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취재한 기자 중 한 명은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두고 "거대하고 신나는 모험"이라고 했다. 그 일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일 수 있다. 그 뒤로 유력 대선 후보가 그렇게 열정적이거나 무모하게 출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늘어나고미국 정치에서 일상이 되어버린 정치컨설턴트 · 여론조사원 · 해설가 · 질문검열원이라는 보호막을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에서는 사용하지않았다. 존 에드워즈(2004년과 2008년 대선에 출마한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옮긴이)를 제외하면 어떤 후보도 그만큼 빈곤 문제를 대선 쟁점으로 삼지도, 소수인종과 가난한 유권자를 들뜨게 하지도, 백인 노동자와 흑인 모두에게 신뢰를 받지도, 노골적으로 유권자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로버트케네디 같은 주류 정치인이 <뉴욕타임스> 칼럼에 "한때 미국인은 제퍼슨과 함께 우리가 전 인류의 ‘가장 위대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와 권력에만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글을 썼다고 상상해보라. 혹은 <미트더프레스 Meet the Press> 같은 인기 방송프로그램에나와 "우리 사회가 불만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만이 있습니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민감한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그런 비판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일 수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마치 서서히 진행되는 자살 같았기때문이고,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 암살은 단순히 또 한 명의 케네디가 죽은 것이아니라, 항상 준비된 발언을 하는 정치인의 등장을 의미했고, 파란색주와 빨간색 주로 나뉘는 정치판을 의미했으며, (르윈스키 성 추문 때 빌 클린턴의) 말돌리기나,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무력을 자랑하며 했던 것처럼) 대통령의입에서 "다 덤비라고 해!" 같은 발언이 나오는 정치판을 의미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을 되돌아보는 것은 신중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82일은 로버트 케네디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경선에서 케네디의 라이벌인 미네소타주 출신 유진 매카시의원의 선거 캠프에서 일한 작가 윌프리드 쉬드는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그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보여줬고, 뒤이은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집중하게 된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선거운동 기간 중 케네디는 자신의 본성과 그런 본성에 대한 주위 사람의 불만을 뛰어넘어 정말 위대한인물로 거듭났다"고 덧붙였다. - P34
바비 케네디는 1950년대에 몇몇 상원위원회에서 일하고 1960년대에는 케네디 정부의 법무부 장관 겸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부의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불륜과, 미국이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진 쿠데타에 관여한 사실에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마피아와 결탁한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조사하고 심문했으며, CIA의 피델 카스트로 암살 시도를 승인하고 부추겼을 뿐 아니라, 마틴 루서 킹의 밑에서 일하는 두 사람을 공산주의자라고 오해해 전화 도청을 승인했으며, 킹 목사를 위협하고 킹 목사의뢰를 떨어뜨리려는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활동에 눈감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런 모든 일을 알았기 때문에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 후보보다 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고, 형 케네디에 이어 또 한 명의 케네디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촉발될 증오와 감당해야 할 위험을 분명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출마했다. 출마 당시 로버트 케네디는 상원의원으로 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960년 대통령에 오른 존 F. 케네디보다 더 준비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법무부 장관직을 일부에서 역사상 최고였다고 평가할정도로 훌륭하게 수행했고, 일종의 대통령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쿠바침공의 실패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CIA를 감독하고 소련 외교관과의 비밀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댈러스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에는 더 신중하고 세심해졌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과정에서 했던 역할과 케네디 대통령이 린든 존슨을 부통령으로 지명한 데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로버트 케네디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한 행동, 예컨대 피델 카스트로 제거에 대한 집착이나 조직 폭력배와 부패한 노조 지도자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만든 일이 자기 형의 암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 P36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바비 케네디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라크 전쟁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을 이미 오래전에 해야 했습니다. 물론 전쟁 수행에 돈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돈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 중 가장 적은 겁니다. 우리가 잃는것은 미국의 젊은이입니다. 수만 명의 인생이 영원히 끝나버립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세계 속에서의 지위입니다. 중립국이나 동맹국 할 것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정책으로 다른 나라를 당황하게 하고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관용과 연민이 없습니다. 희생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십억 달러를 쓰면서 우리 국민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미룰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동맹이라는 것은 이름뿐입니다. 미국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정부입니다." "신문 1면에 미군이 포로를 고문하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 P38
1장 불가피한 선택 1968년 3월 16~17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두 달 뒤 로버트 케네디는 아시아를방문했다. 애초에 케네디 대통령을 위해 계획된 일정에 대신 참석한 것이다. 순방 중 케네디는 필리핀에 있는 학교를 방문했는데, 여학생들이케네디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CBS 방송 카메라맨 월터 돔브로우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에서 나오는 동안, 케네디는 주먹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쥐고 두 뺨에 눈물을 흘렸다. 고개도 저었는데 돔브로우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마침내 케네디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형이 왔더라면 아이들이 더 좋아했을 텐데요." 톰브로우는 케네디를 껴안으며 말했다. "밥,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일을 이어가야죠." 그 말을 듣고 30초간 정면을 응시하던 케네디는 돔브로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돔브로우는 바로 그 순간 바비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란 사실과, 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깨달았다. - P44
다음 날 아침 <미트더프레스>에 출연한 바비는 존슨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면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케네디는 질문을회피하거나 당연히 자신이 경선에서 이길 생각이라고 말하며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경선 과정을 좌지우지하고 당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민주당의 지도부를 화나게 할 것이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존슨이 지금 같은 정책을 계속한다면, 지지를 "심각하게 망설일 것이라면서 자신은 "당에 충실하겠지만 당보다 미국과 인류전체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출마 선언을 한 주말 내내 케네디와 보좌관들은 민주당 소속 의원과 주지사, 당 지도부에 전화를 걸었다. 지지의사를 밝히거나 당장 못하겠다면 적어도 케네디가 예비선거 몇 곳에서 이길 때까지는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도 보류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케네디의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민주당 내 진보진영은 로버트 케네디와 유진 매카시가 반전 운동세력을 분열시킬 것을 우려했고, 보수파와 중도파는 케네디가 당을 분열시켜 닉슨에게 백악관을 내어줄 것을 우려했다. - P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