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현실은 깊고 쓸쓸한 밤, 그리고 영원히 날이 밝지않을 것 같은 칠흑 같은 암흑일 뿐이다. 꿈을 통해 칙칙한 밤을 잊으려고 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과거의 낮뿐 아니라 내일의 낮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현재의 밤을 제대로 응시할 용기가 이미 이 네 사람에게서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모든 가족은 마침내 ‘밤으로의 긴 여로‘에 합류하게 된다. 꿈이 꿈을 증폭시키고, 밤이 밤을 더 키우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들 가족에게 더 이상 환한 낮은 오지 않고 밤만 깊어질 것 같다는 느낌,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더 비극적인것은 이 음울한 가족 이야기가 유진 오닐 본인의 내밀한 가족사를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옳다면, 유진 오닐의 작품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절절한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 P224
<노르웨이의 숲>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방황하는 두 남녀를 통해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나가는 젊은이들의 성장통을 다룬 소설이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는 도피의 세계를 찾는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 P245
어쩌면 노인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과거 젊었을 때,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영광이었으니까 말이다. 노인이 바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찬탄이 아니라, 오직 한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지했던 소년의 찬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노인이 원했던 것은 이미 노인이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빛나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자신과 함께 배를 타겠다는 소년의 말만으로 우리 늙은 어부는 충분히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아련하게 한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노인을 다시 떠날 것이다. 지금 소년은 어느 늙은 어부의 마지막 영광을 보고 있는 셈이니까. - P264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영광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은 치욕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안도하는 것이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광의 정점에서 허무하게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때문이다. 사실 권력과 자본은 유년시절부터 몸서리쳐지는 치욕의 경험을 선사해서 우리에게 치욕을 겪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 P266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식힐 수 있다. 아니,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그제야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나랑 함께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 P272
발렌틴은 이성주의자답게 사랑마저도 자신의 이성과 생각대로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감성이나 행동을 부정한 채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몰리나가 이별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만일 발렌틴이 더 민감했었다면, 자신도 몰리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키스를 소원했던 몰리나, 거미여인 몰리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어쩌면 발렌틴은 몰리나에게서 만날 수 없는 애인 마르타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사랑했는지도, 혹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했고 발렌틴도 몰리나를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느낌, 그 행복의 느낌을 두 사람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생각이나 말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행동 속에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두 사람은 지금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발렌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생길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제 외롭게 감방에 남아 있던 발렌틴에게는 정부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가해졌다. 발렌틴이 약물에 취해 있을 때 마르타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몰리나의 강한 흔적을 느끼게 된다. 몰리나랑 있을 때 마르타를 떠올렸건만, 발렌틴은 지금 마르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몰리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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