술렁거리자 김상용은 보료에서 일어섰다. 김상용은 소임이 없는 신민으로서 어가를 따라나섰다. 강화도로 가는 눈길 위에서 쓴 편지를 노복을 부려서 동생에게 전했다.
급히 휘갈겨 쓴 편지였다.
•••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그리 알면 스스로 몸 둘 곳 또한 알 것이다……
양천, 행주, 김포의 눈 쌓인 벌판 위로 바싹 쫓기는 가마의 대열이 흘러가고, 그 뒤를 지팡이를 짚고 따라가는 늙은 형의뒷모습이 김상헌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 너는 어찌하려느냐? 나를 따르겠느냐?
- 소인은 큰댁 대감께 매인 몸인지라••••••.
노복은 돌아갔다. 김상헌은 돌아가는 노복에게 곶감 한 접을 내주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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