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현실은 깊고 쓸쓸한 밤, 그리고 영원히 날이 밝지않을 것 같은 칠흑 같은 암흑일 뿐이다. 꿈을 통해 칙칙한 밤을 잊으려고 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과거의 낮뿐 아니라 내일의 낮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현재의 밤을 제대로 응시할 용기가 이미 이 네 사람에게서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모든 가족은 마침내 ‘밤으로의 긴 여로‘에 합류하게 된다. 꿈이 꿈을 증폭시키고, 밤이 밤을 더 키우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들 가족에게 더 이상 환한 낮은 오지 않고 밤만 깊어질 것 같다는 느낌,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더 비극적인것은 이 음울한 가족 이야기가 유진 오닐 본인의 내밀한 가족사를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옳다면, 유진 오닐의 작품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절절한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 P224

<노르웨이의 숲>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방황하는 두 남녀를 통해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나가는 젊은이들의 성장통을 다룬 소설이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는 도피의 세계를 찾는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 P245

어쩌면 노인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과거 젊었을 때,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영광이었으니까 말이다. 노인이 바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찬탄이 아니라, 오직 한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지했던 소년의 찬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노인이 원했던 것은 이미 노인이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빛나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자신과 함께 배를 타겠다는 소년의 말만으로 우리 늙은 어부는 충분히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아련하게 한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노인을 다시 떠날 것이다. 지금 소년은 어느 늙은 어부의 마지막 영광을 보고 있는 셈이니까. - P264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영광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은 치욕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안도하는 것이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광의 정점에서 허무하게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때문이다. 사실 권력과 자본은 유년시절부터 몸서리쳐지는 치욕의 경험을 선사해서 우리에게 치욕을 겪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 P266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식힐 수 있다. 아니,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그제야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나랑 함께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 P272

발렌틴은 이성주의자답게 사랑마저도 자신의 이성과 생각대로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감성이나 행동을 부정한 채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몰리나가 이별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만일 발렌틴이 더 민감했었다면, 자신도 몰리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키스를 소원했던 몰리나, 거미여인 몰리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어쩌면 발렌틴은 몰리나에게서 만날 수 없는 애인 마르타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사랑했는지도, 혹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했고 발렌틴도 몰리나를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느낌, 그 행복의 느낌을 두 사람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생각이나 말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행동 속에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두 사람은 지금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발렌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생길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제 외롭게 감방에 남아 있던 발렌틴에게는 정부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가해졌다. 발렌틴이 약물에 취해 있을 때 마르타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몰리나의 강한 흔적을 느끼게 된다.
몰리나랑 있을 때 마르타를 떠올렸건만, 발렌틴은 지금 마르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몰리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 P2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런던의 녀석들은 머리가 돌아 버린 게 분명해. 나는 녀석들한테 말했어. 리즈를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내가 영국을 떠난 순간부터 아니, 훨씬 전,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뒤처리를 한 게 분명해. 빚을 갚아주고, 식료품 가게 주인과 합의하고, 집주인한테 밀린 방세를 치르고, 무엇보다도 리즈 문제를 해결했어. 그건미친 짓이고, 생각도 못한 짓이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랬을까? 피들러를 죽이려고? 자기네 첩보원을 죽이려고? 자신들의 공작을 방해하려고? 스마일리 개인의 생각이었을까? 스마일리가 알량한 양심 때문에 저지른 짓일까? 이렇게 된이상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리즈와 피들러를 이 사건에서 떼어 놓고 나 혼자 책임을 지는 거지. 어쨌든 나는 정보부에서 쫓겨난 몸이 아닌가. 피들러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리즈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어.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냈지? 그날 오후스마일리의 집에 갈 때 절대로 미행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는데, 그리고 돈 - 내가 본부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를 놈들은 어디서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건 오로지 내부용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는데.. 그런데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당혹감과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혀 교수대로 다가가는 사형수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 P282

어쨌든 그들이 이 공작을 생각해 냈소. 한 사람이 미끼가되어서 제 발로 덫에 걸려들자. 관리관은 그렇게 말했소. 덫에걸린 시늉을 하면서 상대가 미끼를 무는지 보자고 그후우리는 철저히 계획을 세웠소. 이른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방법이었지요. 스마일리는 그걸 <귀납법>이라고 불렀소. 만약 문트가 우리 공작원이라면 우리는 문트에게 어떻게 공작금을 지불했을까. 파일은 어떻게 보일까 등등. 피터는 1, 2년전에 어떤 아랍인이 동독 보위부의 내부 조직을 우리한테 팔려고 했지만 우리가 단호히 거절한 일을 기억해 냈소. 나중에 우리는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피터는 그 실수를 역이용하자고 제안했소.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랍인의 제의를 거절한 척하자고. 그건 아주 절묘한 착상이었소.
그다음은 짐작할 수 있을 거요. 나는 엉망으로 무너지는체했소. 술에 절고 빚을 지고, 공금을 횡령하고••••• 모두 앞뒤가 맞아떨어졌소.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경리과의 엘시가맡았고, 그 밖에도 한두 명이 거들었소. 그들은 그 일을 아주잘해 냈지요.」 리머스는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 P286

그는 불빛을 손으로 막으며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금속 쐐기를 다시 내려가 리즈옆에 섰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검은 머리는 비를 막아주려는 듯 뺨을 덮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를,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 P3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피들러가 생각에 잠긴 어조로말했다.
「문트가 나 자신 때문에, 나에 대한 증오나 질투 때문에 나를 괴롭혔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어쨌든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걸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랫동안 그 고통을 당하면서 줄곧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죽거나 까무러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건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런데 고통의 강도는 바이올린 주자가 E현에 도달하듯 계속 올라갑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올라갑니다. 고통은 그런 거예요. 올라가고 또 올라가지요. 자연이 하는 일이라고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한테 듣기를 가르치듯 이 소리에서 저 소리로 한 단계씩 당신을 끌어올리는 것뿐입니다.  - P2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한눈팔지 않고 좋은 가치들을 성실히 추구하려 해도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순간이 다 강렬하고 충만하지는 않다.
오히려 봉우리가 높아지는 만큼 골짜기도 깊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봉우리가 아닌 시간들에 좀더 애정을 갖고, 그 순간들의 품질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고도는 가장 우뚝 솟은봉우리의 높이로 정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평가할 때 그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좋은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영광의 순간이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도 거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짜릿하고 즐거운 시간도 지나간다. 결국에는 인생의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 평범하고 시시한 시간들의 온도를 어떻게 하면 조금씩 높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심리학자들과 뇌 과학자들의 조언이 참고가 됐다. 인간의 마음은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고 노래를 부르면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며, 허리를펴고 성큼성큼 걸으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고. 올해 나는 그런 습관을 들여보기로 했다. 새해 첫날에는 평소 좋아하던 팝송의 가사를 외웠다. 심심할 때 부르기 위해서다. 재미있었다. 어릴적에는 가사를 암기하는 곡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않다는 걸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 P262

‘왜 사는가‘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은 이렇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 이 분 전에 죽는 것이 싫어서 자살하지앉았고 일 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 일 분 일 분이쌓여 내 삶이 됐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라는 문장에서 뒷부분에 신경을 쓰면 자기 삶이 시시하게 보인다. 앞부분에 집중해야 인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된다. 곰이며 호랑이며 구미호가 이상한 음식들을 참고 먹으며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인간의 삶. 난 그걸 공짜로 받았다. 이리저리 투덜대기도 하지만 일 분 전에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을 선택했고, 지금도 그렇다. 삶의 목적은 모른다. 그래도 수억 번, 수조 번 삶을 결단했다. - P265

세상살이와 연결 지어봐도 그렇다. 어떤 개성은 그저 당사자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평생 흠결이라 여겼던 특질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떠받치고 들어올리는 지지대이자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금 내가 파악하는 나의 모습은 심리적, 서사적총체와는 거리가 먼 찰나의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술을 마시거나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를 곱씹는 게 해결책일리 없다. 알코올이나 애착 이론은 즉각적이고 달콤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피임을 뇌가 금방 알아차린다. 게다가 둘 다 뒷맛이안 좋다. 퍼마실수록.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실제적인 과제를 주는게 의외로 유용하다. 청소나 운동 같은 귀찮고 힘들다는 게 핵심이다. 조금만 참으면 ‘고난에 맞서 싸우는 나‘라는 자기 서사를 마음이 이내 지어낸다.
어쩌면 자기혐오 그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선이요 불순물 없는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긍정의 화신들을 TV나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 그늘 없는 얼굴을보고 있노라면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이 든다. 그럴 때면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는 대가로 자기혐오라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 P275

"인문학은 ‘분별력‘이라는 가치를 만듭니다. 그게 인문학의 쓸모입니다." 상상속에서 혼자 열변을 토했다. "분별력은 현대사회가 값을 잘 쳐주지는 않지만, 대단히 귀중한 자원입니다."
사실 이 자원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어서 가치가 오르는 중이다. 부분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의식이나 종교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큰 어른 역할을 할 지도자도 딱히 안 보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뿐 아니라 사리 분별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다. 삶의 방향과 의미를 일러주는 타인은 스승이 아니라 내 지갑을노리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기 착취 사회를 살고 있기에 분별력이 더 절실해졌다고도 본다. 이 시스템에서 개인의 가장 큰 적은 종종 그 자신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자기 착취라는 말은 노동 관련용어였다. 자영업자의 과로, 자기 계발에 대한 강박, 혹은 ‘열정페이‘ 같은 이슈를 다룰 때 쓰는 이제 바야흐로 기행으로도 돈을 버는 관심경제 attention economy 세상이 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뿐 아니라 존엄성까지도 쥐어짜낸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네 느낌을 믿어봐‘ 같은 대사가 자주 나온다. 한국사회에 여전히 남은 억압적인 분위기에 분개하는 이들은 욕망을 긍정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느낌과 욕망이 그리 현명한, 혹은 따뜻한 선장이던가. 오히려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폭군 아니던가. 느낌과 욕망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 아마추어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련다. 내가 착취당하는지 아닌지 점검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노동력을 넘어, 존엄성의 차원에서는 더 그렇다. 수치심 같은 느낌이 도움이 될 테지만, 더 필요한 능력은 역시분별력이라고 본다. - P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리머스는 그녀의 침대,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침대에 누워 있고, 리즈는 그 옆에 걸터앉아 그에게 입을맞추거나, 얼굴을 맞댄 채 가스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면 리머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즈는 희미한 수평선에 눈길을 주듯 마음이잠깐씩 리머스를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그의 말투며 몸짓,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 아니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떠오르곤 했다. 끔찍한 것은, 그녀의 생각이 거기에 머문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려고 해도 기억할 난한 추억의 재료가 없었다. - P142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는 그것이 궁금했다. 거기에 대해 관리관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수법에 대해서만 말해 주었을 뿐이다.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선뜻 내놓지 말게. 그들이 정보를얻어 내려고 애쓰게 만들어야 돼. 세부적인 사항으로 그들을혼란시키고, 중요한 사실을 생략하고, 자네가 늘 다니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게. 퉁명스럽게 굴고, 고집을 부리고, 까다롭게 굴게. 고래처럼 술을 퍼마시게. 이데올로기에서 양보하지 말게. 그들은 그걸 믿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자네를 매수한 사람으로 다루고 싶어 해. 그들은 정반대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하기를 원해. 그들이 원하는 건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향자가 아닐세. 무엇보다도 그들은 <추론》하기를 원해.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네. 오래전에 준비해 두었지. 하찮은 일들, 까다로운 단서들. 자네가 보물찾기의 마지막 단계야.> - P153

그때 그들 ㅡ 리머스, 관리관, 피터 길럼 ㅡ 은 서리 주에있는 관리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관리관은 그 황량하고 작은 <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아름다운 조각이새겨지고 상판이 놋쇠로 된 인도산 탁자들에 둘러싸인 채 구슬같이 생긴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피들러는 고위 사제를 모시는 종자(從者) 같은,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사제의 등에다 비수를 꽂을 수도 있는 그런 자라네. 문트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 길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들러는 문트를 몹시 미워해. 피들러는 물론 유대인이고, 문트는 완전히 정반대야.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지. 피들러한테 무기를, 문트를 파멸시킬 무기를 주는 게 우리의 임무일세. 그는 길럼과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리머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기를 사용하도록 피들러를 부추기는 것은 자네 임무가 될 걸세, 리머스, 물론 간접적으로 자네가 그를 만나는일은 없을 걸세.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네.
그때 그들은 모두 함께 웃었다. 길럼도 웃었다. 그때는 멋진 농담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관리관의 기준으로 보면 유쾌한 농담임에 틀림없었다. - P159

사내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사냥 오두막 같았는데, 반쯤은 낡았고 반쯤은 새로 꾸며져있었다. 머리 위에 희미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어서어두컴컴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문을 연 것 같았다. 구석구석에 관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의 주의서, 관청 특유의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문, 용수철 카트리지 방식의 든든한 자물쇠. 아주 안락하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짙은 색의 묵직한, 그러나 심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가구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러한 비밀성의 결여야말로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동독 정보부의 관료주의라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그는 영국 정보부에서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 P161

남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은 명백한 심리적 위험에 노출된다. 남을 속이는 행동 자체는 특별히 힘들지 않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이고, 직업적인 전문 기술의 문제다. 대다수사람은 쉽게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기꾼이나 연극배우나 도박사는 무대에서 내려와 그의 재주에 탄복하는관객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비밀 첩보원은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도 먼저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다. 그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그는 가장 자연스러운 충동과 맞서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큰돈을 벌었다 해도, 자신이맡은 역할 때문에 면도칼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할 수 있다. 아무리 박식하다 해도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진부한 말만중얼거려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고 아버지라면 가족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한테 털어놓는 것을 삼가야 한다.
자신의 속임수 속에 영원히 고립된 사람은 압도적인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알고 있는 리머스는 최선의 방어책에 의존했다. 혼자 있을 때라도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고 자신이 채택한 성격이나 인격을 가진 인물로 살도록 자신에게강요한 것이다. 발자크‘는 임종할 때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안부를 염려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지 않은 리머스도 자신이 창조한 인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가 피들러에게 보여 준 성격,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불안, 부끄러움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오만함은 그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격을 연장한 것이었다. 발을 조금 질질 끌면서 걷는걸음걸이,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점, 음식에 대한 무관심, 술과 담배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을 때도그는 이런 습관에 충실했다. 런던 본부가 저지른 잘못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런 습관을 더욱 과장하기까지 했다. - P188

나는 문트한테 이유를 물었고, 부탁도 했습니다. 왜 그들을 체포하지 않느냐? 왜 내가 심문할 시간을 한두 달이라도 주지 않느냐? 그들이 죽어 버리면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러자 문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엉겅퀴는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문트가 미리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문트는 훌륭한 첩보원입니다. 아주훌륭하죠. 당신도 알다시피 문트는 우리 보위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이론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밤늦게 문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요. 문트는 커피를 마십니다. 다른 건 절대 안 마시고 항상 커피만 마시죠.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은 너무 내성적이어서 훌륭한 첩보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방첩 활동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난답니다. 방첩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를 씹고 있는 늑대 같다고, 그들이 새로운 사냥감을 찾게 하려면 그 뼈다귀를 빼앗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압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문트는 지나쳤어요. 문트는 왜 피어레크를 죽였을까요? 왜 피어레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갔을까요? 피어레크는 신선한먹이였는데, 우리는 아직 뼈에서 고기를 발라 내지도 않은 상태였어요.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