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존중이 사라진 사회,
혐오가 먹고사는 법

친구들에게 요즘 수치심을 주제로 책을 쓴다고 말해보자. 각양각색의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 나의 일상이었다. 나는 각양각색의 수치심에 대해 들었다. 여드름이 심해서, 섹스를 못 해봐서, 수학을 잘 몰라서 겪은 창피도 있었고, 고등학생 때 탈의실에서 있었던 어두운 기억, 캠프 지도자나 의사, 교내 인기 운동선수에게 당한 모욕도 있었다. 이 수치심들은 내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공포와 고통이라는 거대한 웅덩이를 이루었다. 이 잔혹한 감정의 웅덩이는 들여다보기 힘들었고 이를 이해하기란 더욱 힘들었다. - P5

 휘틀리의 설명처럼 호피족 의식은 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몹쓸 인간이나 패배자라고 낙인찍는게 아닌, 잘못을 고치라고 충고하는 이벤트였다.
푸에블로의 광대가 구성원을 조롱하는 방식에서 우리는 수치심의 사회적 역할을 깨닫는다. 수치심이 건전하고 심지어 다정할수도 있다는 점이다(그러려면 일단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야 한다).  - P8

수치심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사바나를 무리 지어 돌아다닐 때부터 역할을 해왔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수치심은 고통과 아주 유사하게 우리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고통은 불과 날카로운 칼날을 조심해서쓰고 성난 말벌이 보이면 달아나라는 가르침으로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 수치심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수치심은 하나의 집단이 불어넣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에 집단의 규율과금기가 새겨진다. 그 목표는 개인의 생존이 아닌 사회의 생존이다. 이런 점에서 수치심은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내포한다.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신체, 건강, 습관, 도덕 등 관련 규범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다. - P10

수치심과 낙인은 금기를 따르도록 강제한다. 이는 진화론의 맥락에서 합당한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근친상간이 주는 수치심은 인간이 더 풍부한 유전자 풀을 퍼뜨리게 한다. 또 대다수 사회에서 수치심은 식량 비축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못 하게 막아준다. 이런 신호를 이해하는 것이 생존 기술이다. 수치심은 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나약한 입지를 보여준다. 다윈주의로 해석하면 수치심은 경고 신호로, 사회 구성원은 이를 불길한조짐으로 받아들인다. 이 위험경보는 인류 초기부터 유래한 것으로, 당시 수치심이 드는 행동을 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소외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심하면 우리는 몸서리치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다. - P11

수치심의 체계가 끊임없이 변화해도 이를 노리는 사업 기회는 늘 넘쳐흐른다. 러닝머신 구입, 코 성형수술, 광고 클릭, 가짜 명문대학위 취득, 값비싼 다이어트 프로그램 가입, 특정 대선 후보에 대한 투표 유도 등 어떤 사업모형을 구상하든 먼저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어떤 점이 불만인지. 어떻게 하면 자기혐오가 줄어드는지 찾아내야 한다. 이는 수치심산업 복합체shame industrial complex의 이해타산에서 핵심으로,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살필 것이다.
이 징벌적 생태계에서 핵심 행위자들은 내가 ‘수치심 머신The Shame Machine‘이라고 부르는 것을 운영한다. 수치심 머신은 상장기업부터 정부 공무원까지 수많은 형태가 있다. 개인도 SNS 계정이나 자기계발류의 정보성 광고를 통해 나름의 몫을 한다. 이들 모두 수치심의 무기화에 조금씩 가담한다. 이들 중에는 단지 이윤을 얻으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약자에게 주는 혜택을 거부하고이들을 교도소에 밀어 넣는 등 취약계층을 위협하는 부류도 있다. 수치심은 의지를 꺾고, 침묵시키며, 명료한 사고를 막아 편향성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피해자는 체념하고 굴복한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는 늘 굶주려 있는 수치심 머신을 거쳐 끝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수치심 산업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약물 중독부터 빈곤 문제까지, 이들은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실패를초래했다고 전제한다. 즉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 잘못은그들이 했으니, 자책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겨도, 또 문제를 해결하고 정해진 구원의 길을 따라갈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 P14

당시 나의 수치심은 교내 식당에서 방귀를 뀌었다든가 역사시험을 망쳤다든가 하는 개별적 사건에서 생긴 게 아니었다. 만성적인 심리 상태였다. 매일 입는 옷부터 친구들과 함께하기로한 활동까지, 나는 내 삶을 통제하며 살았다. 수치스러운 사건들,
그러니까 체육관에서 체중을 쟀던 일이나 먼 훗날 상점에서 겪은 일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옷은 몇 주간의 다이어트에 성공했을 때만 사기로 했다. 이 말은 곧 내 모든 옷이언제나 불편할 정도로 꽉 끼었다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요요현상이 온 나에게 벌을 내렸다. 결국 나는 뚱뚱했을 뿐 아니라 불편하게 살았고 습관처럼 자기 처벌을 했다.
이것이 바로 수치심이 하는 일이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수치심이 내리는 명령을 받들고 산다. 수치심은 언어나 종교처럼 내면에 깊게 자리 잡는다. 또한 머릿속에도 장벽을 세운다. 그 장벽을 넘어섰다가는 창피함에 고통받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기회나 즐거움, 사랑이 와도 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그렇게 삶을 잠식한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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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와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은 군이었다. 많은 장교들이 미군의 필요에 따라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 때문에당시 군은 가장 선진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가 관할하는 공공 영역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 국가기관보다 민간 기업의 효율성이나 창의성, 혁신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전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제품을 팔아야 하는 기업의 시각이나 비전이 한 국가 내에 머물러 있는 국가기구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또한 국가의 계획이나 주도 역시, 앞서 논의한 대로, 단임 대통령제나 관료제의 문제로 인해 더 이상 효율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여야한다.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관료 집단은 여전히 규제를 풀지 않으려고 하고 시장에, 민간기업에, 시민사회에 지시하고 명령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한강의 자전거 도로에 문제가 생겨서 이를 해결하려고할 때 그 문제의 해결책은 공무원이 더 잘 알까? 아니면 매일, 매주 자전거를 타고 그 도로를 지나는 시민이 더 잘 알까? 국가 주도의 한계를 깨닫고, 이제 국가는 민간 영역과 시민사회에서 나타나는 혁신과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플랫폼이나 지원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예전처럼 ‘우리가 끌고 가겠다‘는 생각은 시대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않다. - P311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애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십시오."

이 말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실로 크다. 지금까지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가가 중심에 있었다. 우리의 민주화는 독재에 맞서 정치적인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30년이 지나면서, 정치에도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시민사회도 상당히 강건해졌고, 제도적인 민주화도 과거와 비교할 때 튼튼히 확립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모든 정치적인 책임을 국가 권력에 미루고만있는 상황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공동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이 주어진 일정한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인들이 공약을 잘 이행하는지를 감시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 속에서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이제부터라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가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 개인이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위해서 기여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특권이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책임이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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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나 귀족이나 부자나 빈자나 모두 한 표씩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역마다 국회의원 1명을 선출하는 유권자의 수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최대-최소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4대1 이하로 줄이라고 판결했는데 당시 선거구 간 인구 편차는 최대 5.87대1이었다. 최소 선거구인 전남 장흥군 선거구의 인구는 6만 1529 명인데 비해, 부산 해운대구, 기장군 선거구의 인구는 36만 1396 명이었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10월에는 3대1 미만으로, 그리고 2014년 10월에는 그 편차를 2대1까지 줄이라고 판결면서 표의 등가성 문제는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각 정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 비율로 비례대표 의석을 나눴지만 2004년부터 1인 2표제를 도입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고 있다. 이 역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인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역구에서 특정 정당의 후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표는 비례대표 후보 선정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무소속 후보에게 표을 던진 유권자의 표는 비례대표후보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역구에서 특정 후보자에 던진 표가 반드시 그 정당에 대한 지지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정당이 싫지만 사촌형이라든지 가까운 선배라든지 등의 개인적 관계나 후보의 인품이나 역량 때문에 투표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지역구 후보에게 한 표, 지지하는 정당에 한표를 던지는 1인 2표제가 되었다. - P166

300석의 의석을 고정해놓고 비례 의석을 늘린다면 불가피하게 지역구 의석을 그만큼 줄여야 한다. 예컨대 현재의 의석에서 비례 의석을 100석으로 늘린다면 지역구 의석을 53석 줄여야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지역구 의석을 줄이겠다고 선뜻 나설 가능성은 전무하다. 결국 비례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것이 실질적인 대안이다.
의원 수를 늘리자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우리나라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는 다른 민주주의국가들과 비교할 때 많은 편이 아니다.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 규모는 점차 늘어나고있다. 국민 모두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라면 대표자가 대표하는 인구 규모는 작을수록 좋을 것이다.
제헌국회 때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9만6000여 명이었으나 제20대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17만여 명이 넘는다. 제20대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가 제헌국회 때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유신체제나 전두환 정권 때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 더욱이 국가 예산이 500조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국회의 행정부 감시의 중요성도 더욱 커져가고 있다. 결론은 국회의원 수를지금보다 크게 늘려야 한다. - P178

그런데 우리는 이들 집단을 정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은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interest group이거나 보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비정부기구NGO, 압력단체pressure group, 주창자 집단advocacy group 이라고 한다. 이들을 정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당과 구분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권력의 추구 유무다.
이는 정당과 다른 정치 집단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다. 종종 정당을 두고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서‘라고 지적하지만, 권력에 눈이 어두운 곳이 바로 정당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즉 선거에서 공직을 얻음으로써 통치기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정당인 것이다 - P193

-개별 시민들이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진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 훈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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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바로 ‘정치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실제로 정당이 정치 교육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잘 알려진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Ebert,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Naumann 재단 모두 정당 연구소로, 정치 교육, 민주주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재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나 시민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
독일의 정당들은 개별 시민들이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진 및 훈련하는 역할도 한다. 공공 책무를담당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리더를 육성함으로써 국가와 지속적이고 핵심적인 연계를가능하도록 한다. 따라서 독일이나 영국 등 대부분 국가들에서 정치적 리더로 성장한 인물들을 보면 정당 활동을 처음 시작한 연령이 12~13세 정도로 매우 이른 것을 알수있다. 당원으로의 가입도 허용되어 있어, 보통 15세 전후로 많이 등록한다.  - P201

이처럼 독일 등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 참여가 허용되고 있고 정당은 정치에 대한 교육을통해 차기 리더를 만들어내고 있다. 독일 정당법이 말하는대로 정당이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훈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앞서지적한 대로 우리나라 정당법은 위로부터의 통치에 보다주목한다. 그러나 정당의 기능은 그 수준을 넘어 시민을 교육하고 미래 지도자를 육성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법에도 명기하고 있는 정당이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만들어질 수 있는 비결은 이처럼 정당 주도의 정치 교육과활동에 있다.
결국 정당의 핵심 기능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서로 연계해주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거리 시위나 집회, 청와대 국민 청원 등 직접적인 시민 정치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자유로운 의사 표현, 매개체를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국가와 시민의 소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당정치가 제대로 연계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당에 의존하기보다 바로 거리로 나가거나 청와대에 글을 올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03

라팔롬바나LaPalombara와 와이너Weiner는 이른바 위기 이론을 제시한다. 어떤 위기가 생겼을 때 정당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한 세 가지의 위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통성의 위기다. 기존의 권위 구조가 위기와 정치적 격변에 대응하지 못할 때, 그리고 정통성이 파괴되어새로운 체제가 탄생할 때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탈공산화 이후에 동구권에 새로 생긴 정당들과 같이 공산주의 체제가 정통성을 잃게 되었을 때 조직되는 것이다.
둘째, 참여의 위기다. 참여의 위기는 기존의 정당 체제가 새로운 세력의 참여를 수용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위기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국가가 독립을 통해 전 국민이참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되었을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참여의 위기는 체제의 수용 정도에 따라 전혀 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사람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느냐, 못 끌어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체제가 경험하는 위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변화의 요구를 계속해서 유연성 있게 수용해왔다. 이는 보수당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요구가 높아지자 보수당 수상 벤저민 디즈레일리 Benjamin Disraeli는 1867년 도시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참여의 요구를 정치권이 유연하게 수용하면서 영국은 정치적 격변을 거치지 않은 채 체제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셋째, 통합의 위기다. 분열되어 있던 집단이나 지역이상호 결합되는 과정이나 외세로부터 독립한 신생국, 분리주의 집단에서 정당이 출현한다. 캐나다처럼 프랑스어권인 퀘벡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거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퀘벡 블록Bloc Quebecois 과 같은 정당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해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도 정통성, 참여, 통합과 관련한 위기가 1945년 해방과함께 발생한다.  - P211

수 많은 정당들이 해방 공간에 존재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 우파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는 불법화되었고 중도파들과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는 단독선거 반대로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정당정치는 우파 중심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 P218

권위주의 시대의 정당정치에서 집권당은 국가가 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 주도로 위로부터 창당되며, 정치 권력의 정통성을 사후에 인정받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띤다. 이때 정당은 정치적 지지 동원의 도구로, 창당 목적 자체가 독재자개인의 권력을 유지 및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자생력이 부재하고 제도화 또한 결여되어 있기에, 권력자의운명에 따라 권력 몰락 후에 함께 소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의 야당은 정권의 반대 세력을 동원해 권위주의 통치자에 대항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었으며 정치적 투쟁을 위해서는 ‘비의회적‘ 방법을 통해 저항해야만 했다.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거나 국회 등원을 거부하거나, 국회 밖에서의 시위나집회, 심지어 단식 등이 야당이 권위주의 체제의 여당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 P229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주의정당정치가 출연한다. 지역주의 정치에는 분명 역사적 이유가 있는데, 먼저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은 수출 지향정책에 기반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공업화가 이뤄진 것은 수출과 관련된 인프라가 갖춰졌거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인천 등 수도권과 함께 부산, 마산, 창원, 울산, 포항, 대구, 구미 등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고 이 지역에는 근대화, 도시화가 진행된다. 이에 비해 호남 지역은 이러한 혜택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상대적으로불리한 여건에 놓이게 되었다. 지역주의 정치의 한 요인은이러한 경제개발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직후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거세게 터져 나온 지역주의의 원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깊다. 신군부에 의해 가혹한 억압을 받은 광주시민, 그리고 호남 유권자들에게 당시 그것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고통을 겪은 김대중은 지역 주민이 갖고 있는 아픔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민주화와 함께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된 것이다. - P230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김영삼이 3당 합당에 합의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 3당의 공조에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여당이 반대한 법안을 야 3당의 공조로 통과시켰고 심지어 대법원장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야 3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은 정계 개편을통해 국회에서의 다수 의석 확보가 절실했다.
한편 김영삼은 차기 대권과 관련하여 3당 합당이 필요했다. 현재의 4당 구도가 유지된다면 5년 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대중과 경쟁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민주정의당 후보가 또다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다. 4당 구도라면 1987년 선거에서 일어난 일이 5년 뒤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었다. 따라서 김영삼으로서는 민정당과의 합당을통해 이러한 구도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다만 합당 후에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쟁취해야 할 일이었다. 합당 후 김영삼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 말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4당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던 김종필 역시 3당 합당이 나쁘지 않았다. 당시 밀실에서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3당 합당은 여론의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몇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구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 이후의 상황에 적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과 여러모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어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민주화 이후 적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 P233

그러나 탄핵은 엄청난 역풍을 몰고 왔다. 탄핵 이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20퍼센트 수준이었지만, 탄핵에 대해서는 80퍼센트 이상이 반대의 뜻을 표했다.
이러한 와중에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의 쟁점은 단연 탄핵이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이들 중 108명이 초선 의원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정치권에 대거 진입했다. 이 가운데는 학생운동, 사회운동출신자가 50~60명,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간부 출신도12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세력으로서의 진보 정치가 제도권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열린우리당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법 등 이른바 4대개혁 법안은 이념적으로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각종 재보궐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율도 크게 낮아지며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2007년 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2007년 8월 열린우리당은 해산 후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한다. 그러나 이때 정치권에 들어온 새로운 정치 세력은 열린우리당이 사라진뒤에도 오늘날까지 정치권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때부터 민주당의 이념적 성격은 변모하며 우리나라의 정당정치는 이념적인 지형으로 재편된다.
이념이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2002년 노무현의 등장, 그리고 특히 2004년 열린우리당의 성공과 관련이 깊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도 열린우리당을 통해 ‘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진보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 P240

정당의 약화, 리더십의 약화와 함께 최근들어 나타나는현상은 정치적 국외자가 정당을 우회하여 정치 지도자로부상한다는 것이다. 정당이 리더를 제대로 만들어내지도못하고, 그러한 약한 리더십하에서 정당들 간 타협과 합의도 도출해내지 못하면서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치적 경험이 일천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이 대중매체의 출현이나 다른 비정치적 활동을 통해 인기를 높이고 그러한 인기가 여론조사에 반영되면서 일약 유력한 정치 지도자군으로 떠오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를 꼭 정치인들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문제는 이들의 정치력이나 정책 능력, 리더십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그러한 능력이나 덕성에 대해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이미지‘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유력한 리더로 떠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실 정치라는 업은 매우 전문역량을 필요로 한다. 정치는 매우 전문화된 형태의 직업으로 많은 경험을 쌓고 소통과 공감의 역량도 갖춰야 한다. 또한 정치에서 타협이나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는 필수적인 요건이며 반대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도 갖춰야 한다.
이처럼 전문적인 역량을 가져야 하는 정치에서 경험이없다는 것이 오히려 참신함으로 평가받는 것은 옳지 않다. - P246

정당이 약화되었을 때의 또 다른 현상은 바로 촛불집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로의 움직임이다. 물론 평화적인 촛불집회는 우리 시민의 성숙한 민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이슈가 생길 때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는 일은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대의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함으로써 정당을 통해 제도권 내에서 차분하고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로 해결하는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 P248

 1945년이나 1948년에 과연 한국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알았을까? 지식인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이야 알 수 있었겠지만 이제 막 식민지배에서 벗어났고 여전히 봉건적 문화가 지배적인 당시에 대다수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낯선 제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10여 년이 지난 4월 혁명 때 사람들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소련과의 이념, 체제 경쟁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군정은 당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때 공민public 이라는 개념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도 정치학과가 해방 직후부터 설립되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1946년 문리과대학에 정치학과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교육 기관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에 접하게 되었다. 4.19 혁명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교수, 언론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민주화 운동이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시민들이 4·19 혁명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육의 힘 덕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지 않는현실에 시민들은 분노했고, 부정한 권력에 대해 저항했다.
4·19 혁명의 성공은 이후 중요한 정치적 유산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4·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의 사건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이제는 시골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라님‘ 이라도 법을 지키지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낯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4·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 점차 내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 첫 문장에 3·1 운동과 더불어 4.19 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4·19 혁명이 지닌역사적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이후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정권의 억압하에서도 국민들이 끊임없이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바로 4·19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 P273

김재규의 후임으로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희성이12-12 군사 반란 이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옮기면서 전두환은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까지차지한다. 합동수사본부장과 달리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 등에도 참석할 수 있었으며 특히 수많은 예산의 집행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동수사본부장보다 상급직이었던 중앙정보부장에 다른 사람이 오게 됨으로써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에 대한 견제도 막을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에 민간인을 임명해야 한다고 한 신현학 국무총리의 제언과 달리 전두환을 선택한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결국 전두환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고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를 통해 모든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P278

 또한 총선 1년 후인 1986년 2월부터 돌입한 직선제 개헌 운동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중요한 의제를 사회에 던진다.
이때의 민주화 운동이 4.19 혁명과 10.26 사태와 달랐던 점 중 하나는 바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정치적 의제가 설정된 것이다. 4·19 혁명과 10·26 사태 때는 이승만 정권과 유신 정권의 타도라는 제한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즉 권력의 타도 이후에 나아가야할 정치적 방향이 그때는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의제가 대안 정치 세력에의해 제시되었고 이에 대한 지지를 규합할 대규모 서명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서명 운동으로 개헌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요구가 거세져가자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4월 30일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개헌 논의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여야는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반면, 학생들을 비롯한 노동운동이나 재야 세력들은 보다 큰 사회 경제적 변화를 원했다. - P285

신한민주당이 이끄는 직선제 개헌 운동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1988년 올림픽 이전까지 개헌에 관한 모든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출하겠다는 내용의4·13 호헌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 발언은 전두환 정권에대한 시민적 저항에 더욱 불을 지폈고, 지금까지 이를 관망만 하고 있던 중산층이나 온건한 시민들의 민심까지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호헌 철폐와 맞물려 직선제 개헌요구는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된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축소 모의를 폭로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은 더욱더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 P287

민주화 제3의 물결을 말했던 헌팅턴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게 주어진 매우 어려운 과제로 고문관의 문제torturer problem와 집정관의 문제praetorian problem 두 가지를 제시한바 있다.
고문관의 문제는 이전 권위주의 체제에서 나를, 혹은 내가족이나 친구를 고문하거나 괴롭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전 정권에서 ‘나쁜 짓‘을 저지른이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친일파 청산처럼 과거사 처리는 적정한 시기에 해결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사회를 괴롭히는 주된 문제가 된다. - P299

집정관praetorian guard 은 로마제국 황제의 호위대를 말한다.
즉 집정관의 문제는 과거 정치에 깊이 개입했던 군부를 어떻게 탈정치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쉽지않은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모두 해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첫 문민 대통령으로서 취임 직후 신임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지지도가높은 시점에 군 개혁을 단행했다. 취임 후 채 보름이 되지않은 1993년 3월 8일 군 최고위급 인사를 단행했다.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했고,4월 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을 보직 해임했다.
이들은 모두 전두환 등 육사 11기 일부가 주축되어 만든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핵심들이었다. 신생 대통령에 대한 정통성과 기대감이 가장 높은 시기에 강한 결단력을 통해 단행한 결과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급격히 치솟았다.
다음으로 하나회를 척결했다. 우리나라의 군부 지배는하나의 특성이 있는데, 바로 군 전체의 지배가 아니라 파벌의 지배라는 것이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는 일부 파벌에의해서 그 권력을 누렸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회다. 하나회의 실체는 1993년 4월 2일 하나회 명단이 용산구 군인 아파트에 뿌려지면서 공개되는데, 이로써 이들의 숙청이 본격화되었다.
신군부하에서 승진과 보직에서 혜택을 보았던 하나회군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동안 소외받았던 장교들이 차지하며, 민주화 이후의 새 체제에 대한 군의 충성심은 훨씬 더 강해진다. 이와 함께 한국 정치에 오랫동안 개입해온군의 탈정치화가 이뤄졌고 헌팅턴이 말한 집정관 문제도상당히 해결되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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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에서는 사람들과 창문의 관계도 변했다. 창문은 가장 죽음이 찾아오기 쉬운 공간과의 경계였다. 창문은 가장 약한 총탄 세례도 막을 수 없었고, 바깥이 보이는 실내의어떤 지점이라도 총탄이 오가는 잠재적 교전 지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리창은 인근의 포화로 인해 너무도 쉽게 파편이 되어서, 모두가 한 번쯤은 날아오는 유리 조각에 베어 피를 흘린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많은 창문이 이미 부서졌고 남은 창문도 없애는 편이 신중한 처사였지만, 겨울이라 밤은 추웠고 가스와 전기 공급이 점점 줄어들어서 사람들은 냉기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하는 창문을 그대로 두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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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취재한 기자 중 한 명은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두고 "거대하고 신나는 모험"이라고 했다. 그 일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그 뒤로 유력 대선 후보가 그렇게 열정적이거나 무모하게 출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늘어나고미국 정치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정치컨설턴트 · 여론조사원 · 해설가 · 질문검열원이라는 보호막을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에서는 사용하지않았다. 존 에드워즈(2004년과 2008년 대선에 출마한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옮긴이)를 제외하면 어떤 후보도 그만큼 빈곤 문제를 대선 쟁점으로 삼지도, 소수인종과 가난한 유권자를 들뜨게 하지도, 백인 노동자와 흑인 모두에게 신뢰를 받지도, 노골적으로 유권자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로버트케네디 같은 주류 정치인이 <뉴욕타임스> 칼럼에 "한때 미국인은 제퍼슨과 함께 우리가 전 인류의 ‘가장 위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와 권력에만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글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미트더프레스 Meet the Press> 같은 인기 방송프로그램에나와 "우리 사회가 불만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만이 있습니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민감한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그런 비판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일 수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마치 서서히 진행되는 자살 같았기때문이고,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은 단순히 또 한 명의 케네디가 죽은 것이아니라, 항상 준비된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등장을 의미했고, 파란색주와 빨간색 주로 나뉘는 정치판을 의미했으며, (르윈스키 성 추문 때 빌 클린턴의) 말돌리기나,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무력을 자랑하며 했던 것처럼) 대통령의입에서 "다 덤비라고 해!" 같은 발언이 나오는 정치판을 의미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신중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82일은 로버트 케네디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케네디의 라이벌인 미네소타주 출신 유진 매카시의원의 선거 캠프에서 일한 작가 윌프리드 쉬드는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그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보여줬고, 뒤이은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집중하게 된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선거운동 기간 중 케네디는 자신의 본성과 그런 본성에 대한 주위 사람의 불만을 뛰어넘어 정말 위대한인물로 거듭났다"고 덧붙였다. - P34

바비 케네디는 1950년대에 몇몇 상원위원회에서 일하고 1960년대에는 케네디 정부의 법무부 장관 겸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부의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불륜과, 미국이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진 쿠데타에 관여한 사실에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마피아와 결탁한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조사하고 심문했으며, CIA의 피델 카스트로 암살 시도를 승인하고 부추겼을 뿐 아니라, 마틴 루서 킹의 밑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해 전화 도청을 승인했으며, 킹 목사를 위협하고 킹 목사의뢰를 떨어뜨리려는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활동에 눈감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런 모든 일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 후보보다 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형 케네디에 이어 또 한 명의 케네디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촉발될 증오와 감당해야 할 위험을 분명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출마했다.
출마 당시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의원으로 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960년 대통령에 오른 존 F. 케네디보다 더 준비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법무부 장관직을 일부에서 역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할정도로 훌륭하게 수행했고, 일종의 대통령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쿠바침공의 실패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CIA를 감독하고 소련 외교관과의 비밀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댈러스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에는 더 신중하고 세심해졌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과정에서 했던 역할과 케네디 대통령이 린든 존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데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로버트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한 행동, 예컨대 피델 카스트로 제거에 대한 집착이나 조직 폭력배와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만든 일이 자기 형의 암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 P36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바비 케네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라크 전쟁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이미 오래전에 해야 했습니다. 물론 전쟁 수행에 돈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 중 가장 적은 겁니다. 우리가 잃는것은 미국의 젊은이입니다. 수만 명의 인생이 영원히 끝나버립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세계 속에서의 지위입니다. 중립국이나 동맹국 할 것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정책으로 다른 나라를 당황하게 하고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관용과 연민이 없습니다. 희생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우리 국민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미룰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동맹이라는 것은 이름뿐입니다. 미국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정부입니다."
"신문 1면에 미군이 포로를 고문하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 P38

1장
불가피한 선택
1968년 3월 16~17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두 달 뒤 로버트 케네디는 아시아를방문했다. 애초에 케네디 대통령을 위해 계획된 일정에 대신 참석한 것이다. 순방 중 케네디는 필리핀에 있는 학교를 방문했는데, 여학생들이케네디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CBS 방송 카메라맨 월터 돔브로우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에서 나오는 동안, 케네디는 주먹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두 뺨에 눈물을 흘렸다. 고개도 저었는데 돔브로우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마침내 케네디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형이 왔더라면 아이들이 더 좋아했을 텐데요."
톰브로우는 케네디를 껴안으며 말했다.
"밥,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일을 이어가야죠."
그 말을 듣고 30초간 정면을 응시하던 케네디는 돔브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돔브로우는 바로 그 순간 바비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란 사실과,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깨달았다. - P44

다음 날 아침 <미트더프레스>에 출연한 바비는 존슨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면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케네디는 질문을회피하거나 당연히 자신이 경선에서 이길 생각이라고 말하며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경선 과정을 좌지우지하고 당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민주당의 지도부를 화나게 할 것이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존슨이 지금 같은 정책을 계속한다면, 지지를 "심각하게 망설일 것이라면서 자신은 "당에 충실하겠지만 당보다 미국과 인류전체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출마 선언을 한 주말 내내 케네디와 보좌관들은 민주당 소속 의원과 주지사, 당 지도부에 전화를 걸었다. 지지의사를 밝히거나 당장 못하겠다면 적어도 케네디가 예비선거 몇 곳에서 이길 때까지는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도 보류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케네디의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민주당 내 진보진영은 로버트 케네디와 유진 매카시가 반전 운동세력을 분열시킬 것을 우려했고, 보수파와 중도파는 케네디가 당을 분열시켜 닉슨에게 백악관을 내어줄 것을 우려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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