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입안자의 입장에서는 빈민을 두 집단으로 나눠야 했다.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자와 아닌 자였다. 이때 정책 입안자는 다른 집단도 아닌 다수의 빈민층에게서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회과학에서 ‘밑바닥 혐오 last-place aversion‘라고 부르는 현상 덕분이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빈곤은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으므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든 빈곤충으로 묶이길 거부하며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과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분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빈민끼리 연대하기가 힘들고, 이른바 자격 있는 집단과 아닌 집단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 - P89
많은 이들에게 가난이라는 수치심은 물질적 고통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이나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달러는 기록할 수 있어도 감정은 그럴 수 없다. 감정은 형체가 없고 주관적이어서 종종 무시된다. 그러다 보니 복지정책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엔진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 P92
문제를 숨기는 방식을 ‘회피withdraewal‘라고 한다. 한동안 못 본친구에게 연락해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고 해보자. 그런데 친구에게 돈이 없고 미납 고지서가 쌓였으며 빚이 많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었다. 친구는 지금 내 상황이 이렇다고 털어놓을까? 대개는 말하지 않는다. 작가 닐 개블러가 시사 잡지 디 아틀란틱The Atlantic에 썼듯이, 이 경우 남성들은 카드빚보다는 자신이 체험한 비아그라 효과를 얘기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발기부전보다 가난을 훨씬 더 부끄러워할 것이다. 당신이 연락한 친구는 개인의 재정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를 들어 약속을 거절할 확률이 높다. 회피는 고립으로 이어진다. 상황이 달랐다면 유지했을지도 모를 인간관계를 정리한다. 그들 중에 일자리를 알아봐주거나 육아를 도와줄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카운티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조카를 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고립은 사회적 자본이라는연결망을 파괴한다. 네덜란드 사회심리학자 아르누드 플란팅가Arnoud Plantinga는 연결망 파괴로 생기는 하강의 악순환을 추적했다. 회피로 가난과 수치심이 심해지면 다시 극심한 회피를 낳는다. 이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외로움은 보통 우울증을 낳고 이는 다시 절망감을 키운다. 이와 반대되는 성향인 ‘접근approach‘은 결코 더 건강하다고 볼수 없다. 플란팅가에 따르면, 접근은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아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떨치려고 할 때 생긴다. 당신이 연락한 힘들게 사는 친구가 회피가 아닌 접근을 선택한다면, 친구는 고급 음식점에 가자고 고집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친구는 150달러짜리 러시아 보드카 한 병을 주문하고, 본인의 카드로 결제하면서 웨이터에게 식비의 30퍼센트를 팁으로 남길 것이다. 현실 부정에 빠진 상태에서 이런 행동은 가난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겠지만, 잠시일 뿐이다. - P94
이로부터 가난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흔한 인식이생긴다. 비교적 안락한 계층이 보기에 빈곤층은 어리석은 결정을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적 상황에도 나름의논리가 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은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면에서 고통받는다. 의식주와 교통비 같은 기본적인 생활수단이 부족한 데다, 자신의 처지에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하루하루 다급한 문제가 터지는 상황에서 다음 달이나 내년에 대한 계획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물론 10달러짜리 전기구이통닭을 포기하고 대신 1달러짜리 양배추 한 통을 사다가 데쳐 먹고(근처에 신선한 농산물을 취급하는 슈퍼가 있을 때의 얘기다) 9달러는 저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 셈을 하려면 미래에 형편이 나아지고 출구가 보이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이는 요정의 존재를 믿으라는 말과 같다. 플란팅가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다수의 빈곤층은 절충안을 택하는 편이다. 나아질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수치심은 더욱커진다. - P95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우리는 대체로 주변에서 작동하는 수치심 머신의 전제와 전망을 받아들인다. 웨이트 와처스의 경영진이 비만 문제 해결에 헌신적이지 않다거나, 거칠긴 해도 CEO의 징벌적 관리방식이 전과자에게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선뜻 믿지 못한다. 물론 시간을 들여 통계를 공부해보면, 이들에게서 미심쩍은 구석이 보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책임자들이 선의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선의로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이들이 활동하는생태계는 수치심이 지배하고, 유사 과학 연구가 뒷받침하는 곳이다.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빈민에게 가난의 책임을 교묘히 떠넘기는 연구 중 하나가 바로 마시멜로 실험이다. - P107
마시멜로 실험은 이들이 이미 믿고 있던 내용을 확인해준 연구로 보였다. 지배계층은 자식들에게 유전적, 문화적으로 올바른 자질을 길러주는 반면, 하류층은 그런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믿음이었다. 따라서 각자 처지에 맞게 사는 것이니, 부자를 탓할게 아니었다. 게다가 빈곤층을 돕겠다고 지출을 늘려봤자 도움이안 될 게 뻔했다. 이들은 마시멜로를 냉큼 먹어버린 본인 자식들처럼 그 돈을 낭비할 게 분명했다. 의심스러운 과학에 근거한 이 자족적인 분석은 현상 유지를도와주고 빈곤층에게 수치심을 불어넣는다. 그렇지만 마시멜로실험의 결론은 더 엄밀한 연구로 무너졌다. 2018년에 연구자들이이 실험을 열배 규모로 실시하면서, 부모의 소득과 교육 수준을통제했다. 실험 결과, 아이들이 마시멜로를 집어 먹게 한 그어떤 요인보다도 부모의 부와 교육 수준이 아이의 장기적인 성공과 훨씬 더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였다. 사실 가난한 아이일수록 만족감을 뒤로 미루지 못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하얀가운을 걸친 연구자가 물질적 보상을 약속했을 때 이를 복음처럼 받아들였는데, 재력 있는 부모가 그런 약속을 항상 지켰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아이는 물질적 보상을 의심했는데, 그동안 결핍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당장 내일 아침에 먹을 음식도 냉장고에 없었을 것이다. 또 이 아이에게는 지금 당장 확실한 것이 미래에 약속된 보상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신중하고 현명한 전략이다. 내 손안에 든 새 한 마리가 숲속에 있는 새 두 마리보다 낫기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복지사나 환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의사 등을 부모가 불신하는 모습을 봤다면, 자녀들도 마시멜로를 주겠다는 낯선 사람의 약속을 선뜻 믿지 못했을 것이다. - P109
건강관리 산업에서 가장 왜곡된 곳은 노화를 감추기 위해, 더 나아가 노화를 늦추거나 뒤집기 위해 방대한 제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는 분야다. 이 산업은 노화가 심각한 불행이라고 강조한다. 나이가 들면 허약하고 추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감이 떨어지며, 측은하고, 산송장과 같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말에 납득이 가지 않으면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 나이를 속일 때 실제보다 높이지 않고 항상 낮춰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젊어 보여요"는 칭찬이다. 마찬가지로 "나 나이 들었나 봐"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상대방에게 나이 들어 보인다고 대놓고말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여서 그런 상황이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사실이다. 연령차별ageism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널리 퍼져 있다. 다른 수치심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경멸을 기반으로 한다. 잘못됐거나 안이한 선택으로 인생을 망친 자를 비난하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는 것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일을 안 해서, 마약을 해서, 돈을 낭비해서 저렇게 됐다고 손가락질한다. 우리는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 당연하다는 듯 모욕을 준다. 연령차별은 다르다. 노년기는 우리 모두 거치는 단계다. 좋든 싫든 단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이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노인에 대한 모욕은 일종의 자기혐오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겪을 상황을 질색하고 경멸하며 기를 쓰고 노화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 P123
그래도 가짜 과학은 불리한 결과를 유리하게 바꿔치기할 수있다. 통계학자가 데이터를 파고들어 원하는 자료가 대충 모일때까지 데이터를 잘게 쪼개는 수법이다. ‘유의미한‘ 결과를 찾아내기 위해 퀸시는 아홉 가지 인지 과제를 더 작은 단위로 나눈다음, 매디슨 기억력 연구 실험 결과를 30번 넘게 분석했다. 이는통계학의 고전적인 사기 수법으로, 이 작업을 수행한 사람들은 자신이 통계로 사기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통계학자로서이런 일을 맡게 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대규모 데이터를 잘게나누면 통계조작자는 ‘작은 수의 법칙‘에 따라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우리가 동전 던지기를 100번 하면 앞면과 뒷면이 보통 50대 50에 가깝게 나온다. 1,000번을 던지면 반반일 확률이 훨씬높아진다. 그렇지만 100번 연속 던지기를 10회씩 나눠 실행하면, 50대 50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 가운데 8대 2로, 아니면 적어도 7대 3으로 나오는 표본이 몇 개 있을 것이다. 통계조작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적합한 표본을 골라내면 된다. - P128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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