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의 미래를 내다보았는지 유력한 아들들도 내분보다는 단합을 택했다. 누르하치의 후계자는 조선에서는 별로 거론되지 않았던 8번째 아들 홍타이지였다.
홍타이지는 1621 년부터 조선 침공을 주장한 인물로, 조선에 대한 강경파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은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을 반대했던 이복형제 다이샨과 갈등이 있다는 첩보를 얻고 둘을 이간시켜보자는 논의를 했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죽자 다이샨은 홍타이지의 즉위를 후원했다. - P72

모문룡이 죽고 가도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전란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평북지방의 복구는 지지부진했다. 주민을 모으고 생산력을 회복하려면 안전보장이 선결 조건이다.
조정의 방어 의지와 안전보장의 상징이 바로 최일선 기지인의주성이었다.
조정에서는 평북 포기 전략이 논의되고 있었지만, 외부에 발설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결정되기 전에는 의주를 재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조정은 의주로 군량을 운송해서쌓아놓고 커다란 병기창고를 지었다. 방어 의지를 과시해흩어진 주민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의주 재건을 약속하면서 정묘호란의 유가족들을 향해 당신들이 나서서 학살당한 일가친척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무능했다면 조정이 그랬고 야비했다면 선동가들이 그랬지, 백성들은 비겁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지만, 이 무능한 정부를 믿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의주사람이 아니더라도 간혹 복수나 설욕을 외치며 자진해서 의주로 들어오는 무사도 있었다. - P93

"침공이 발생하면 내가 직접 장사를 대동하고 북상해 싸우겠다." 흥분한 인조가 이같이 선언했다. 왕이 이벤트 없이 출정할 수는 없으므로 출정식까지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왕의직접 출정은 조선 건국 이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인조는 비변사에 이런 비장한 메시지를 보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이다. 금의 병사들이 강하긴 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기지는 못할 것이며, 아군이 약하지만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무사들이 만약 자신을 잊고 순국한다면 교만한 오랑캐를 무찌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 세상 사람 중 죽지않고 영원히 사는 자는 없다. 그러니 치욕을 참고 구차히 사는 것이 정의를 향해 앞장서서 대장부의 뜻을 이룩하는 것만 하겠는가! 만약 오랑캐가 침략해오면 과인이 오랑캐의 앞길에 진주하여 장사를 격려하고 평안도에 사는 군인과 백성을 위로하겠노라."
인조가 정말로 출정을 했고, 병자호란의 결과가 달라졌다면 이 글은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멋진 연설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세 유야무야됐다. - P102

결국 조정은 교역 철회를 취소하고, 예물도 적당히 보내주기로 한다. 이렇게 1633년의 위기는 격한 감정으로 시작해서 아전인수로 끝났다. 후금이 조선의 도발을 쿨하게(?)넘어간 이유는 조선을 침공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전략적 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금이 보기에 명은 자멸하고 있었다. 후금군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던 원숭환을 자기들 손으로 죽였다. 요동의 군민들이 동요했고 원숭환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투항했다. 모문룡의 잔존세력도잘하면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명 전쟁에 있어서 그야말로 대운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흥분되는 순간에 조선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조선의 척화파만 자신감이 한껏 올라갔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전쟁은 군사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르후의 패전은광해군의 배신 때문이다. 정묘호란의 패전은 주화론 때문에민심이 분열되어 한마음으로 뭉쳐 죽기로 저항하지 않았기때문이다." - P106

용골대와 마부대는 항복한 몽골 왕자들을 대동하고 조선에 와서 명과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한다. 조선은 분노해서용골대를 쫓아내고 전국에 전쟁 준비명령을 내린다. 용골대는 분노한 조선 군중을 피해 도망치듯이 귀국했는데, 그와중에도 조선의 연락병으로부터 전쟁 준비 교서를 탈취해서 귀국한다.
이 직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가된다. 조선 사신들은 황제에 절하는 것을 거부해 구타당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정한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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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이었다. 물문 틈서리로 스며나온 가느다란 물줄기가 콘크리트 경사면을 타고 아래쪽으로 졸졸 흘러내리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혀로 땅기스락을 연신 핥아대며 자장자장 이곡리를 잠재우는 나지막한 물결 소리도 그는 들을 수가있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물새들이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월척의 잉어란 놈일 것이었다. 깊은 물속에서 수면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지는 물고기가 있었다. 수면을 강하게 때리는 물소리 쪽을 겨냥하고 그는 손전등을 쏘아보았다. 물고기가 이루어놓은  둥그런 파문만이 빛의 그물 안에 잡혔다.
그는 사방으로 불빛을 비추어 짙은 어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껏 소리로만 전달되던 것들이 색깔과 모양으로 바뀌어 낯익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새 건전지로 갈아끼운지 얼마 안 되는 손전등은 꽤 멀리 떨어진 것들까지 확 끌어다가 낱낱이 그의 눈앞에 무릎을 꿇려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전등을 붓처럼 사용해서 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하나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그 자신의 관할 구역을 나타내는 지도였다. 그것은 작은 왕국이었다. - P66

문제는 술집 작부쪽이 아니었다. 작부에 얽힌 소문을 빌미로 하여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던져오는 돌팔매였다. 아직은 그저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신호인가를 운암댁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뒷전에 숨어 있는 엄청난 불행을 한 발짝 앞질러 오는 으스스한 조짐이었다.
다름아닌 그놈의 완장이란 물건이 화근이었다. 운암댁의 문을똑똑 두드리는 불행은 바로 그 완장으로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P105

운암댁은 완장에 관해서 자기 깜냥에 알 만큼은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축이었다.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 엄청난 땅덩이를 혼자서 관리할 수도 없고 미천한소작인들을 상대로 언성 높여가며 손수 도조를 거두러다니기도 귀찮을 뿐만 아니라 체통이 안 서는 일이니까 중간에 마름을 세우거나 머슴을 부리는 형식이었다. 완장은 대개 머슴 푼수이거나 기껏높아봤자 마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완장은 제가 무슨 하늘같은 벼슬이나 딴 줄 알고 살판이 나서 신이야 넋이야 휘젓고다니기 버릇했다.
마냥 휘젓고다니는 데 일단 재미를 붙이고 나면 완장은 대개 뒷전에 숨은 만석꾼의 권세가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양, 바로 만석꾼본인인 양 얼토당토 않은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소작인을 다루는 마름의 태도가 정작 지주보다도 오히려 더 혹독하고, 똑같은 머슴 처지였으면서 완장만 팔에 둘렀다 하면 다른 머슴들을 사정없이 구박하게 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작인이나 다른 머슴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그리고 완장이 불로초를 먹고 장수영생을 누리는 것도 아니었다. 화무십일홍이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었다. 제까짓게 뭔데 하는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벌써 완장의 신상엔 위험이 닥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로부터 지주보다 더 미움받는 마름의 생명이 결코 오래 갈리는 없었다. 참다 참다 못한 소작인들은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보릿고개에 마침내 낫과 곡괭이를 들고 떼지어 마름의 집을 습격하게 마련이었다. - P105

"완장한티 고마침 당하고도 당신은 그 웬수녀르 완장이 지긋지긋허지도 않소?"
"이놈의 예펜네가 초장부터 재수없게 무신 잠꼬대 같은 소리여? 완장 찬 놈들한티 안 죽을 만침 당혀본 사람이니까 요번참에는 당연히 내 차례가 왔단말여! 인자부터는 으떤 놈도 내 앞에서 함부로 못 까불어!"
거듭되는 운암댁의 잔소리에 남편은 필경 역정을 내고 말았다. 생판 다른 사람인 양 남편이 홰까닥 변해버렸음을 운암댁은 그제야실감하기에 이르렀다. 아침에 집을 나설 당시의 남편이 토끼였다면이제 완장을 차고 돌아온 남편은 살쾡이였다. 남들한테 물리면서만살아온 사람이 바야흐로 남들을 물기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 P107

참으로 놀라운 이해의 순간이었다. 애비라는 말의 끝없는 되풀이가 그의 칠칠치 못한 두뇌로부터 갑작스레 어리석음을 몰아냄과 동시에 그만큼의 지혜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완장이구나, 완장!"
그렇다. 그것은 완장이었다. 준환이놈은 그때 다름아닌 그 완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닫혀만 있던 문이 열리면서 종의 머리는 마침내 완장이란 물건의 정체에 대한 신통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팔에다 차는 것만이 완장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도둑질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김준환이 필사적으로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것 또한 완장의 하나였던 것이다.
"권력 한 가지가 다는 아니여."
이 세상에는 빛깔 다르고 소리와 냄새도 다른 수많은 완장들이존재하고 있었다.
"땅도 완장이여."
땅도 완장이었다. 없는 땅,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턱없이 부족한 땅 때문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려왔던가.
"돈도 완장이고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그런 것들도 틀림없는 완장의 한 종류였다.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 남들을 큰소리로 부리고 남들 앞에서 마냥 뻐겨댈 수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완장이었다.
"지집까장도 여부없는 완장이여."
계집도 완장이었다. 사내들이 계집을 후리려고 기를 쓰는 이유는 그것을 보아란 듯이 팔에다 두르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쁜 계집, 잘난 계집을 꿰찬 사내일수록 남들 앞에서 기를 펴고그렇지 못한 사내는 으레 기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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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막다른 골목이었다. 자기 인생에서 더 이상 뒷걸음질쳐흘러갈 데라고는 이제 아무리 둘러보아도 없다고 그니는 판단하고있었다.
그니가 유독 종술이한테만 그처럼 몰풍스럽게 대하는 까닭은 무척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했다. 그리고 복잡한 듯하면서도 실상은아주 단순했다. 상대방을 너무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똑같이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똑같이 도회의 살벌한 바다을 전전하면서 똑같이 욕된 이력을 쌓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술에게 동류에 비슷한 감정마저 느끼고 있었다. 똥창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대이기 때문에 종이가 무슨 지랄을 떤다 해도 그니는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저수지 감독인지 감시원인지 하는 완장을 차고 마냥 거들먹거리는 꼴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작부가 보기엔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수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니가 무서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니 자신이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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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누르하치의 등장
만주 땅에 중원을 노리는자가 있었다

‘두고봐라. 나 누르하치가 모든 여진 부족을 복속시키고말 것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추장으로, 뛰어난 용사였다. 당시 명은 만주의 여진족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구분했는데, 이들 안에는 또 여러 부족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야심을 감춘 채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 P12

 허균은 포기하지 않고 1608년 누르하치의 침공을 경고하는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와 <병론>을썼다.

세상에 군대 없는 나라는 없다. 군대 없이 유지되는 나라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기적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조선이다. 변변한 군대도 없이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의 침략을 이겨냈다. 나도 가족을 잃었고,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기적이다. - <서변비로고>

‘기적적인 나라, 조선‘. 이 말은 반어법이다. 기적은 한 번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은 그 처절한 전쟁을 겪고도 변하지 않았다.

아,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국방을 잊었다. 장수들은 시간만 때우며, 보직 이동만 기다린다. 군인명부의 반은 비었고, 군사는 훈련하지 않는다. 성곽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다. 조정에서 다른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에겐 명이 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나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 〈서변비로고〉 - P19

조선 관료들은 학식이 낮다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탐욕스러워 힘을 얻으면 못할 짓이 없다.‘라는 의미와
‘약탈은 하지만 지배는 못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충일은 이렇게 판단했다. ‘이들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목표는약탈이다. 점령지에 눌러앉아 통치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고, 설령 통치한다 하더라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 P32

신충일은 안심한 채 돌아왔고, 조정도 그의 보고에 안심했다. 소문은 부풀려지고, 무지는 공포로 둔갑하는 법이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멀리서 보면 기병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가난하고 피곤한 농민 병사들이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은 불안하고, 다른 여진 부락들은 여전히 충성스럽지 않다."
한마디로 조선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여진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신충일은 여기에 낙관적 평가마저 더한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아는 자도 없는 저들의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정복할 수는 없다. 정복한다 해도 통치하지는 못한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저들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운해진 것이다." - P35

 누르하치의 칸 등극, 그리고 유일하게 누르하치와 대적할 만한 장수의 재파면, 명과 여진 간 힘의 저울이 점차 여진 쪽으로 기운다. 명에서 이성량을 재파면하기 10년 전 그해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했다. 새 국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에 간 이덕형은 명 관리들이 누르하치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 누르하치의 1차 목표는 요동이다. 그다음은 조선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선은 당장 요새를 손보고 군사를 배치할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의 왜적과 수준이 다르다. 임진왜란 때처럼 조선이 도망쳐서 피하고자 하면(지구전으로 버티면서 명에 원병을 청하려는 전술을 쓰다가는) 여진의 기병이 바람처럼 휩쓸어 남아나는 백성이 하나도 없을것이다. 이번에는 우리도 도울 수 없다. 귀국에서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
이덕형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 P39

광해군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비변사의 안을결재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중국의 병력으로도 누르하치를 한 번에 섬멸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 요동에 회답을 보낼 때는 경솔하게 정벌하지말고 신중하게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써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의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 野戰 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솔직히 형편없기는 명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과연 명군이 후금의 홈그라운드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섬멸할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조선군의 사정을호소하기도 하고, 명군의 계획이 너무 모험적이라고 충고도했다. 명군이 정말 자신있다면 조선군이 굳이 출정할 필요없이 압록강에 진을 치고 누르하치의 퇴로를 막으면 되지않겠냐고 타협안도 보내봤다. 그러나 명군은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출정을 결정한다. - P45

사르후에서의 패전은 광해군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파병을 주장했던 사람들을 문책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이 먼저역공을 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일부러 패하게 했다는 음모론을 퍼트린 것이다. 이 밀지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가짜뉴스일 것이다.
이 음모론이 먹혀든 원인은 일단 사람들이 패전을 믿고싶지 않아 했다는 게 가장 컸다. 패전으로 인한 상심에 위안을 줄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그게 광해군이 된 것이다.  - P50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인정전에서 벌어진국문장, 관원들은 허균의 입을 막고 끌고 나가더니 바로 처형해 버린다. 죄목은 역모, ‘민중을선동했다‘는 것이다. 직전까지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서며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위해 노력하던 허균에게는 어이없는 혐의였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허균이 이런 혐의를 뒤집어쓴 데는 그가 평소에 국방 문제, 여진침공에 관한 경고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 구실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허균은 왜 광해군과 북인들에게 배신당했을까? 필자는 북인 측이 허균을 폐모론의 선봉장으로 이용하다가 반발이 커지자 허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러면 허균은 왜 서인 탄압과 독재 강화에 동조했을까? 허균은 조선의 국방 상황에 위험을 느끼고 있었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권력에 비상한 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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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감염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지 알아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거기에 이른 과정은 예측을 크게 벗어난다. 자크 페팽의 조사에 의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이티에서 바이러스가 증식하고 퍼진 과정이 새롭게 밝혀졌던 것이다. 일단 1966년경 단 한 명의 감염자로부터 에이즈 바이러스가 아이티 전역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이 사실은 1982년에야 포르토프랭스 Port-au-Prince 빈민가에 거주하면서 한 소아과 의원을 통해 홍역 임상시험에 참여한 553명의 젊은엄마들의 혈액 검체에서 밝혀졌다. 검체들을 후향적으로 검사한 결과 7. 8퍼센트의 여성이 에이즈바이러스 양성으로 판정되었다. 어떤 사회에 새롭게 도입된 바이러스치고는 놀랄 만큼 높은 수치였으므로 페팽은 틀림없이 초기에 성적접촉을 능가하는 ‘매우 효과적인 증폭 기전‘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능성있는 기전을 찾아냈다. 바로 혈장매매다.
혈장이란 혈액에서 혈구를 제거한 후 남는 액체 성분으로 항체와알부민과 응고인자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매우 유용하다. 1970년 무렵, 크게 증가한 혈장 수요에 발맞추기 위해 혈장분리교환술plasmapheresis 이라는 기법이 개발되었다. 기증자의 혈액을 여과시키거나 원심분리하여 혈장과 혈구를 분리한 후, 혈구는 다시 기증자의몸에 넣어주고 혈장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한 명의기증자로부터 1년에 고작 몇 번밖에 채취할 수 없었던 혈장을 훨씬 자주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증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돈이 필요해서 신체적 부담을 감수하는 판매자들이다.)  - P607

생태학자들은 이런 사건을 가리켜 대발생outbreak 이라고 부른다. 질병의 유행 outbreak 이라고 할 때보다 훨씬 일반적인 용법이다. 그 속에질병의 유행이 포함된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어쨌든 보다 넓은 의미에서 대발생이라는 말은 단일한 동물종의 개체수가 갑자기 엄청나게늘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대발생을 일으키는 동물종이 있는가 하면,
일으키지 않는 종도 있다. 레밍 (lemming, 나그네쥐)은 대발생을 일으키지만수달은 그렇지 않다. 메뚜기 중 일부, 생쥐 중 일부, 불가사리 중 일부종은 대발생을 일으킨다. 분류학적으로 같은 집단에 속하는 다른 동물종들은 그렇지 않다. 딱따구리가 대발생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울버린(wolverine, 북미산 족제비과에 속하는 맹수-역주)이 대발생을 일으킬 가능성도 거의 없다. 한편, 나비목(Lepidoptera, 나방과 나비)에 속하는 곤충들중에는 천막애벌레뿐만 아니라 매미나방 gypsy moth, 독나방 tussock moth, 낙옆송새싹나방 larch budmoth 등 대발생을 일으키는 몇몇 종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비목 중에서도 일반적이라기보다 예외적 존재다. 숲속에 사는 나비와 나방 중 약 98퍼센트는 비교적 낮은 밀도로 안정적인 개체수를 유지한다. 대발생을 일으키는 좋은 기껏해야 2퍼센트에불과하다. 곤충, 또는 포유동물이나 미생물 가운데 어떤 동물종이 대발생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복잡한 질문이다. 전문가들조차 아직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앨런 베리먼Alan A. Berryman 이라는 곤충학자는 <대발생의 원리 및 분류The Theory and Classification of Outbreaks〉라는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룬 바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대발생이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특정한 동물종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단조로운어조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관점에서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심각한 대발생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대발생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베리먼은 특히 지난 2세기 동안 일어난 인간 집단의 성장 속도와 크기를 지적한 것이다. 이런 말이 도발적이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 P618

우리는 경이롭고, 유례 없는 존재다. 우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행성 위에서 다른 어떤 영장류도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거의 모순적인 존재다. 몸집이 크고 수명이 길면서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현상, 대발생이다. - P621

"무엇보다 RNA 바이러스인 만큼 돌연변이율이 높지요. 증식은 활발한데 품질 관리가 안 된다고 할까요. 유전암호를 구성하는 각각의문자 수준에서 복제 오류가 끊임없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걸 설명하기엔 어림도 없지요. 훨씬 중요한 문제는 재배열입니다." 재배열이란 두 가지 서로 다른 바이러스 아형 사이에 게놈 분절 전체가우발적으로 교환되는 현상이다. 독감 바이러스는 게놈이 분절화되어있어 서로 다른 유전자끼리도 분절이 나뉘는 지점은 정확히 들어맞기때문에 재배열이 자주 일어난다. 적혈구응집소만 해도 16종류잖아요. 뉴라미니다아제도 9가지나 되지요. 그러면 쉽게 계산할 수 있지요?" 머릿속에서 실제로 계산해보았다. 144가지의 조합이 나왔다. 이런 변화는 무작위적이며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바이러스가죽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위적인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변이는 끝없는가능성을 탐구하는 것과 같다. 자연선택, 적응, 진화의 원재료인 것이다. 독감이 그토록 놀랍고, 그토록 새롭고, 그토록 무시무시한 이유는수많은 돌연변이와 재배열을 통한 변화무쌍함에 있다. - P632

바이러스 진화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들, 수많은 질병과학자들에게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1) 가까운 시일 내에 에이즈나 1918년의독감처럼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신종 질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까요? (2) 그렇다면 그 질병은 어떤 형태이며 언제 발생할까요?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럴 수도 있다‘ 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가 가장 많았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RNA 바이러스, 특히 영장류를 보유숙주로 하는 바이러스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다음번 대유행이 실제로 찾아온다면, 그 병은 인수공통감염이라는 대전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P639

과학 문헌을 찾아보면 거의 동일한 신중하지만 정보에 근거한 추측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재 피츠버그 대학 공중보건대학원 학장인 유명한 바이러스학자 도널드 버크 Donald S. Burke는 1997년 나중에 책으로출판된 강연을 통해 어떤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첫 번째 기준이 가장 명확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근에 전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킨 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르토믹소바이러스(독감)와 레트로바이러스(에이즈)가 먼저 물망에 오른다. "두 번째 기준은 인간이 아닌 동물 집단에서 큰 유행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오르토믹소바이러스와 함께 파라믹소바이러스(헨드라와 니파), 코로나바이러스SARS-CoV가 떠오른다. 버크의 세 번째 기준은 "내재적 진화가능성", 즉 돌연변이와 재조합이 쉽게 일어나 "인간 집단 내에서 신종 질병으로 나타나고, 전 세계적인 유행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바이러스"이다. 그 예로는 다시 레트로바이러스, 오르토믹소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를 들었다. 그리고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를 지목하며 "이들 바이러스 중 일부는 인류 보건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진화 가능성이 높고 동물 집단에서 유행병을 일으키는 능력이입증되어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 P640

다양한 전문가들이 이런 요인들에 대해 경고해 왔으며, 이런 요인들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열거해 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우선 우리는 개체수가 70억을 넘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승세를 멈추고 보합상태로 돌아서기 전에 세계인구는 90억을 가볍게 넘길 것이다. 많은도시에서 우리는 밀집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 행성에 마지막으로 남은 거대한 숲과 야생 생태계를 침입하여 물리적 구조와 생태학적 공동체를 파괴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콩고 전역을 망가뜨렸다. 아마존도 망가뜨렸다. 보르네오도 망가뜨렸다. 마다가스카르도 망가뜨렸다. 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도망가뜨렸다. 이익을 노리고 나무들을 베어 넘어뜨렸으며,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른 채 돈을 챙기는데만 급급했다. 숲에서 발견한 야생동물들은 보는 족족 죽여 고기를먹어치웠다. 그 자리에 정착하여 작업장과 주거지와 마을과 채취산업과 새로운 도시들을 세웠다. 그곳에 우리가 길들인 동물들을 데리고들어가 야생동물종을 가축으로 대체해 버렸다. 우리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가축들의 숫자도 늘어야 했기에 거대한 공장식 축산업을 일으켰다. 소와 돼지와 닭과 오리와 양과 염소는 물론 수많은 대나무쥐와 딸시벳까지 집단적으로 축사와 울타리 속에 가두어 이런 가축 또는 반가축화된 동물들이 외부로부터(축사 위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병원체에 감염되고, 그런 감염이 그 속에서 널리 퍼지고, 그런 병원체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소나 오리는 물론 우리 자신까지 감염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이렇게 대량으로 사육하는 가축들에게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중을 불리고 이윤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도축할 때까지만 건강을 유지시킬 심산으로 예방 용량의 항생제를 투여함으로써 저항성 세균의 진화를 부추겼다. 우리는 아주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가축들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의학 연구를 위해 살아 있는 동물, 특히 영장류를 수출하고 수입한다. 이국적인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야생동물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무임승차한 미생물 승객이 몰래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짐승의 가죽과 사냥이 금지된 동물의 고기와 채취가 금지된 식물들을 수출하고 수입한다. 우리는 가축을 수송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시와 대륙 사이를 오간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이 재채기를 해대는 호텔에서 묵는다. 우리가 들른 식당의 주방장은 우리가 주문한 조개 요리를 만들기전에 호저를 도살한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원숭이 사원을 방문하고, 인도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을 파는 시장을 방문하고, 남미에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방문하고, 뉴멕시코 주에서는 먼지가 뽀얗게이는 고고학적 유적을 방문하고, 네덜란드에서는 젖소 목장을 방문하고,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박쥐가 사는 동굴을 방문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경마장을 방문하여 공기를 호흡하고, 동물들에게 먹이를주고,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지고, 친절한 현지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기와 진드기들에게물린다. 우리가 배출한 탄소가 기후를 변화시킴에 따라 모기와 진드기가 서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나 엄청난 숫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험심이 강한 미생물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이 인수공통감염병의 생태학과 진화생물학에서 중요한주제들이다. 생태학적 환경은 종간전파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진화는 종간전파가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지는 과정을 촉진한다. - P643

나는 매일 그 나무를 지나친다. 거의 항상 그 자국이 거기 있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거의 항상 애벌레들이 엄청난 숫자로 몰려왔다가사라져 버린 일을 기억한다. 한때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 유리했다. 그러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어쩌면 행운이야말로 결정적인 요소인지모른다. 어쩌면 상황이 중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냥 운명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동일 것이다. 유전학일 수도 있다. 요즘 나는 나무에생긴 그 자국을 보면서 종종 그렉 드와이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 P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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