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누르하치의 등장
만주 땅에 중원을 노리는자가 있었다

‘두고봐라. 나 누르하치가 모든 여진 부족을 복속시키고말 것이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추장으로, 뛰어난 용사였다. 당시 명은 만주의 여진족을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구분했는데, 이들 안에는 또 여러 부족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야심을 감춘 채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 P12

 허균은 포기하지 않고 1608년 누르하치의 침공을 경고하는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와 <병론>을썼다.

세상에 군대 없는 나라는 없다. 군대 없이 유지되는 나라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기적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조선이다. 변변한 군대도 없이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의 침략을 이겨냈다. 나도 가족을 잃었고,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기적이다. - <서변비로고>

‘기적적인 나라, 조선‘. 이 말은 반어법이다. 기적은 한 번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은 그 처절한 전쟁을 겪고도 변하지 않았다.

아,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국방을 잊었다. 장수들은 시간만 때우며, 보직 이동만 기다린다. 군인명부의 반은 비었고, 군사는 훈련하지 않는다. 성곽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다. 조정에서 다른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에겐 명이 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나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 〈서변비로고〉 - P19

조선 관료들은 학식이 낮다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이해했다. ‘탐욕스러워 힘을 얻으면 못할 짓이 없다.‘라는 의미와
‘약탈은 하지만 지배는 못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충일은 이렇게 판단했다. ‘이들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목표는약탈이다. 점령지에 눌러앉아 통치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고, 설령 통치한다 하더라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 P32

신충일은 안심한 채 돌아왔고, 조정도 그의 보고에 안심했다. 소문은 부풀려지고, 무지는 공포로 둔갑하는 법이다.
신충일이 묘사한 퍼알라의 모습은 무지에 기반했기에 문명권과 거리가 먼 후진국의 모습이다.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이야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거칠고 투박한 것이야야만인에게는 정상적인 모습 아닌가 문제는 신충일의 보고에는 여진군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는 점이다.
"멀리서 보면 기병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가난하고 피곤한 농민 병사들이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은 불안하고, 다른 여진 부락들은 여전히 충성스럽지 않다."
한마디로 조선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여진족의 모습 그대로였다. 신충일은 여기에 낙관적 평가마저 더한다.
"소수 부족이 좀 강하다 한들 글을 아는 자도 없는 저들의문명 수준을 보건대 약탈 집단에 불과하며, 공격을 한다고해도 마을을 휩쓸고 분탕질을 할 뿐이지 광범위한 영토를정복할 수는 없다. 정복한다 해도 통치하지는 못한다. 무장수준도 조선이 여진 정벌을 감행했던 15세기에서 달라지지않았다. 저들은 아직 화포도 없지 않은가? 저들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운해진 것이다." - P35

 누르하치의 칸 등극, 그리고 유일하게 누르하치와 대적할 만한 장수의 재파면, 명과 여진 간 힘의 저울이 점차 여진 쪽으로 기운다. 명에서 이성량을 재파면하기 10년 전 그해에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했다. 새 국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에 간 이덕형은 명 관리들이 누르하치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 누르하치의 1차 목표는 요동이다. 그다음은 조선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선은 당장 요새를 손보고 군사를 배치할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의 왜적과 수준이 다르다. 임진왜란 때처럼 조선이 도망쳐서 피하고자 하면(지구전으로 버티면서 명에 원병을 청하려는 전술을 쓰다가는) 여진의 기병이 바람처럼 휩쓸어 남아나는 백성이 하나도 없을것이다. 이번에는 우리도 도울 수 없다. 귀국에서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
이덕형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 P39

광해군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비변사의 안을결재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중국의 병력으로도 누르하치를 한 번에 섬멸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 요동에 회답을 보낼 때는 경솔하게 정벌하지말고 신중하게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써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명은 14만 대군이 요동으로 모여들고 있으며, 더 많은 병사가 오고 있다고 허풍을 쳤지만 광해군은 믿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경험 덕분인지 명군과 누르하치의전력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광해군은 말했다. "조선 군대가 형편없다는 사실은 온 천하가 다 안다."
조선군의 문제점은 야전 野戰 과 공격 능력이었다. 수비는 곧잘 하는데 공격이 안 됐고, 더 큰 문제는 원정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은 고사하고 수비, 이동, 보급 등 모든것에 대한 준비가 전무했다.
솔직히 형편없기는 명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은 과연 명군이 후금의 홈그라운드로 들어가 누르하치를 섬멸할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조선군의 사정을호소하기도 하고, 명군의 계획이 너무 모험적이라고 충고도했다. 명군이 정말 자신있다면 조선군이 굳이 출정할 필요없이 압록강에 진을 치고 누르하치의 퇴로를 막으면 되지않겠냐고 타협안도 보내봤다. 그러나 명군은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출정을 결정한다. - P45

사르후에서의 패전은 광해군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파병을 주장했던 사람들을 문책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이 먼저역공을 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일부러 패하게 했다는 음모론을 퍼트린 것이다. 이 밀지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가짜뉴스일 것이다.
이 음모론이 먹혀든 원인은 일단 사람들이 패전을 믿고싶지 않아 했다는 게 가장 컸다. 패전으로 인한 상심에 위안을 줄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그게 광해군이 된 것이다.  - P50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인정전에서 벌어진국문장, 관원들은 허균의 입을 막고 끌고 나가더니 바로 처형해 버린다. 죄목은 역모, ‘민중을선동했다‘는 것이다. 직전까지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서며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위해 노력하던 허균에게는 어이없는 혐의였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허균이 이런 혐의를 뒤집어쓴 데는 그가 평소에 국방 문제, 여진침공에 관한 경고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 구실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면 허균은 왜 광해군과 북인들에게 배신당했을까? 필자는 북인 측이 허균을 폐모론의 선봉장으로 이용하다가 반발이 커지자 허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본다. 그러면 허균은 왜 서인 탄압과 독재 강화에 동조했을까? 허균은 조선의 국방 상황에 위험을 느끼고 있었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권력에 비상한 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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