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머스는 그녀의 침대,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침대에 누워 있고, 리즈는 그 옆에 걸터앉아 그에게 입을맞추거나, 얼굴을 맞댄 채 가스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면 리머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즈는 희미한 수평선에 눈길을 주듯 마음이잠깐씩 리머스를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그의 말투며 몸짓,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 아니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떠오르곤 했다. 끔찍한 것은, 그녀의 생각이 거기에 머문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려고 해도 기억할 난한 추억의 재료가 없었다. - P142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는 그것이 궁금했다. 거기에 대해 관리관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수법에 대해서만 말해 주었을 뿐이다.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선뜻 내놓지 말게. 그들이 정보를얻어 내려고 애쓰게 만들어야 돼. 세부적인 사항으로 그들을혼란시키고, 중요한 사실을 생략하고, 자네가 늘 다니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게. 퉁명스럽게 굴고, 고집을 부리고, 까다롭게 굴게. 고래처럼 술을 퍼마시게. 이데올로기에서 양보하지 말게. 그들은 그걸 믿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자네를 매수한 사람으로 다루고 싶어 해. 그들은 정반대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하기를 원해. 그들이 원하는 건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향자가 아닐세. 무엇보다도 그들은 <추론》하기를 원해.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네. 오래전에 준비해 두었지. 하찮은 일들, 까다로운 단서들. 자네가 보물찾기의 마지막 단계야.> - P153
그때 그들 ㅡ 리머스, 관리관, 피터 길럼 ㅡ 은 서리 주에있는 관리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관리관은 그 황량하고 작은 <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아름다운 조각이새겨지고 상판이 놋쇠로 된 인도산 탁자들에 둘러싸인 채 구슬같이 생긴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피들러는 고위 사제를 모시는 종자(從者) 같은,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사제의 등에다 비수를 꽂을 수도 있는 그런 자라네. 문트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 길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들러는 문트를 몹시 미워해. 피들러는 물론 유대인이고, 문트는 완전히 정반대야.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지. 피들러한테 무기를, 문트를 파멸시킬 무기를 주는 게 우리의 임무일세. 그는 길럼과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리머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기를 사용하도록 피들러를 부추기는 것은 자네 임무가 될 걸세, 리머스, 물론 간접적으로 자네가 그를 만나는일은 없을 걸세.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네. 그때 그들은 모두 함께 웃었다. 길럼도 웃었다. 그때는 멋진 농담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관리관의 기준으로 보면 유쾌한 농담임에 틀림없었다. - P159
사내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사냥 오두막 같았는데, 반쯤은 낡았고 반쯤은 새로 꾸며져있었다. 머리 위에 희미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어서어두컴컴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문을 연 것 같았다. 구석구석에 관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의 주의서, 관청 특유의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문, 용수철 카트리지 방식의 든든한 자물쇠. 아주 안락하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짙은 색의 묵직한, 그러나 심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가구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러한 비밀성의 결여야말로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동독 정보부의 관료주의라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그는 영국 정보부에서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 P161
남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은 명백한 심리적 위험에 노출된다. 남을 속이는 행동 자체는 특별히 힘들지 않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이고, 직업적인 전문 기술의 문제다. 대다수사람은 쉽게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기꾼이나 연극배우나 도박사는 무대에서 내려와 그의 재주에 탄복하는관객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비밀 첩보원은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도 먼저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다. 그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그는 가장 자연스러운 충동과 맞서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큰돈을 벌었다 해도, 자신이맡은 역할 때문에 면도칼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할 수 있다. 아무리 박식하다 해도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진부한 말만중얼거려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고 아버지라면 가족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한테 털어놓는 것을 삼가야 한다. 자신의 속임수 속에 영원히 고립된 사람은 압도적인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알고 있는 리머스는 최선의 방어책에 의존했다. 혼자 있을 때라도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고 자신이 채택한 성격이나 인격을 가진 인물로 살도록 자신에게강요한 것이다. 발자크‘는 임종할 때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안부를 염려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지 않은 리머스도 자신이 창조한 인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가 피들러에게 보여 준 성격,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불안, 부끄러움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오만함은 그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격을 연장한 것이었다. 발을 조금 질질 끌면서 걷는걸음걸이,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점, 음식에 대한 무관심, 술과 담배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을 때도그는 이런 습관에 충실했다. 런던 본부가 저지른 잘못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런 습관을 더욱 과장하기까지 했다. - P188
나는 문트한테 이유를 물었고, 부탁도 했습니다. 왜 그들을 체포하지 않느냐? 왜 내가 심문할 시간을 한두 달이라도 주지 않느냐? 그들이 죽어 버리면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러자 문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엉겅퀴는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문트가 미리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문트는 훌륭한 첩보원입니다. 아주훌륭하죠. 당신도 알다시피 문트는 우리 보위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이론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밤늦게 문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요. 문트는 커피를 마십니다. 다른 건 절대 안 마시고 항상 커피만 마시죠.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은 너무 내성적이어서 훌륭한 첩보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방첩 활동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난답니다. 방첩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를 씹고 있는 늑대 같다고, 그들이 새로운 사냥감을 찾게 하려면 그 뼈다귀를 빼앗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압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문트는 지나쳤어요. 문트는 왜 피어레크를 죽였을까요? 왜 피어레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갔을까요? 피어레크는 신선한먹이였는데, 우리는 아직 뼈에서 고기를 발라 내지도 않은 상태였어요.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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