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밤은 아름답다. 어제 내린 비로 밤하늘은 모처럼 총총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고 먼 곳에서 흘러오는 라일락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아 이 밤의 그윽함을 더해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평수의 집들. 당연히 마당이라고 해 야손바닥만한 넓이가 고작인 우리 동네 담장에는 이상하게도 라일락 나무가 많다. 볼품없는 맨가지로 서 있을 때는 눈에도 띄지 않다가 늦봄이 되어 레이스 같은 보랏빛 꽃송이들이 매달리기 시작하면 향기와 함께 누추한 골목길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라일락. 그러나 우리 집 마당에는 한 그루도 없는 라일락. 크리스털 화병을 내밀면서 라일락을 말하던 이모 집 정원에도 라일락이 없다. 이모 집만이 아니고 그 동네 담장 위로 확인할 수있는 잘사는 집 정원의 수종(樹種)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라일락이 포함되지 않는다. 라일락은, 그 화사한 자태와 향기와 멋들어진 이름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정원에 선택되지 않고 초라한 마당의 한 뼘 땅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나는 봄이 오면 늘 라일락을 주목했다. 내가 나무라면 나는 라일락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우리 집에는 한 그루의 라일락도 없다. - P43
진모가 나 못지않은 아니, 나를 훨씬 능가하는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그 애의 삶에 참견하지 않았다. 진모의 삶은 진모의 것이었고 진진이의 삶은 진진이의 것이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삶의 공식인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 P51
평상심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생생해진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베개를 밀어붙이고, 어머니는 지금부터 한판 붙어도 끄떡없다는 투다. 이 놀라운 재주, 그것은 마치 태엽이 다 풀려 늘어져 있던 장난감 강아지에게 있는 대로 태엽 밥을 먹인 후의 돌변보다 더 돌연한 것이어서 언제나 나를 기막히게만든다. 지칠 대로 지쳐서 지푸라기처럼 늘어져 있는 어머니를 내할 때는 짜증이, 태엽이 감긴 후의 생생한 어머니를 대할 때는 적의가 치솟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대응법 또한 그 못지않게 변환이 신속한 것이긴 하지만. - P61
어머니는 자신 있다는 듯 하하, 웃었다. 어머니의 웃음은 나날이 힘차진다. 어머니에 대해 연구할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 불가사의한 활력일 것이었다. 전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의 활력을 재생산해서 삶에 투자한다. 나이가들수록 어머니의 재생산 기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젊어서는그렇게도 넘치던 한숨과 탄식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삶에의 모진 집착뿐이다. 내 어머니는 날마다 쓰러지고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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