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주던 즈음- 머린에서는 계절이 때로는 한나절 남짓만 머물다가 재킷을 벗거나 스웨터를 걸치는 잠깐 사이에 변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서로 거의 교류가 없는 이런 상태를 맴돌았고, 따스한 봄날이 시원한 여름날에 자리를 내줄 때도 이런 상태를 맴돌았다. 두 사람 모두 전 연인의 새로운 존재를 온라인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소셜미디어에서는 서로 거리를 유지했다. 서로를 보살피고 주시하고 싶어 했지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불편하게 상기시켰기에 연락을 유지하는 일이 버거웠고, 서로를 덜 염려하게 되었으며, 상대방의 행복에 자신이 필요하리라는 걱정을 덜 하게 되었고, 결국 그렇게 연락 없이 한 달이, 또 1년이, 그리고 평생이 지나갔다. - P244

그들은 커피를 다 마셨다. 나디아는 사이드가 칠레의 사막에 가서 별들을 보았는지, 그 별들이 그가 상상했던 것과 같았는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저녁 그녀가 시간이 난다면 데려가겠노라고, 이번 생에 한 번쯤 볼 가치가 있지, 라고 말했고, 그녀는 눈을 감고 그거 좋지, 라고 답했으며, 그들은 일어서서 포옹을 하고 헤어졌고, 그런 저녁이 언젠가 올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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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입안자의 입장에서는 빈민을 두 집단으로 나눠야 했다.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아닌 자였다.
이때 정책 입안자는 다른 집단도 아닌 다수의 빈민층에게서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회과학에서 ‘밑바닥 혐오 last-place aversion‘라고 부르는 현상 덕분이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빈곤은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으므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든 빈곤충으로 묶이길 거부하며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과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분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빈민끼리 연대하기가 힘들고, 이른바 자격 있는 집단과 아닌 집단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 - P89

많은 이들에게 가난이라는 수치심은 물질적 고통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이나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달러는 기록할 수 있어도 감정은 그럴 수 없다. 감정은 형체가 없고 주관적이어서 종종 무시된다. 그러다 보니 복지정책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엔진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 P92

문제를 숨기는 방식을 ‘회피withdraewal‘라고 한다. 한동안 못 본친구에게 연락해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친구에게 돈이 없고 미납 고지서가 쌓였으며 빚이 많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었다. 친구는 지금 내 상황이 이렇다고 털어놓을까? 대개는 말하지 않는다. 작가 닐 개블러가 시사 잡지 디 아틀란틱The Atlantic에 썼듯이, 이 경우 남성들은 카드빚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비아그라 효과를 얘기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발기부전보다 가난을 훨씬 더 부끄러워할 것이다. 당신이 연락한 친구는 개인의 재정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를 들어 약속을 거절할 확률이 높다.
회피는 고립으로 이어진다. 상황이 달랐다면 유지했을지도 모를 인간관계를 정리한다. 그들 중에 일자리를 알아봐주거나 육아를 도와줄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카운티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조카를 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고립은 사회적 자본이라는연결망을 파괴한다. 네덜란드 사회심리학자 아르누드 플란팅가Arnoud Plantinga는 연결망 파괴로 생기는 하강의 악순환을 추적했다. 회피로 가난과 수치심이 심해지면 다시 극심한 회피를 낳는다. 이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외로움은 보통 우울증을 낳고 이는 다시 절망감을 키운다.
이와 반대되는 성향인 ‘접근approach‘은 결코 더 건강하다고 볼수 없다. 플란팅가에 따르면, 접근은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아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떨치려고 할 때 생긴다. 당신이 연락한 힘들게 사는 친구가 회피가 아닌 접근을 선택한다면, 친구는 고급 음식점에 가자고 고집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친구는 150달러짜리 러시아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하고, 본인의 카드로 결제하면서 웨이터에게 식비의 30퍼센트를 팁으로 남길 것이다. 현실 부정에 빠진 상태에서 이런 행동은 가난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겠지만, 잠시일 뿐이다. - P94

이로부터 가난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흔한 인식이생긴다. 비교적 안락한 계층이 보기에 빈곤층은 어리석은 결정을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 상황에도 나름의논리가 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은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면에서 고통받는다. 의식주와 교통비 같은 기본적인 생활수단이 부족한 데다, 자신의 처지에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하루하루 다급한 문제가 터지는 상황에서 다음 달이나 내년에 대한 계획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10달러짜리 전기구이통닭을 포기하고 대신 1달러짜리 양배추 한 통을 사다가 데쳐 먹고(근처에 신선한 농산물을 취급하는 슈퍼가 있을 때의 얘기다) 9달러는 저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 셈을 하려면 미래에 형편이 나아지고 출구가 보이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이는 요정의 존재를 믿으라는 말과 같다. 플란팅가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다수의 빈곤층은 절충안을 택하는 편이다. 나아질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수치심은 더욱커진다. - P95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대체로 주변에서 작동하는 수치심 머신의 전제와 전망을 받아들인다. 웨이트 와처스의 경영진이 비만 문제 해결에 헌신적이지 않다거나, 거칠긴 해도 CEO의 징벌적 관리방식이 전과자에게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선뜻 믿지 못한다. 물론 시간을 들여 통계를 공부해보면, 이들에게서 미심쩍은 구석이 보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책임자들이 선의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선의로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이들이 활동하는생태계는 수치심이 지배하고, 유사 과학 연구가 뒷받침하는 곳이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빈민에게 가난의 책임을 교묘히 떠넘기는 연구 중 하나가 바로 마시멜로 실험이다. - P107

마시멜로 실험은 이들이 이미 믿고 있던 내용을 확인해준 연구로 보였다. 지배계층은 자식들에게 유전적, 문화적으로 올바른 자질을 길러주는 반면, 하류층은 그런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각자 처지에 맞게 사는 것이니, 부자를 탓할게 아니었다. 게다가 빈곤층을 돕겠다고 지출을 늘려봤자 도움이안 될 게 뻔했다. 이들은 마시멜로를 냉큼 먹어버린 본인 자식들처럼 그 돈을 낭비할 게 분명했다.
의심스러운 과학에 근거한 이 자족적인 분석은 현상 유지를도와주고 빈곤층에게 수치심을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마시멜로실험의 결론은 더 엄밀한 연구로 무너졌다. 2018년에 연구자들이이 실험을 열배 규모로 실시하면서, 부모의 소득과 교육 수준을통제했다. 실험 결과, 아이들이 마시멜로를 집어 먹게 한 그어떤 요인보다도 부모의 부와 교육 수준이 아이의 장기적인 성공과 훨씬 더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였다.
사실 가난한 아이일수록 만족감을 뒤로 미루지 못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하얀가운을 걸친 연구자가 물질적 보상을 약속했을 때 이를 복음처럼 받아들였는데, 재력 있는 부모가 그런 약속을 항상 지켰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아이는 물질적 보상을 의심했는데, 그동안 결핍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도 냉장고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 아이에게는 지금 당장 확실한 것이 미래에 약속된 보상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신중하고 현명한 전략이다. 내 손안에 든 새 한 마리가 숲속에 있는 새 두 마리보다 낫기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복지사나 환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의사 등을 부모가 불신하는 모습을 봤다면, 자녀들도 마시멜로를 주겠다는 낯선 사람의 약속을 선뜻 믿지 못했을 것이다. - P109

건강관리 산업에서 가장 왜곡된 곳은 노화를 감추기 위해, 더 나아가 노화를 늦추거나 뒤집기 위해 방대한 제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는 분야다. 이 산업은 노화가 심각한 불행이라고 강조한다. 나이가 들면 허약하고 추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감이 떨어지며, 측은하고, 산송장과 같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말에 납득이 가지 않으면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 나이를 속일 때 실제보다 높이지 않고 항상 낮춰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젊어 보여요"는 칭찬이다. 마찬가지로 "나 나이 들었나 봐"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상대방에게 나이 들어 보인다고 대놓고말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여서 그런 상황이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연령차별ageism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널리 퍼져 있다.
다른 수치심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경멸을 기반으로 한다. 잘못됐거나 안이한 선택으로 인생을 망친 자를 비난하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는 것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일을 안 해서, 마약을 해서, 돈을 낭비해서 저렇게 됐다고 손가락질한다. 우리는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모욕을 준다.
연령차별은 다르다. 노년기는 우리 모두 거치는 단계다. 좋든 싫든 단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이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노인에 대한 모욕은 일종의 자기혐오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겪을 상황을 질색하고 경멸하며 기를 쓰고 노화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 P123

그래도 가짜 과학은 불리한 결과를 유리하게 바꿔치기할 수있다. 통계학자가 데이터를 파고들어 원하는 자료가 대충 모일때까지 데이터를 잘게 쪼개는 수법이다. ‘유의미한‘ 결과를 찾아내기 위해 퀸시는 아홉 가지 인지 과제를 더 작은 단위로 나눈다음, 매디슨 기억력 연구 실험 결과를 30번 넘게 분석했다. 이는통계학의 고전적인 사기 수법으로, 이 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은 자신이 통계로 사기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통계학자로서이런 일을 맡게 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대규모 데이터를 잘게나누면 통계조작자는 ‘작은 수의 법칙‘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우리가 동전 던지기를 100번 하면 앞면과 뒷면이 보통 50대 50에 가깝게 나온다. 1,000번을 던지면 반반일 확률이 훨씬높아진다. 그렇지만 100번 연속 던지기를 10회씩 나눠 실행하면, 50대 50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 가운데 8대 2로, 아니면 적어도 7대 3으로 나오는 표본이 몇 개 있을 것이다. 통계조작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적합한 표본을 골라내면 된다. - P128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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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둘은 그다지 다정하지 않았으며, 각자 상대방이 자신의 존재를 거슬려 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 상황을 너무 오랫동안 너무 가까이에서 지내다 보니 어떤 관계든 겪을 수 있는 부자연스러운 근접성의 상태라고판단했다. 두 사람은 낮에 따로 다니기 시작했고 이런 분리는 숨통을 틔워 주었지만, 사이드는 혹시 그들이 사는 구역을 청소하겠다는 싸움이 느닷없이 시작되어서 두 사람이 제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염려되었다. 그의 휴대전화 사용 경험에 따르면 연결 상태란 변덕스러운 것이었고, 정상 상황에서는 햇빛이나 달빛 정도로 생각되는 신호란 것이 돌연 끝없는 일식이나 월식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나디아는 그녀 자신도 아버지라 불렀던 사이드의 아버지에게 사이드가 안전해질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쩌나,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어떤 것도 지킬 수 없다는 뜻일까 걱정했다.
하지만 폐소 공포에 가까운 근거리에서 해방되어 낮이면 떨어져서 다니다 보니 밤에는 서로를 더 따뜻하게, 때로는 연인이라기보다는 가족의 온기처럼 느껴지는 따뜻함을품고 만날 수 있었다.  - P156

"죽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나디아가 그에게 물었다.
"내세 말이야?"
"아니, 죽은 뒤에 말고, 죽을 때, 그 순간에 말이야. 갑자기 모든 게 캄캄해질까? 휴대전화 화면이 꺼지듯이? 아니면 잠이 들 때처럼 이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쪽에도 있는, 이상한 중간 상태로 들어가게 될까?"
사이드는 그건 어떻게 죽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디아가 한참 귀를 기울인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대답했다. "잠들 때 같을 거라고 생각해. 떠나기 전에 꿈을 꾸겠지."
그 순간, 그가 제공할 수 있는 보호는 그뿐이었다. 이 말에 나디아는 따스하고 밝게 빙긋 웃어 보였다. 사이드는 나디아가 자신의 말을 믿는 걸까, 아니면 아니, 그렇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라, 라고 생각했을까 궁금했다. - P183

아마도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할 이주자들을 몰아넣고 유혈 사태를 벌이고 필요한 경우 살육할 배짱이 없다고, 다른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들을 닫을 수가 없으며 새 문들이 계속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공존을 부인하려면 한쪽의 존재가 멈춰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는지도 모르며, 소멸시키려는 쪽 역시 그 과정에서 변해서 너무 많은 본토인 부모들이 그 일이 일어난 후에 자식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자신들 세대가 한 일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이제 문들이 있는 곳의 숫자가 너무 많아 한곳에서 싸워봐야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이유야 어찌 됐든 이 경우에는 품위와 또한 용기가- 두려울 때 공격하지 않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므로- 이겼고 전기와 물이 다시 들어왔으며, 협상이 뒤따랐고, 그 말이 퍼졌으며, 팰리스 가든스 테라스의 벚나무들 사이에서 사이드와 나디아와 이웃들은 축하를 했고, 밤늦도록 축하가 이어졌다. - P184

북구의 여름날 저녁은 끝이 없었다. 사이드와 나디아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잠드는 일이 많았고, 잠들기 전에는 숙소를 등지고 바깥의 바닥에 앉아 각자 휴대전화를 보며 머나먼 곳으로, 겉보기에는 함께 있는 듯했지만 각자, 방황했다. 때로 그 또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온통 난장판인 주변 들판을 거쳐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그들은 대화 부족을 피로의 탓으로 돌렸다. 하루 일과를 마칠 때면 그들은 말도 하기 힘들 만큼 극도로 피곤했다. 휴대전화란 본래 개인을 물리적인 주위 환경에서 동떨어지게하는 힘을 지녔으므로 그것 역시 일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이드와 나디아는 이제 더는 침대에서 서로를 만지려 들지 않았다. 숙소의 커튼으로 가린 공간에서 사생활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마치 벌겋게 드러난 신경이 통증을 유발하듯,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길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 긴 시간이 다툼이 익숙지 않은 두 사람에게 왕왕 다툼을 유발하곤 했다. - P205

 기도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궁금했던 그는 자기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어 부모들이 아직 가르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고, 유난히 더웠던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교리 수업을 해 주면서 기도를 시작했다. 생애 마지막 날까지 기도는 사이드에게 때로는 어머니를, 은은한 향내가나는 부모님의 침실을, 열기 속에서 돌아가는 천장 선풍기를 상기시켰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아버지는 사이드에게 매주 가는 기도 공동체 모임에 따라가겠느냐고 물었다. 사이드는 가겠다고 답했고, 그 후로 금요일마다 아버지는 어김없이 집에들러 아들을 태워 갔다. 사이드는 아버지와 남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기도는 그에게 남자가 되는 것, 남자 중 한 사람이되는 것을 의미했다. 기도는 또한 성인기와 그를 연결해 주는 의식이었으며 특정한 종류의 남자, 신사이자 점잖은 남자의 됨됨이라는 개념에 닿아 있었고, 남자란 공동체와 신앙과 친절함과 품위를 옹호하는 사람이었으며, 달리 말하면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물론 다른 것들을 기도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키운 남자들의 선함을 영예롭게하고자 기도하는 젊은 남자도 있었고, 사이드는 이런 남자중 하아였다. - P220

사이드와 나디아는 서로에게 충실했고, 둘의 관계를 무엇이라 부르는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둘 중 누구도 결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버려진다는 두려움을 안기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그들 자신도 말없이 그런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기도 했다. 그것은 관계가 끊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자 두 사람이 함께 일구어 온 세상이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들의 세상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오직 둘만의 세상이었으며, 둘만의 고유하고 내밀한 공통의 언어였고, 만약 깨진다면 대체될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머린에서의 첫 몇 달간 두 사람을 단단히 묶어 주는 동안, 서로를 놓아주기 전에 각기 상대방이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소망이 두려움보다 더욱 강력하게 자리했고, 결국 그들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오누이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속에서는 우애가 가장 강한 요소였으므로 많은 열애들과 달리 그들의 애정은, 예외적인 몇 번을 제외하면 그 반대인 분노로 굳어지지 않은채 서서히 식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이 점에 대해 들은 모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또한 실수를 한 것일까, 만일 좀 더 기다렸다면 관계가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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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과 중독 사이의 연관성은 새삼스럽지 않다. 2012년 호주의 연구진은 수치심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를 달래는 ‘대처수단으로‘ 문제 음주problem drinking (폭음이나 잦은 음주로 주변에 해를끼치는 음주 습관 - 옮긴이)에 빠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금주 모임인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Alcoholics Anonymous에 참가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2001년의 한 연구에서도, 수치심이 강한 중독자일수록 알코올 의존증이 재발할 확률이 높다고 나타났다.
많은 회복 프로그램이 중독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며 수치단단히 불어넣는다. 여러 연구가 그런 접근방식이 역효과를낳는다고 경고했는데도 말이다.  - P58

연구진은 흡연자가 이른바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 에 반응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위협에 놓인 사람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고정관념에 맞서려고 하지 않았다. 
수치심 하나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동료 집단의 압박, 권태감, 절망감 등 모든 요인이 다양한 생체신호와 마찬가지로 중독 행위에 관여하며, 아직 밝혀내지 못한 요인도 많다. 블라섬 로저스에게는 재미가 그중 하나였다. 블라섬은 이렇게 회상했다." "크랙과 관련된 모든 게 좋았어요. 방탕한 생활, 난잡한 술판 같은 거요 그렇지만 뒷감당은 하기 싫었죠. - P59

당시 크랙은 값비싼 코카인보다 훨씬 더 위험한 약물로 취급받았다. 크랙은 사람의 폭력성을 끄집어냈다. 중독성도 더 심했다. 코카인이 작은 산불이라면, 크랙은 맹렬한 들불이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입을 다무는 또 다른 사실이 있었다. 중산층을 비롯한 입법자들이 코카인에는 친숙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학 기숙사나 파티장에서 코카인을 접했다. 몇 번 흡입해본 사람도 꽤 있었다. 그들 눈에 크랙은 빈민촌ghetto 의 마약이었다. 그래서 크랙을 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약물로 취급했다.
크랙 확산이 절정에 이르면서, 이러한 구분이 인종차별적 연방법에 그대로 반영됐다. 1986년에 통과된 이른바 100대 1 원칙은코카인 500그램, 즉 1파운드 조금 넘는 양을 소지하면 최소 5년의 형량을 받게 했다. 반면 크랙은 고작 5그램을 갖고 있어도 최소 형량이 동일했다. 화장실에서 약 2만 5,000 달러어치 코카인0.25파운드를 피우다 걸린 투자은행 직원은 징역형을 받지 않고빠져나갔지만, 빈민가에서 작은 유리용기에 담긴 15달러짜리 크랙을 소지한 아이는 적어도 5년 동안 수감됐다.
크랙의 유행으로 휘청거리던 도심 빈민촌은 이제 젊은이들까지 교도소에 보내야 했다. 이들은 힘이 없었고, 호소해봤자 국가를 뒷배로 둔 각종 처벌과 비난에 묻혀버렸다. 일단 크랙 피해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중독자‘였다.  - P63

이런 대안을 실행하려면 공감이 필요하다. 피해자를 낙오자로 취급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가족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들이 인류라는 가족의 극히 일부에 불과해도 말이다. 그러나 공감은 어려운 일이며 생판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욱 힘들다. 약물 중독문제의 경우, 사회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이들을 타인으로 밀어내는 쪽을 훨씬 편하게 받아들였다. 즉 가치관이 독특해서 어리석고 끔찍한 선택을 하는 자들로 분류했다. 그러다 보니 인종차별적 정책에 솔깃하게 반응했다. 이는 중독자를 ‘타자화othering‘ 하는또 다른 방법이었다. 기본적으로 이들과 정서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들이 처참한 현실에서 뒹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 P65

미국 사회가 제프 같은 마약성 진통제 중독자에게 보인 반응은 사실상 ‘추방‘이었다. 중독자들은 약을 끊든가, 아니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1980년대에 외치고다닌 마약퇴치운동 슬로건처럼, ‘그냥 거부just say no‘ 해야 했다. 대중이 보기에 아주 간단한 조언이었지만 약물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조언이었다. 이는 중독을 또다시 선택의 문제로 접근했고, 약물을 ‘그냥 거부‘하지 않은 사람은 어리석고 불행한 선택을 한 죄가 있다는 암묵적이지만 뚜렷한 판단을 깔고 있었다. 그러니 사회에서 이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중독자들은 몰락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퍼붓고 실질적 도움은 거의 없는 퇴치 전략은 당연히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대다수 피해자가 교도소에 갇히거나 약물을 남용하는 등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가장 효과적인 마약성 진통제 중독 치료법은 환자에게 행동장애 상담을 하면서, 대체 약물인 메타돈methadone과 부프레놀핀buprenorphine을 쓰는 것이다. 크랙 중독자에게는 의존성을 완화할 약물이 없지만, 마약성 진통제 중독자는 생명줄과 다름없는 대체 약물을 쓸 수 있다. 2016년에 비영리단체 퓨자선신탁ewCharitable Trusts 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약물 보조 치료 Medication-Assisted Treatment, MAT는 "비약물 치료와 비교해 불법적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눈에 띄게 낮췄다." 이 치료법을 활성화하면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위험 즉 HIV바이러스, C형 간염, 길거리 폭력 등도 낮출 수 있다. - P76

놀랍게도 이곳을 거친 고객들이 소송을 걸고 또 이 시설에 대한 자세한 폭로기사가 나왔는데도, 리커버리 커넥션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주 당국자가 1년에 한 번씩 이곳을 방문하고, 판사가회복 중인 중독자를 계속 이곳에 보낸다. 물론 재활환자에게 일을 시키는 시설은 이곳만이 아니다.
이는 수치심에 기생하는 사업모형이다. 중독에서 회복 중인 취약 집단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들고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업체 입장에서 보면 고객의 수치심이 입막음 역할을 한 것이다. 정부 기관과 보험사 양쪽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다른 곳보다 비용이 훨씬 저렴하므로 판사 입장에서 예산에 맞는선택지이기 때문이다(판사가 7만 3,000달러나 주고 체류해야 하는 클리프사이드 말리부에 중독자를 보낼 리는 없다).
두 형태의 재활시설, 즉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기간제 노역과 온갖 시설을 갖춘 캘리포니아주의 회복센터 모두 무엇이든 허용되는 재활산업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과학은 선택사항에불과하므로, 검증도 안 된 매우 높은 재활 성공률이 시설 홍보물에 실린다. 고객에게 말을 쓰다듬거나 춤추게 하는 곳이 있는가하면, 90대 노인을 번쩍 들어 화장실에서 침대로 옮기게 하는 곳도 있다. 이런 치료법이 실패해 같은 고객이 두 번 세번 재입소한다면? 현금흐름이 이어지는 한 충성스러운 고객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런 산업이 버젓이 존재하고 성장하는 이유는 사회가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대중은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또 냉정하게도 이들이 자책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야 스스로 고칠 수 있다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 P82

빈곤층에게 돈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방법은 있다. 사채업자와 영리 목적의 허위 대학은 빈곤충이 대출을 받도록 유도해 이윤을 취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심각한 빚더미에 오른다. 주 정부는 당첨 확률이 100만분의 1인 복권을 팔아 빈곤층에게서 이윤을 뽑아낸다. 빈민가의 집주인과 비우량 자동차 담보대출 업체도 이들을 희생양 삼아 돈을 번다. 이런 돈벌이에서 가장 쉬운 표적은 절박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스콧 허친스 같은 사람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행태보다 부자들의 돈이 이들에게 들어가는 것을 더 비판한다. 빈곤층은 비용으로 여겨진다. 유권자와 납세자는 그런 지출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미국 정부는 이런 관점을 대변하며, 양대 정당의 정치인들도 특히 1980년대부터 이런 인식을 퍼뜨렸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주입한 비판적 메시지의 핵심은 이렇다. ‘아무리 푼돈이라도 그들한테는 아까워."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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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디아와 사이드는 전기가 끊긴 덕에 실내에 있을때면 원격 감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무장한 사내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 집을 수색할수 있었고 바깥에 나가면 하늘과 우주 공간에서 지켜보는 렌즈들, 반군과 그 정보원 누구일지 모르고 아무라도 될수 있는 들의 눈에 띌 수 있었다.
이제 사람들이 보는 데서 하는 수밖에 없게 된 사적인 행위 중 하나는 용변이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사이드와 나디아가 사는 아파트 건물의 화장실은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주민들은 건물 뒤쪽의 작은 안뜰에 남자용 하나와 여자용 하나로 깊은 도랑 두 개를 파서 빨랫줄에 무거운 침대보를 걸어 분리했다. 이제는 모두가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구름을 머리에 이고 악취를 참으며, 행위는 남의 눈에 띌 수 있어도 행위자의 정체는 어느 정도 혼자만이 알 수 있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변을 보아야 했다. - P104

 사이드가 아버지에게 왜 그러느냐고, 대체 왜 남겠다는 거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네 엄마가 여기 있잖니."
사이드가 말했다. "엄마는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나한텐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이었다. 사이드의 어머니는 사이드의 아버지에게는 죽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이드의 아버지가 아내와 평생을 보낸 곳을 떠나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녀의 무덤을 매일 찾아갈 수없다는 건 어려웠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가 주는 것이 더 많았기에 아버지는 어떤 의미로는 과거에 머무르고싶었다.
그러나 사이드의 아버지는 또한 미래도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드에게 말하면 가지 않으려 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아들이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말하지 않은 그 이유는 바로, 젊었을 때 갖는 모든 본능과는 반대로 홍수가 왔을 때 부모는 자식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걸 그가 알았으며, 부모로서 생의 그 시점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손을 꼭 붙드는 것은 아이를 더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편이 아니며, 물속으로 끌고 가 익사시킬 수있었다. 자녀는 이제 부모보다 힘이 강했으며, 지금은 극한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녀의 생의 곡선은 한동안만 부모의 생과 일치하는 듯이 보일 뿐 실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위에 위치하여 산 위에 산이 있고 곡선 위에 곡선이 있는것이며, 아들의 것은 아직 상향인 반면에 아버지의 곡선은 이제 하향해야 했다. 노인이 둘을 가로막는다면 이 두 젊은이들의 생존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었다. - P107

비치 클럽에서 빠져나와 걷자 산 아래쪽에 난민 캠프 같은 것이 보였다. 수백 개의 텐트와 임시 거처와 말 그대로 각양각색 스펙트럼이 넓긴 했지만 다크 초콜릿 색깔에서 밀크티 색깔에 이르는, 대부분 갈색이라 통칭할 수 있는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세워 놓은 기름 드럼통안에 피운 장작불 주위에 모여 온 세상의 뒤섞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통신 위성, 또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도청하는 스파이들이나 들을 법한 언어들의 불협화음이었다.
이 그룹에서는 모두가 외국인이었고,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도 외국인이 아니었다. - P118

그는 사람들이 그 집의 귀중품을 가져가기 시작하자 이를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디아는 그런 입장이 말도안 될 뿐더러 사이드에게 물리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천치 같은 소리 말라고,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냉혹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이드는 그녀의 어조에 충격을 받았고, 순순히 따르기는 했지만 서로에대한 이런 새로운 말투가, 이제 그들의 대화에 종종 끼어들고는 하는 이런 퉁명스러움이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떤 곳을향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신호일까 생각했다.
나디아 역시 그들 사이의 마찰을 눈치챘다.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짜증의 사이클을 어떻게 해제시켜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런 사이클은 한번 시작되면 끊기가어려웠고, 외려 일부 알레르기 반응이 그러듯 다음번에는 짜증이 치솟는 문턱이 더 낮아지는 것만 같았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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