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마지막 순간에 제일 화려하게 피어요. 그리고 이삼일 정도 지나서 바람 불고 비 오면 떨어지죠. 어르신들이 많은 강연에서 제가 끝날 때쯤 가끔 이런 말을 해요. 자기를 벚꽃 다 떨어진 나무라고 생각하고 다니시지 말라고, 지금이 벚꽃 마지막 단계라고 숨넘어가고 죽어갈 때 그때 꽃이 지는 거라고, 60~70 먹었다고 해서 꽃잎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지금이 가장 예쁠 때라고 그렇게 말해요. 소비를 많이 안 하니까 자본주의체제에서 이미 죽은 것처럼 취급받는 것뿐이라고요. 당연하죠. 떨어지기 직전의 벚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나요. 바람에도 비에도 애닯게 꽃잎이 흔들리니, 그만큼 이제 타자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기만 해요. 자신의 고통과 쾌락에만 매몰되는 이기적 개인이 더 이상은 아니죠. 이제 성숙한 거예요. 타자의 고통에도 민감할 수 있으니까요. 곧 지려는 찬란한 벚꽃, 미세한 바람에도 떨리는 벚꽃이 노쇠함과 죽음이 아니라 성숙함과 삶을 살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예요. - P72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오감을 통해서 만나는 거예요. 오감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현실이 아니에요.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감각이 촉감이에요.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들어 누우면, 옆에 다가가서 얼굴도 만져보고 손도 잡아보는 거잖아요. 애완견 동영상 찍어놓고 재생해서 쳐다보는 게 행복인가요? 봐요. 코로나 상황에서 카카오나 네이버가 포스트 코로나,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는 것은 자기네 시장에 들어와서 자기네 콘텐츠를 구입하라는 얘기인 거예요. 사람들이 거기에 휘둘리고 따라가고 있는 거죠. 권력에 대해서, 자본주의체제에 대해서 문제를 삼아야 되고, 경고를 해야 할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예요. - P84

서구권이 개인주의 문화가 강하다고 보는 것은 동아시아의 피상적인 시각이에요.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지역성도 강해요. 그래서 지역을 기반으로 프로축구 리그가 발달한 거예요.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굉장히 지역성이 강해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는 자본주의로 인해서 발달하게 된 거예요. 자본주의가 쾌락과 불쾌, 혹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기계적인 개인을양산했어요. 아직도 공동체와 지역성에 사로잡혀 있던 동아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서구인들의 개인주의가 부각되었던 거예요. 그러나그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니, 동아시아 사람들이 본 것은 사실 서구에서 발달한 자본주의라는 생경한 체제였던 거죠. - P87

 그런 전통적 의미의 노동자들은 그대로 있는데,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에 들어오기 힘든 이런 노동들은 점점 우리 눈에 띄지 않아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자본은 더 노동을 착취하고, 그 결과가 잔혹한 산업재해 사고죠. 스마트폰이라는 단말기가 묘수예요. 생산 현장이나 노동 현장을 증발시키고 소비 현장만을 부각시킬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스마트폰은 우리 몸에 이식된 체제의 칩chip과도 같아요. 이 칩을 거치지 않고는 세계와 접속할 수 없게 된 거예요. 결국 국가나 자본이 검열한 정보는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죠. 이처럼 스마트폰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우리에게 안겨주기보다는 체제가 보았으면 하는 검열된 세상만을 보여줘요.
무서운 일이죠. - P93

이기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적교환이라면, 이타적 개인 혹은 사랑에 빠진 개인이 타인의 행복을위해 교환하는 것이 사랑의 교환이자 공동체적 교환이에요.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공동체가 거래 관계가 되어버리면 교환이 동등하지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 살 때보다 같이 살 때가 힘들고 이득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같이 살 필요가 없는 거죠. 아이가 생기면 생활이 더 힘들어지는데 아이를 낳을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자본주의가 가족공동체와 지역공동체를 와해시킨 거예요. 가족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만들어버리니까 공동체를 유지하지못하는 거죠.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면 나한테 한 사람이 더해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게 되잖아요. 이것을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취업도 힘든 요새 젊은이들은 결혼도 피하고, 결혼을 했어도 출산을 피하는 거예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길러졌기 때문이죠.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일수록 사회가 고령화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자신만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개인이 어떻게 가족이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겠어요. 우울하고 슬픈 일이죠.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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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책 중에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가 그거예요. 손을 떼는 것이 힘든 이유는 절벽이라고 생각해서예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거예요. 그런데 손을 떼라는 이유는 그것만 잡고 살면 안 되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고, 이것도 저것도 잡을 수가 있어요. 빈손으로 살자는 것을 불교에서 공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어떤 사유를 비판한다고 해서 사유를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사유든지 간에, 자기가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철학과 종교의 차이가 나오는데, 종교는 끝까지 믿음을 가져가는 것이고, 철학은 일정 부분그 철학자와 같이 가다가 작별해야 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동반자인 거죠. 저도 대중들한테 당하거든요.(웃음) 자기가 성장한 만큼 관심이 바뀌면 다른 철학자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해요. 영원을 맹세하면 안 돼요. - P49

 평론가의 자리는 객관적인 자리예요. 객관이라는 말의 한자가 재밌잖아요. ‘손님의 시선‘, 제3자의 시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요. 내가 주인이고 상대가 객이잖아요. 객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안 돼요. 그러면 나와 무관한 평론이 되잖아요. 오히려 나를 볼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상을 볼 때는 주관적인 시선이 필요해요. 나인것처럼. 그러면 다르게 보이죠. - P55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뉴스는 더 이상가치 덕목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새롭잖아요.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회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19세기 자본주의적 조건에서는 뉴스가 중요하고 취재가 중요했어요. 지금은 취재를 하나요 SNS나 보도자료 가지고 기사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기사가 제목도 똑같고 내용도 똑같아요.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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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승호
우리 모두 조금만 더 가난해졌으면

이 책의 머리말을 쓰기 위해 2013년에 발간되었던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프롤로그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슬럼프였더군요. 12년을 해온 인터뷰 작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과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읽혔습니다. 인터뷰는 2012년 여름에 이루어졌습니다.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 늦은 시간까지, 또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다섯 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순간이 참 행복했었습니다. 50시간의 인터뷰, 4500매의 녹취를 푸는 과정까지 모두 행복한 시간이었죠. 강신주 선생님은 에필로그 제목으로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라고 답변해주셨지요. 저는 그때 녹취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4500매를 풀어냈는데, 앞으로 뭘 못 하겠나 하면서요. - P5

개인이 시장과 한 몸이 되고, 자본주의에 물든 이 사회에 강신주라는 치료제 혹은 해독제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신주선생님은 "자본주의는 매번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유일한체제"이며, "자본주의의 전대미문성은 거기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고, 그 필수품이 또 필수품을낳고, 그 필수품이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고, 이 새로운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자연과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 P9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 P23

 그러니까 영원한 것이나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나‘라는 사람은 독자적으로 있는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인연因緣‘ 관계로 생겨난 존재예요. 예를 들어 눈사람을 만들려면 눈과 온도와 습도와 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눈사람과 같은 존재인 거예요. 영원불변하지 않아요. 이미 만들어진 눈사람도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곧 사라지죠. 눈사람이 녹는다고 해서 눈사람의 영혼이니 하면서 눈사람의 본질이나 실체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렇게 우리 삶을 왜곡하고, 세상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논의를 불교에서는 희론이라고 해요. 우리의 사유를 희롱해서 삶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논의라는 뜻이죠. 그래서 희론이 적멸寂滅해야 마음이 평안해지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 P26

벤담이 숙고하지 못했던 사랑과 연대의 힘이죠. 우리는 사랑과연대를 위해 자신의 불리함과 고통을 선택하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희론은, 벤담의 희론은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가로막아요. 철학자의 역할은 그 희론을 비판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데 있어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를 보면, 물이 고요할 때가 있고 요동칠 때가 있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다는 거예요. 돌멩이를 던지거나 바람이 불거나 물속에서 기포가 올라오거나, 안에서든 밖에서든 동요가 되면 표면에 물결이 치잖아요. 그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해요. 희론이라는 것은 우리가 명징하게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물결과 같아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학습된 채 벤담적 자아가 된 거예요. 다시 물결을 고요하게 하면 옆에 서 있는 나무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들이 비치잖아요. 희론이 적멸해야 된다는 것이 모든 철학자들의 입장이에요. 있는 그대로 봤을 때 우리가 연대할 수도 있고, 공동체를 꿈꿀 수도 있어요. 살아간다는 것이 인연의 관계를 맺는 것이구나, 누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구나, 내가 누리는 것들이 수많은 노동으로 복잡하게 인연을 맺은 결과물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 P27

그런데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사회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다‘라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부르주아사회가 뭐냐면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고, 귀족사회는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인간의 사회는 모두가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사회고요. 내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인간의 사회예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회‘, ‘사회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써요. 사람들은 쉽게 읽고 지나치는데, 굉장히 강한 뜻인 거예요. 인간의 사회는 특정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스스로를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이고, 사회적 인간이란 지배, 피지배가없는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니까요.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사회‘에 기초하고 있어요. ‘부르주아사회‘라고 말할 때 동시에 우리가 ‘노동자사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요. - P32

벽돌을 올리는 사람의 힘 자체가 얼마나 센 것인지를 알아야해요. 이삿짐 나르는 사람을 돈 주고 부릴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이 없다면 이사를 할 수 있겠어요?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냉장고 하나도 혼자서 못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노동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착취하는 구조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있어야죠. ‘고생하셨어요‘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돼요. 내가 돈을 주고 배달을 시키니까 저 사람들이 월급을 받는 거 아니냐고 하면 답이 없는 거죠. 아무리 돈 가진사람, 땅 가진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고 해도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부정하면 안 돼요. 나한테 돈을 그만큼 준다고 해도 절대로 해내지 못할 일인데, 그분들이 대신해주잖아요. 우리가 수치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자기가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해도 수치스러움을 아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 사회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고요. 그러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사유가 바뀐다는 건 그 사유라는 색안경이 바뀐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다른 사유를 구축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유가 통념적으로 부르주아 체제에서 나오는 담론들, 엘리트적 담론으로 무장되면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로 너무나 당연히 정당화해버려요. 이러면 사회는 변하지 않겠죠.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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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8일 금요일

"아, 여기구나" 에이바가 말했다. "이제 그 멍청이들을 어떻게 찾지?"
숀은 길 건너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영화는 한 시간 반 뒤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극장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해가 진 후라, 보도에 가로등이 줄지어서 있어도 얼굴을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에이바는 웨스트우드가 백인 영역이라고 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거의 다 흑인이었고, 고등학생이 많았다. 레이와 친구들을 찾으려면 더 다가가야 했다.
에이바는 숀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숀은 누나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나이 많은 아이들에게 보이기 싫어 손을 뺐다.
"아 놔, 내가 무슨 아기야."
- P13

"숀!" 에이바가 외쳤다. 하지만 기뻐하는 목소리였다.
그날 밤의 사람들과 요란한 함성. 숀은 이런 것들이 해롭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화재라면, 그들은 불꽃이었다. 그들도 일부였고, 그 불길 속에서 다칠 일은 없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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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종교는 어떻게 진화한 것인가? 윌슨은 종교의 기원을 동물의 행동에서 찾는 적응주의적 설명을 제시한다. 서열이 높은자에게 복종하는 동물들의 의례화된 행동 ritualized behavior 이 인간사회에서는 종교 행동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진화심리학자들은 종교를 그 자체로는 적응적이지 않지만 다른 적응 현상에 연계되어 나타난 부산물로 생각한다. 어두운 숲 속을 걷는데갑자기 등 뒤에서 우지끈 하며 큰소리가 났다고 하자. 그럴 때 지극히 이성적으로 소리의 크기나 속성을 분석한 다음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보다 그런 소리를 듣자마자 무조건 줄행랑을 놓는 사람이 훨씬 더 높은 확률로 살아남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일 그 소리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난 소리라면 사실 도망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만일 호랑이가 나를 덮치려는 소리였다면 그 자리에서 소리 분석이나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짓은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같은 행동 반응을 이성의 범주에 할애하지 않고 본능의 영역에 넘긴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행위자 탐지agent detection‘라고 부른다. - P249

구달 박사의 연구가 전환기를 맞게 된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발견이었을 것이다. 구달 박사는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 공원에 살고 있는 침팬지들이 풀이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개미나 흰개미의 굴속으로 집어넣었다가 살며시 끄집어내어 자기 군락을 지키려고 침입자를 물고 늘어지는 일개미들을 입으로 홀어 먹는 행동을 처음으로 관찰했다. 그때까지 오로지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고 믿고 있던 과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대발견이었다. 신기한 것은 분명히 같은 종에 속해 있는 침팬지들이건만 일본 학자들이 연구해 온 서부아프리카 기니의 보수 지방에 사는 침팬지들은 개미와 흰개미 낚시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평평한 돌 위에 견과를 올려놓고 다른 돌을 망치처럼 사용하여 단단한 껍질을 깨 먹는 행동을 보인다. 아직까지 곰비의 침팬지들 중에서 이런 행동을 보인 개체는 없다. 나는 이담에 내 영장류연구소에 아프리카 동부와 서부 출신의 침팬지 가족들을 모두 데려다 철저하게 격리하여 키우면서 한쪽 사내를 다른 집안으로 장가를 들이는 과정을 통해 이 두 집단에 오랫동안 내려오던 서로 다른 전통문화가 어떻게 새로운 사회에 전파되는지를 관찰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화는 공유되고 학습되고 축적되며 늘 변화하는 속성을 지닌다. - P260

‘다윈의 해‘를 기다려 번역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2009년 10월에야 비로소 우리말로 소개된 그의 저서 『자유는 진화한다 Freedom Evolves에서 대니얼 데닛은 자유 의지는 결코 환상이 아니고 실재하는 객관적 현상이라며 진화 생물학과 신경과학의 최근 발견들을 바탕으로 결정론과 양립 가능함을 보여 준다.
자유의지에 대한 그의 설명을 조금 길지만 여기 인용한다.

자유 의지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으며, 우리가 가고자 하는 거의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대기는 단순한 초기 생명체들의 활동 결과 수억 년에 걸쳐 진화했으며, 그 결과로 가능해진 더 많은 복잡한 수많은 생명체들의 활동에 반응하여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자유 의지라는 대기는 또 다른 종류의 환경이다. 그것은 계획하고 희망하고 약속하고, 비난하고 분개하고 처벌하고 존경하는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감싸고 가능하게 하고 삶을 형성하는 개념적 환경이다. 우리 모두는 이 개념적 대기에서 성장하며, 그것이 제공하는 조건하에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산술처럼 영구적이고 변함없는 안정하고 비역사적인 구성물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상호 작용이 최근에 빚어낸 산물로서 진화했으며, 그것이 이 행성에서 처음 가능하게 한 인간의 활동 중 일부는 그것의 미래 안정성을 파괴하거나 심지어 소멸을 재촉할 수도 있다. 우리 행성의 대기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우리의 자유 의지도 그렇다. - P283

나는 오래전부터 인간 두뇌의 진화 단계에 또 하나의 단계를 첨가하고 그에 대한 지지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인간 두뇌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 생물학자들은 대개 세 단계를 설정한다. ‘생존의 뇌 survivalbrain‘, ‘감정의 뇌 feeling brain‘, ‘생각의 뇌thinking brain‘ 가 그들이다. 동물의 인지에 관한 수많은 관찰 결과들로 인해 생존의 뇌와 감정의 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각의 뇌로도 우리 인간의 뇌를 다른 동물의 뇌와 구별해 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우리 인간의 뇌가 다른 모든동물의 뇌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만이 유일하게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를 지닌 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시를 쓰며 신화를 만들어 내고 심지어는 신을 창조하기도 한다. 설명의 뇌는 앞의 다른 세 종류의 뇌와 달리 행위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기능한다. "세계를 손에 넣은 뒤에 온다"는 말이다. 자유 의지가 데닛의 주장대로 자연 선택의 결과라면 그 결과로 인간의 뇌가 지금처럼 진화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자유 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선택 기계‘의 전 단계인 ‘상황행위 기계 situation-action machine‘는 인간 이전 단계의 수많은 동물들에 이미 존재했지만 고도의 언어 발달이 전제되어야 하는 ‘설명의 뇌는 오로지 인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화할수 있었다. 내가 설정하는 ‘설명의 뇌‘는 바로 자유 의지의 진화로 나타난 결과이다. - P286

결코 과학적 사고는 아니지만 나름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보면 자유의지의 진화에 관한 내 생각은 흥미로운 순환의 고리를 그리며 신학적 결정론을 자극한다. 하느님은 왜 에덴동산의 그많은 나무들 중 하필이면 ‘지혜의 나무‘를 가지고 하와와 아담을 꼬드기셨을까? 그들이 끝내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고 말 것으로 ‘결정‘해 놓으신 상태에서 왜 꼭 그 나무를 선택하신 것일까? 내가 만일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합목적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 중에 우리에게만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허락하신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이렇게 보면 『성경』이먼저 과학을 초대했는지도 모른다. 이쯤 해서 과학과 신학이 비로소 마주 앉으면 어떨까 기대해본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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