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이나 귀족이나 부자나 빈자나 모두 한 표씩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역마다 국회의원 1명을 선출하는 유권자의 수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 최대-최소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4대1 이하로 줄이라고 판결했는데 당시 선거구 간 인구 편차는 최대 5.87대1이었다. 최소 선거구인 전남 장흥군 선거구의 인구는 6만 1529 명인데 비해, 부산 해운대구, 기장군 선거구의 인구는 36만 1396 명이었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10월에는 3대1 미만으로, 그리고 2014년 10월에는 그 편차를 2대1까지 줄이라고 판결면서 표의 등가성 문제는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과거에는 각 정당이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 비율로 비례대표 의석을 나눴지만 2004년부터 1인 2표제를 도입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고 있다. 이 역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인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역구에서 특정 정당의 후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표는 비례대표 후보 선정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무소속 후보에게 표을 던진 유권자의 표는 비례대표후보 선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역구에서 특정 후보자에 던진 표가 반드시 그 정당에 대한 지지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정당이 싫지만 사촌형이라든지 가까운 선배라든지 등의 개인적 관계나 후보의 인품이나 역량 때문에 투표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지역구 후보에게 한 표, 지지하는 정당에 한표를 던지는 1인 2표제가 되었다. - P166
300석의 의석을 고정해놓고 비례 의석을 늘린다면 불가피하게 지역구 의석을 그만큼 줄여야 한다. 예컨대 현재의 의석에서 비례 의석을 100석으로 늘린다면 지역구 의석을 53석 줄여야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지역구 의석을 줄이겠다고 선뜻 나설 가능성은 전무하다. 결국 비례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것이 실질적인 대안이다. 의원 수를 늘리자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우리나라 인구 대비 국회의원 수는 다른 민주주의국가들과 비교할 때 많은 편이 아니다.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 규모는 점차 늘어나고있다. 국민 모두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이상적인 형태라면 대표자가 대표하는 인구 규모는 작을수록 좋을 것이다. 제헌국회 때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9만6000여 명이었으나 제20대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수는 17만여 명이 넘는다. 제20대 국회의원 1명이 대표하는 인구가 제헌국회 때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유신체제나 전두환 정권 때보다도 훨씬 많은 수치다. 더욱이 국가 예산이 500조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국회의 행정부 감시의 중요성도 더욱 커져가고 있다. 결론은 국회의원 수를지금보다 크게 늘려야 한다. - P178
그런데 우리는 이들 집단을 정당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은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interest group이거나 보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비정부기구NGO, 압력단체pressure group, 주창자 집단advocacy group 이라고 한다. 이들을 정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당과 구분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권력의 추구 유무다. 이는 정당과 다른 정치 집단들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다. 종종 정당을 두고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서‘라고 지적하지만, 권력에 눈이 어두운 곳이 바로 정당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즉 선거에서 공직을 얻음으로써 통치기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정당인 것이다 - P193
-개별 시민들이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진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 훈련시킨다. •••••• 여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바로 ‘정치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실제로 정당이 정치 교육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잘 알려진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Ebert,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Naumann 재단 모두 정당 연구소로, 정치 교육, 민주주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재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나 시민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 독일의 정당들은 개별 시민들이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진 및 훈련하는 역할도 한다. 공공 책무를담당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리더를 육성함으로써 국가와 지속적이고 핵심적인 연계를가능하도록 한다. 따라서 독일이나 영국 등 대부분 국가들에서 정치적 리더로 성장한 인물들을 보면 정당 활동을 처음 시작한 연령이 12~13세 정도로 매우 이른 것을 알수있다. 당원으로의 가입도 허용되어 있어, 보통 15세 전후로 많이 등록한다. - P201
이처럼 독일 등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 참여가 허용되고 있고 정당은 정치에 대한 교육을통해 차기 리더를 만들어내고 있다. 독일 정당법이 말하는대로 정당이 "역량 있는 사람들이 공공 책무를 담당하도록훈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앞서지적한 대로 우리나라 정당법은 위로부터의 통치에 보다주목한다. 그러나 정당의 기능은 그 수준을 넘어 시민을 교육하고 미래 지도자를 육성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법에도 명기하고 있는 정당이 "국민의 자발적 조직"으로만들어질 수 있는 비결은 이처럼 정당 주도의 정치 교육과활동에 있다. 결국 정당의 핵심 기능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서로 연계해주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거리 시위나 집회, 청와대 국민 청원 등 직접적인 시민 정치 참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자유로운 의사 표현, 매개체를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국가와 시민의 소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당정치가 제대로 연계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당에 의존하기보다 바로 거리로 나가거나 청와대에 글을 올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03
라팔롬바나LaPalombara와 와이너Weiner는 이른바 위기 이론을 제시한다. 어떤 위기가 생겼을 때 정당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한 세 가지의 위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통성의 위기다. 기존의 권위 구조가 위기와 정치적 격변에 대응하지 못할 때, 그리고 정통성이 파괴되어새로운 체제가 탄생할 때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탈공산화 이후에 동구권에 새로 생긴 정당들과 같이 공산주의 체제가 정통성을 잃게 되었을 때 조직되는 것이다. 둘째, 참여의 위기다. 참여의 위기는 기존의 정당 체제가 새로운 세력의 참여를 수용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위기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국가가 독립을 통해 전 국민이참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되었을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참여의 위기는 체제의 수용 정도에 따라 전혀 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즉 사람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느냐, 못 끌어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체제가 경험하는 위기는 달라지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에서는 변화의 요구를 계속해서 유연성 있게 수용해왔다. 이는 보수당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요구가 높아지자 보수당 수상 벤저민 디즈레일리 Benjamin Disraeli는 1867년 도시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참여의 요구를 정치권이 유연하게 수용하면서 영국은 정치적 격변을 거치지 않은 채 체제를 유지해올 수 있었다. 셋째, 통합의 위기다. 분열되어 있던 집단이나 지역이상호 결합되는 과정이나 외세로부터 독립한 신생국, 분리주의 집단에서 정당이 출현한다. 캐나다처럼 프랑스어권인 퀘벡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하거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퀘벡 블록Bloc Quebecois 과 같은 정당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해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도 정통성, 참여, 통합과 관련한 위기가 1945년 해방과함께 발생한다. - P211
수 많은 정당들이 해방 공간에 존재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 우파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는 불법화되었고 중도파들과 김구 등 민족주의 우파는 단독선거 반대로 제헌국회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정당정치는 우파 중심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 P218
권위주의 시대의 정당정치에서 집권당은 국가가 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 주도로 위로부터 창당되며, 정치 권력의 정통성을 사후에 인정받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띤다. 이때 정당은 정치적 지지 동원의 도구로, 창당 목적 자체가 독재자개인의 권력을 유지 및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자생력이 부재하고 제도화 또한 결여되어 있기에, 권력자의운명에 따라 권력 몰락 후에 함께 소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의 야당은 정권의 반대 세력을 동원해 권위주의 통치자에 대항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었으며 정치적 투쟁을 위해서는 ‘비의회적‘ 방법을 통해 저항해야만 했다.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거나 국회 등원을 거부하거나, 국회 밖에서의 시위나집회, 심지어 단식 등이 야당이 권위주의 체제의 여당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 P229
민주화 이후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주의정당정치가 출연한다. 지역주의 정치에는 분명 역사적 이유가 있는데, 먼저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은 수출 지향정책에 기반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공업화가 이뤄진 것은 수출과 관련된 인프라가 갖춰졌거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인천 등 수도권과 함께 부산, 마산, 창원, 울산, 포항, 대구, 구미 등에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되고 이 지역에는 근대화, 도시화가 진행된다. 이에 비해 호남 지역은 이러한 혜택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상대적으로불리한 여건에 놓이게 되었다. 지역주의 정치의 한 요인은이러한 경제개발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직후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거세게 터져 나온 지역주의의 원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깊다. 신군부에 의해 가혹한 억압을 받은 광주시민, 그리고 호남 유권자들에게 당시 그것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고통을 겪은 김대중은 지역 주민이 갖고 있는 아픔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민주화와 함께 정치적 공간이 열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된 것이다. - P230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김영삼이 3당 합당에 합의할 수 있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 3당의 공조에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여당이 반대한 법안을 야 3당의 공조로 통과시켰고 심지어 대법원장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야 3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노태우 대통령은 정계 개편을통해 국회에서의 다수 의석 확보가 절실했다. 한편 김영삼은 차기 대권과 관련하여 3당 합당이 필요했다. 현재의 4당 구도가 유지된다면 5년 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대중과 경쟁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민주정의당 후보가 또다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다. 4당 구도라면 1987년 선거에서 일어난 일이 5년 뒤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이었다. 따라서 김영삼으로서는 민정당과의 합당을통해 이러한 구도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다만 합당 후에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쟁취해야 할 일이었다. 합당 후 김영삼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 말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4당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던 김종필 역시 3당 합당이 나쁘지 않았다. 당시 밀실에서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3당 합당은 여론의 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몇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구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 이후의 상황에 적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과 여러모로 자신을 차별화하고 싶어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민주화 이후 적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 P233
그러나 탄핵은 엄청난 역풍을 몰고 왔다. 탄핵 이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20퍼센트 수준이었지만, 탄핵에 대해서는 80퍼센트 이상이 반대의 뜻을 표했다. 이러한 와중에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의 쟁점은 단연 탄핵이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이들 중 108명이 초선 의원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정치권에 대거 진입했다. 이 가운데는 학생운동, 사회운동출신자가 50~60명,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간부 출신도12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세력으로서의 진보 정치가 제도권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열린우리당이 주도한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과거사법 등 이른바 4대개혁 법안은 이념적으로 큰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각종 재보궐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율도 크게 낮아지며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2007년 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2007년 8월 열린우리당은 해산 후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한다. 그러나 이때 정치권에 들어온 새로운 정치 세력은 열린우리당이 사라진뒤에도 오늘날까지 정치권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때부터 민주당의 이념적 성격은 변모하며 우리나라의 정당정치는 이념적인 지형으로 재편된다. 이념이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2002년 노무현의 등장, 그리고 특히 2004년 열린우리당의 성공과 관련이 깊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더라도 열린우리당을 통해 ‘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진보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그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 P240
정당의 약화, 리더십의 약화와 함께 최근들어 나타나는현상은 정치적 국외자가 정당을 우회하여 정치 지도자로부상한다는 것이다. 정당이 리더를 제대로 만들어내지도못하고, 그러한 약한 리더십하에서 정당들 간 타협과 합의도 도출해내지 못하면서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치적 경험이 일천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이 대중매체의 출현이나 다른 비정치적 활동을 통해 인기를 높이고 그러한 인기가 여론조사에 반영되면서 일약 유력한 정치 지도자군으로 떠오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를 꼭 정치인들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문제는 이들의 정치력이나 정책 능력, 리더십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그러한 능력이나 덕성에 대해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이미지‘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유력한 리더로 떠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실 정치라는 업은 매우 전문역량을 필요로 한다. 정치는 매우 전문화된 형태의 직업으로 많은 경험을 쌓고 소통과 공감의 역량도 갖춰야 한다. 또한 정치에서 타협이나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는 필수적인 요건이며 반대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도 갖춰야 한다. 이처럼 전문적인 역량을 가져야 하는 정치에서 경험이없다는 것이 오히려 참신함으로 평가받는 것은 옳지 않다. - P246
정당이 약화되었을 때의 또 다른 현상은 바로 촛불집회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로의 움직임이다. 물론 평화적인 촛불집회는 우리 시민의 성숙한 민주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이슈가 생길 때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는 일은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대의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함으로써 정당을 통해 제도권 내에서 차분하고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로 해결하는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 P248
1945년이나 1948년에 과연 한국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알았을까? 지식인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이야 알 수 있었겠지만 이제 막 식민지배에서 벗어났고 여전히 봉건적 문화가 지배적인 당시에 대다수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낯선 제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10여 년이 지난 4월 혁명 때 사람들은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소련과의 이념, 체제 경쟁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군정은 당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 교육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때 공민public 이라는 개념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도 정치학과가 해방 직후부터 설립되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1946년 문리과대학에 정치학과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교육 기관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에 접하게 되었다. 4.19 혁명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교수, 언론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민주화 운동이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시민들이 4·19 혁명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육의 힘 덕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지 않는현실에 시민들은 분노했고, 부정한 권력에 대해 저항했다. 4·19 혁명의 성공은 이후 중요한 정치적 유산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4·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의 사건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면서 이제는 시골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나라님‘ 이라도 법을 지키지않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낯선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4·19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안에 점차 내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 첫 문장에 3·1 운동과 더불어 4.19 혁명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4·19 혁명이 지닌역사적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이후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정권의 억압하에서도 국민들이 끊임없이 저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바로 4·19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 P273
김재규의 후임으로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이희성이12-12 군사 반란 이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옮기면서 전두환은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까지차지한다. 합동수사본부장과 달리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 등에도 참석할 수 있었으며 특히 수많은 예산의 집행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합동수사본부장보다 상급직이었던 중앙정보부장에 다른 사람이 오게 됨으로써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에 대한 견제도 막을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에 민간인을 임명해야 한다고 한 신현학 국무총리의 제언과 달리 전두환을 선택한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결국 전두환은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고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라는 쿠데타를 통해 모든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P278
또한 총선 1년 후인 1986년 2월부터 돌입한 직선제 개헌 운동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중요한 의제를 사회에 던진다. 이때의 민주화 운동이 4.19 혁명과 10.26 사태와 달랐던 점 중 하나는 바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정치적 의제가 설정된 것이다. 4·19 혁명과 10·26 사태 때는 이승만 정권과 유신 정권의 타도라는 제한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즉 권력의 타도 이후에 나아가야할 정치적 방향이 그때는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의제가 대안 정치 세력에의해 제시되었고 이에 대한 지지를 규합할 대규모 서명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서명 운동으로 개헌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요구가 거세져가자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4월 30일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개헌 논의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여야는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김영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반면, 학생들을 비롯한 노동운동이나 재야 세력들은 보다 큰 사회 경제적 변화를 원했다. - P285
신한민주당이 이끄는 직선제 개헌 운동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1988년 올림픽 이전까지 개헌에 관한 모든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현행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출하겠다는 내용의4·13 호헌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 발언은 전두환 정권에대한 시민적 저항에 더욱 불을 지폈고, 지금까지 이를 관망만 하고 있던 중산층이나 온건한 시민들의 민심까지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호헌 철폐와 맞물려 직선제 개헌요구는 더욱 무게가 실리게 된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축소 모의를 폭로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은 더욱더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 P287
민주화 제3의 물결을 말했던 헌팅턴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게 주어진 매우 어려운 과제로 고문관의 문제torturer problem와 집정관의 문제praetorian problem 두 가지를 제시한바 있다. 고문관의 문제는 이전 권위주의 체제에서 나를, 혹은 내가족이나 친구를 고문하거나 괴롭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전 정권에서 ‘나쁜 짓‘을 저지른이들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친일파 청산처럼 과거사 처리는 적정한 시기에 해결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사회를 괴롭히는 주된 문제가 된다. - P299
집정관praetorian guard 은 로마제국 황제의 호위대를 말한다. 즉 집정관의 문제는 과거 정치에 깊이 개입했던 군부를 어떻게 탈정치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쉽지않은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 시기에 모두 해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첫 문민 대통령으로서 취임 직후 신임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지지도가높은 시점에 군 개혁을 단행했다. 취임 후 채 보름이 되지않은 1993년 3월 8일 군 최고위급 인사를 단행했다. 김진영 육군 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했고,4월 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을 보직 해임했다. 이들은 모두 전두환 등 육사 11기 일부가 주축되어 만든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핵심들이었다. 신생 대통령에 대한 정통성과 기대감이 가장 높은 시기에 강한 결단력을 통해 단행한 결과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급격히 치솟았다. 다음으로 하나회를 척결했다. 우리나라의 군부 지배는하나의 특성이 있는데, 바로 군 전체의 지배가 아니라 파벌의 지배라는 것이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는 일부 파벌에의해서 그 권력을 누렸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회다. 하나회의 실체는 1993년 4월 2일 하나회 명단이 용산구 군인 아파트에 뿌려지면서 공개되는데, 이로써 이들의 숙청이 본격화되었다. 신군부하에서 승진과 보직에서 혜택을 보았던 하나회군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그동안 소외받았던 장교들이 차지하며, 민주화 이후의 새 체제에 대한 군의 충성심은 훨씬 더 강해진다. 이와 함께 한국 정치에 오랫동안 개입해온군의 탈정치화가 이뤄졌고 헌팅턴이 말한 집정관 문제도상당히 해결되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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