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이었다. 물문 틈서리로 스며나온 가느다란 물줄기가 콘크리트 경사면을 타고 아래쪽으로 졸졸 흘러내리는 소리를 그는 들었다.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혀로 땅기스락을 연신 핥아대며 자장자장 이곡리를 잠재우는 나지막한 물결 소리도 그는 들을 수가있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물새들이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월척의 잉어란 놈일 것이었다. 깊은 물속에서 수면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지는 물고기가 있었다. 수면을 강하게 때리는 물소리 쪽을 겨냥하고 그는 손전등을 쏘아보았다. 물고기가 이루어놓은  둥그런 파문만이 빛의 그물 안에 잡혔다.
그는 사방으로 불빛을 비추어 짙은 어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껏 소리로만 전달되던 것들이 색깔과 모양으로 바뀌어 낯익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새 건전지로 갈아끼운지 얼마 안 되는 손전등은 꽤 멀리 떨어진 것들까지 확 끌어다가 낱낱이 그의 눈앞에 무릎을 꿇려놓고 있었다. 이번에는 손전등을 붓처럼 사용해서 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하나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그 자신의 관할 구역을 나타내는 지도였다. 그것은 작은 왕국이었다. - P66

문제는 술집 작부쪽이 아니었다. 작부에 얽힌 소문을 빌미로 하여 마을사람들이 한결같이 던져오는 돌팔매였다. 아직은 그저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신호인가를 운암댁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뒷전에 숨어 있는 엄청난 불행을 한 발짝 앞질러 오는 으스스한 조짐이었다.
다름아닌 그놈의 완장이란 물건이 화근이었다. 운암댁의 문을똑똑 두드리는 불행은 바로 그 완장으로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P105

운암댁은 완장에 관해서 자기 깜냥에 알 만큼은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축이었다.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만석꾼의 권력을 쥔 진짜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 엄청난 땅덩이를 혼자서 관리할 수도 없고 미천한소작인들을 상대로 언성 높여가며 손수 도조를 거두러다니기도 귀찮을 뿐만 아니라 체통이 안 서는 일이니까 중간에 마름을 세우거나 머슴을 부리는 형식이었다. 완장은 대개 머슴 푼수이거나 기껏높아봤자 마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완장은 제가 무슨 하늘같은 벼슬이나 딴 줄 알고 살판이 나서 신이야 넋이야 휘젓고다니기 버릇했다.
마냥 휘젓고다니는 데 일단 재미를 붙이고 나면 완장은 대개 뒷전에 숨은 만석꾼의 권세가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양, 바로 만석꾼본인인 양 얼토당토 않은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소작인을 다루는 마름의 태도가 정작 지주보다도 오히려 더 혹독하고, 똑같은 머슴 처지였으면서 완장만 팔에 둘렀다 하면 다른 머슴들을 사정없이 구박하게 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작인이나 다른 머슴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그리고 완장이 불로초를 먹고 장수영생을 누리는 것도 아니었다. 화무십일홍이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었다. 제까짓게 뭔데 하는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벌써 완장의 신상엔 위험이 닥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로부터 지주보다 더 미움받는 마름의 생명이 결코 오래 갈리는 없었다. 참다 참다 못한 소작인들은 몹시 흉년이 든 어느 해 보릿고개에 마침내 낫과 곡괭이를 들고 떼지어 마름의 집을 습격하게 마련이었다. - P105

"완장한티 고마침 당하고도 당신은 그 웬수녀르 완장이 지긋지긋허지도 않소?"
"이놈의 예펜네가 초장부터 재수없게 무신 잠꼬대 같은 소리여? 완장 찬 놈들한티 안 죽을 만침 당혀본 사람이니까 요번참에는 당연히 내 차례가 왔단말여! 인자부터는 으떤 놈도 내 앞에서 함부로 못 까불어!"
거듭되는 운암댁의 잔소리에 남편은 필경 역정을 내고 말았다. 생판 다른 사람인 양 남편이 홰까닥 변해버렸음을 운암댁은 그제야실감하기에 이르렀다. 아침에 집을 나설 당시의 남편이 토끼였다면이제 완장을 차고 돌아온 남편은 살쾡이였다. 남들한테 물리면서만살아온 사람이 바야흐로 남들을 물기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 P107

참으로 놀라운 이해의 순간이었다. 애비라는 말의 끝없는 되풀이가 그의 칠칠치 못한 두뇌로부터 갑작스레 어리석음을 몰아냄과 동시에 그만큼의 지혜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완장이구나, 완장!"
그렇다. 그것은 완장이었다. 준환이놈은 그때 다름아닌 그 완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닫혀만 있던 문이 열리면서 종의 머리는 마침내 완장이란 물건의 정체에 대한 신통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었다. 팔에다 차는 것만이 완장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도둑질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김준환이 필사적으로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것 또한 완장의 하나였던 것이다.
"권력 한 가지가 다는 아니여."
이 세상에는 빛깔 다르고 소리와 냄새도 다른 수많은 완장들이존재하고 있었다.
"땅도 완장이여."
땅도 완장이었다. 없는 땅,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턱없이 부족한 땅 때문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려왔던가.
"돈도 완장이고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그런 것들도 틀림없는 완장의 한 종류였다.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 남들을 큰소리로 부리고 남들 앞에서 마냥 뻐겨댈 수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완장이었다.
"지집까장도 여부없는 완장이여."
계집도 완장이었다. 사내들이 계집을 후리려고 기를 쓰는 이유는 그것을 보아란 듯이 팔에다 두르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쁜 계집, 잘난 계집을 꿰찬 사내일수록 남들 앞에서 기를 펴고그렇지 못한 사내는 으레 기가 꺾이게 마련이었다. - P1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