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버지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자신이 일몰에 돌아오는 이유를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버지 말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 P94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 P102

대문 옆 담장에 기대어 나는 피식 웃었다. 김장우는, 그 남자는, 왜 자신의 고물차에서 나를 내려놓을 장소가 여기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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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밤은 아름답다. 어제 내린 비로 밤하늘은 모처럼 총총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고 먼 곳에서 흘러오는 라일락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아 이 밤의 그윽함을 더해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평수의 집들. 당연히 마당이라고 해 야손바닥만한 넓이가 고작인 우리 동네 담장에는 이상하게도 라일락 나무가 많다. 볼품없는 맨가지로 서 있을 때는 눈에도 띄지 않다가 늦봄이 되어 레이스 같은 보랏빛 꽃송이들이 매달리기 시작하면 향기와 함께 누추한 골목길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라일락. 그러나 우리 집 마당에는 한 그루도 없는 라일락.
크리스털 화병을 내밀면서 라일락을 말하던 이모 집 정원에도 라일락이 없다. 이모 집만이 아니고 그 동네 담장 위로 확인할 수있는 잘사는 집 정원의 수종(樹種)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라일락이 포함되지 않는다. 라일락은, 그 화사한 자태와 향기와 멋들어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정원에 선택되지 않고 초라한 마당의 한 뼘 땅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나는 봄이 오면 늘 라일락을 주목했다. 내가 나무라면 나는 라일락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우리 집에는 한 그루의 라일락도 없다. - P43

진모가 나 못지않은 아니, 나를 훨씬 능가하는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그 애의 삶에 참견하지 않았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 P51

평상심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생생해진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베개를 밀어붙이고, 어머니는 지금부터 한판 붙어도 끄떡없다는 투다. 이 놀라운 재주, 그것은 마치 태엽이 다 풀려 늘어져 있던 장난감 강아지에게 있는 대로 태엽 밥을 먹인 후의 돌변보다 더 돌연한 것이어서 언제나 나를 기막히게만든다. 지칠 대로 지쳐서 지푸라기처럼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내할 때는 짜증이, 태엽이 감긴 후의 생생한 어머니를 대할 때는 적의가 치솟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대응법 또한 그 못지않게 변환이 신속한 것이긴 하지만. - P61

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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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여러 해 전에 부모님이 나를 보러 뉴욕시로 왔을 때 두 분을 머서호델에 모셔다드렸다. 나로서는 장난기 섞인 선택이었다. 머서는 유명인사들과 멋쟁이들이 묵는 세련된 고급 호텔로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영화관에도 가지 않는 데다 대중음악도 듣지 않는다. <피플>지가 뭐냐고 물어보면 인류학 저널이라고 답했을 분이다. 아버지의 전문 분야는 독특했다. 수학, 정원 가꾸기, 성경이 전부였다.
저녁을 먹으러 호텔로 가서 아버지한테 하루를 어떻게 보내셨느나고 물었다. "좋았지!" 보아하니 로비에서 어떤 남자하고 대화하면서 오후를 보내신 것 같았다. 흔히 있는 하루였다. 아버지는 낯선 사람과 말하기를 즐겼다.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정원 관리에 관해 얘기했지!"
"그 사람 이름은 뭐예요?"
"글쎄, 모르겠네. 그런데 이야기하는 내내 사람들이 다가와서는그 사람 사진을 찍고 종잇조각에 사인을 받아 가더구나."
이 글을 읽는 할리우드 유명 인사 중에 혹시 오래전에 머서호텔에서 턱수염을 기른 영국 남자와 잡담을 나눈 적이 있다면 나에게 연락해주시길 바란다.
다른 분들은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시라. 때때로, 낯선이들이 나누는 최고의 대화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끝나는 대화다. - P20

그로부터 3개월 뒤 그 또한 사망했다.
이 책은 그날 텍사스 촌구석 간선도로 갓길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교통단속이 이상하게 어그러진 사건에 관해 책을 쓰는 이유가뭘까? 이런 일련의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대단히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한쪽은 인종주의에 관한 주장을 펼쳤다. 상공 3천 미터 위에서 사건을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다른 한쪽은 돋보기를 들이대고 사건별로 세부적인 사실을 검토했다. 경찰관은 어떤 사람이었나? 그는 정확히 어떤 말을 했나? 한쪽은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않았다. 다른 한쪽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다. - P27

화자는 종종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반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진짜 의도는 존댓말 사용 안에 새겨져 있었다. 통역에서는 이런 뉘앙스가 사라지고 여러 통역자를 거치면서 왜곡되었기 때문에 몬테수마가 한 말과같은 발언이 정확하게 이해될 가능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도 있었다. 이 경우에 몬테수마가 한 말은 항복한다는 게 아니었다. 에스파냐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코르테스와 몬테수마의 만남이 어떻게 끝났는지 배웠을 것이다.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인질로 잡힌 뒤 살해되었다. 양쪽은 전쟁을 벌였다. 무려 2천만 명에 달하는아스테카인이 목숨을 잃었다. 에스파냐인의 손에 직접 살해되거나그들에게 옮은 질병 때문에 간접적으로 사망했다. 테노치티틀란은 파괴되었다. 코르테스의 멕시코 침략은 재앙과도 같은 식민지 팽창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또한 뚜렷하게 현대적인 새로운 사회적 상호작용 방식을 도입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전제와 관점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항상 접촉할 수밖에 없다. 현대 세계는 오스만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다투던 두 형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겹겹의 통역자를 거쳐 서로 이해하려고 애쓰던 코르테스와 몬테수마다.
<타인의 해석>은 우리가 그런 통역 행위에 왜 그토록 서투른지를 다루는 책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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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원한다면 보수의 생리부터 잘 알아야 한다지 않는가. 진화적 혁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논하기 전에 그것의 방해 요인부터 검토해보자. 만일 내일이라도 당장 바퀴 달린 동물이 출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틀림없이 그 동물은 생명의 역사에서 진화적 혁신을 가장 최근에 이뤄낸 중요한 존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그럴까?
일단 ‘발생적 제약developmental constrain‘ 때문일 개연성이 높다. 발생적 제약이란 안정된 발생 체계의 본성으로 인해 특정변이들을 발생시킬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제약이다. 또는 발생 체계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특정 변이들을 아주 드물게만 발생시키는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 발생적 제약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네의 체절 수는 종에 따라 15개부터 191개까지 다양하지만 흥미롭게도 모두 홀수이다. 한편 곤충의 경우에는 머리 부분에는 6개, 가슴에는 3개, 그리고 배에는 9개의 체절이 있어서 총 체절 수는 18개로 고정되어 있다. 이것들은 발생적 제약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실제로 초파리의 경우에는 ‘간극 유전자 gap gene‘가 초파리의 체절 수를 조절하는데, 인위적으로 이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키면 인접한 체절들 사이에 경계가 무너져 결국 초기 배아상태에서 죽고 만다. 이러한 변이는자연 상태에서는 아주 드물게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파리의 체절 수가 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발생 상의제약 때문이다(Arthur, 2001 - P290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호메오박스들이 초파리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쥐와 인간과 같은 척추동물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부터 호메오 유전자의 일종인 Hox 유전자에 대한 연구 결과가 그야말로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예를들어, 초파리의 발생과정에서 배아의 전후 축을 결정하는 염기서열은 포유류의 척추와 골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에도 같은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사한 염기 서열이 계통적으로 아주 동떨어진 종에서도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게끔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 P292

좀 더 포괄적으로 보자면 Hex 유전자와 같은 마스터 조절 유전자들은 생명의 다양성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레고 블록이다. 개구리, 악어, 제비, 침팬지, 그리고 인간을 만들려면 초파리의 경우보다는 레고 블록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다양한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자연은 초파리를 위해 사용했던 레고 블록을 다시 활용해왔다. 생명의 다양성은 말하자면 레고의 수와 조립 방식이 변화된 결과이다. 즉 Hox 유전자 수의 증감과 그 유전자의 발현 방식의 차이때문에 생겨났다. 아래 그림은 똑같은 형태의 두 건물이 어떤식으로 분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두 건물은 ‘중복과 분화‘ 메커니즘에 의해 큰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Hox 유전자 수의 증가와 이후에 생기는 발현 방식의 변화, 즉 ‘중복과 분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P294

마지막 한 가지 시사점은 혁신을 촉진하는 외부적 요인에 관한 것이다. 캄브리아기의 대폭발과 백악기의 대멸종 사건에서처럼 때로는 강력한 외부적 요인들이 혁신을 몰고 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의할 사항이 있다. 외부적 요인들은 대개 혁신의 촉발제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내부적 변화 동인이 없이 외부적 요인만으로는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이런 주장이 너무 강한 것 같다면, ‘외부적 요인은 내부적 요인-예컨대, 발생 유전자의 변화과 함께 작용할 때에만 혁신을 일궈낸다‘ 정도로 말하면 될 것이다. 캄브리아기에 아무리 적응 공간이 팽창했다 해도 만일 당시에 Hox 유전자가 구비되어 있지않았더라면 대폭발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백악기에 제아무리 큰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다 해도 만일 당시에 포유동물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인류는 결코진화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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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 P8

게다가 오늘 같은 날은 더욱 여기에 올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이모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겹친 날, 이모에게 특별한 날이면 나의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특별한 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겹친 운명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집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할 수 없는일이었다. 어차피 여기에 와 있고, 더더욱이 장미꽃을 들고 어머니에게 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 집에선 그랬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 P28

외식을 하기로 한 장소는 이모네 수준에 맞게 호텔의 정통 프랑스식당이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어디로갈까 많이 망설이다정한 곳이라는 이모의 부연 설명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외식은, 물론 그것마저 일년에 몇 차례 불과한 일이지만, 망설임 한번 없이 단호하게 돼지갈비집이었다. 고기 타는 연기가 식당 바깥까지 자욱하고, 맛 좋기로 소문났다는 어머니의 자랑처럼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찬 그곳에서는 먹는 일도 노동이었다. 쉴새없이고기를 뒤적이고, 연기를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볼이 미어지게 싸 넣은 상추쌈으로 격렬한 입 운동이 불가피한 거기. 남동생과 나와 어머니는 전쟁터 속의 병사들처럼 묵묵히, 그러나 죽을힘을 다해 돼지고기와 싸우다 거의 지쳐서 식당을 나오곤 했었다.
하지만 여기 이모네 외식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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