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지 않고 좋은 가치들을 성실히 추구하려 해도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순간이 다 강렬하고 충만하지는 않다. 오히려 봉우리가 높아지는 만큼 골짜기도 깊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봉우리가 아닌 시간들에 좀더 애정을 갖고, 그 순간들의 품질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고도는 가장 우뚝 솟은봉우리의 높이로 정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평가할 때 그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좋은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영광의 순간이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도 거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짜릿하고 즐거운 시간도 지나간다. 결국에는 인생의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 평범하고 시시한 시간들의 온도를 어떻게 하면 조금씩 높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심리학자들과 뇌 과학자들의 조언이 참고가 됐다. 인간의 마음은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고 노래를 부르면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며, 허리를펴고 성큼성큼 걸으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고. 올해 나는 그런 습관을 들여보기로 했다. 새해 첫날에는 평소 좋아하던 팝송의 가사를 외웠다. 심심할 때 부르기 위해서다. 재미있었다. 어릴적에는 가사를 암기하는 곡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않다는 걸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 P262
‘왜 사는가‘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은 이렇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 이 분 전에 죽는 것이 싫어서 자살하지앉았고 일 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 일 분 일 분이쌓여 내 삶이 됐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라는 문장에서 뒷부분에 신경을 쓰면 자기 삶이 시시하게 보인다. 앞부분에 집중해야 인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된다. 곰이며 호랑이며 구미호가 이상한 음식들을 참고 먹으며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인간의 삶. 난 그걸 공짜로 받았다. 이리저리 투덜대기도 하지만 일 분 전에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을 선택했고, 지금도 그렇다. 삶의 목적은 모른다. 그래도 수억 번, 수조 번 삶을 결단했다. - P265
세상살이와 연결 지어봐도 그렇다. 어떤 개성은 그저 당사자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평생 흠결이라 여겼던 특질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떠받치고 들어올리는 지지대이자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금 내가 파악하는 나의 모습은 심리적, 서사적총체와는 거리가 먼 찰나의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술을 마시거나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를 곱씹는 게 해결책일리 없다. 알코올이나 애착 이론은 즉각적이고 달콤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피임을 뇌가 금방 알아차린다. 게다가 둘 다 뒷맛이안 좋다. 퍼마실수록.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실제적인 과제를 주는게 의외로 유용하다. 청소나 운동 같은 귀찮고 힘들다는 게 핵심이다. 조금만 참으면 ‘고난에 맞서 싸우는 나‘라는 자기 서사를 마음이 이내 지어낸다. 어쩌면 자기혐오 그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선이요 불순물 없는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긍정의 화신들을 TV나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 그늘 없는 얼굴을보고 있노라면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이 든다. 그럴 때면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는 대가로 자기혐오라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 P275
"인문학은 ‘분별력‘이라는 가치를 만듭니다. 그게 인문학의 쓸모입니다." 상상속에서 혼자 열변을 토했다. "분별력은 현대사회가 값을 잘 쳐주지는 않지만, 대단히 귀중한 자원입니다." 사실 이 자원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어서 가치가 오르는 중이다. 부분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의식이나 종교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큰 어른 역할을 할 지도자도 딱히 안 보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뿐 아니라 사리 분별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다. 삶의 방향과 의미를 일러주는 타인은 스승이 아니라 내 지갑을노리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기 착취 사회를 살고 있기에 분별력이 더 절실해졌다고도 본다. 이 시스템에서 개인의 가장 큰 적은 종종 그 자신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자기 착취라는 말은 노동 관련용어였다. 자영업자의 과로, 자기 계발에 대한 강박, 혹은 ‘열정페이‘ 같은 이슈를 다룰 때 쓰는 이제 바야흐로 기행으로도 돈을 버는 관심경제 attention economy 세상이 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뿐 아니라 존엄성까지도 쥐어짜낸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네 느낌을 믿어봐‘ 같은 대사가 자주 나온다. 한국사회에 여전히 남은 억압적인 분위기에 분개하는 이들은 욕망을 긍정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느낌과 욕망이 그리 현명한, 혹은 따뜻한 선장이던가. 오히려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폭군 아니던가. 느낌과 욕망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 아마추어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련다. 내가 착취당하는지 아닌지 점검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노동력을 넘어, 존엄성의 차원에서는 더 그렇다. 수치심 같은 느낌이 도움이 될 테지만, 더 필요한 능력은 역시분별력이라고 본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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